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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이야기

탕건장 김공춘
발행일 : 2021-01-22 조회수 : 3466
탕건장 김공춘

1919. 5. 2 ~ 2020. 10. 3 | 보유자 인정: 1980년 11월 17일

위대한 문화유산
한국문화재재단의 무형문화재이야기
탕건장 김공춘

국가무형유산 탕건장
Master Artisan of a Tanggeon(Hat) Making

각읍 수령이 겁을 내여

탕건(宕巾)바람 보선발로 대숲으로 달아나며

"통인아 공사궤(公事櫃) 급창아 탕건 주워라."

대도집어 내던지고 병부 입으로 물고

힐근 실근 달아날 제

본관이 겁을 내어 골방으로 달아나며

통인의 목을 부여안고

"날 살려라 통인아 날 살려라"

- <춘향전>의 암행어사 출두 대목

조선에서 발전한 독특한 관모공예

탕건은 조선에서 발전한 독특한 모자[冠]로, 성인 남자들이 갓을 쓸 때 받쳐 쓰는 의관이다. 탕건과 같은 종류의 남성용 관모는 중국이나 한국에서 모두 상투형 머리 모양[髮式]을 취한 다음 착용하였다. 탕건은 머리를 보호하고 상투가 흐트러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사용하였고, 또한, 갓 대신 평상시에 스는 모자로 독립된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원래 탕건은 갓 속에 겹쳐 쓰던 것인데 후에 평상용으로 바뀐 것이다.

탕건은 언제부터 비롯하였는지 분명하지 않다. 다만 탕건의 유래와 관련해서 최남선이 견해를 제시하였다. 우리나라 고유의 관모 세 종류 중 탕건은 감투[坎頭]나 복두의 발전과 관련된다는 것이다. 이중 ‘감투’는 한자 ‘감두’라는 글자가 와전되었다고 보았는데, 조선 초기에는 사용 계층을 제한하는 논의가 여러 차례 보인다. 태종 16년(1416)에 관복 제도를 고치면서, 향리들이 평상시에 감투를 쓰고 평민이 쓰는 것은 금지하였다. 세종28년(1446)에는 감투를 비롯한 복색의 조건을 집현전이 의논하여, 3년 뒤인 세종 31년(1449)에 보로소 유품조사(流品朝士), 의관자제 등으로 제한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관직에 나간 벼슬아치로 계층을 제한하여 사용하던 감투는 머리를 감싸는 ‘머리동이’나 ‘두건’이라는 형식에서 복두나 사모의 영향을 받아서 형식적인 변모를 거쳤다. 감투는 조선시대 선비들이 평상시에 거처할 때 착용하던 관모였는데, 중종 20년(1525)에는 조계상이라는 사람이 집에서 바둑을 둘 때 비단감투를 썼던 기록으로 확인된다.

그밖에도 선비들이 썼던 다양한 관모에 대해서는조선 명종 때 이제신이 「청강쇄어」에서 정자관, 주자관, 염계관, 동파관, 충정관, 방건 등의 관모를 열거하였다. 특히 이들 관모는 정자나 주자 및 소동파 등 중국의 유명한 학자들이 즐겨 쓰던 모자들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모자들은 실제로 조선에서 제작되고 유행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렇게 다양한 관모 중에도 탕건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탕건이라는 용어에 대한 용례는 1614년에 편찬된 「지봉유설」에서 정주의 탕건을 안주의 총감투나 통영의 총갓양태, 석성의 망건 등 여러 말총 공예품과 함께 팔도의 특산품으로 열거한 것이 최초이다. 이로 미루어 17세기 경에는 이미 말총을 재료로 삼아서 총감투와 총갓, 망건과 탕건 등 여러 종류의 관모를 제작, 유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섬세한 손놀림으로 만들어지는 손끝공예

탕건장의 섬세한 손놀림으로 한 올 한 올 떠올려 만들어지는 탕건은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애용하던 모자공예품이었다. 조선시대에 발간된 공인들의 법전이라고 할 수 있는 「대전회통」에 의하면 서울 중앙의 공전(工典)의 조직에는 경공(京工)과 상의원(尙衣院)에 사모장(紗帽匠) 등이 있으나 탕건을 어느 곳에서 만들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제주도에서 탕건이 성행한 것은 어느 때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조선시대 중엽 이후부터 시작되어 한말에 이르러 가장 성행하였다. 제주도는 본래 육지보다 시국이 안정되고 조용한 곳이어서 차분한 관모공예가 성행하였다. 고려 때는 몽고인들이 침입하여 몽고의 방갓, 즉 돌하루방의 모자와 같은 것이 성행하였는데 그 후 차츰 갓, 망건, 탕건 등이 성행하게 되었다.

제주의 탕건은 홑탕건[疎宕]과 겹탕건[密宕]이 있으며 그밖에도 바둑탕건이 있다. 바둑탕건이란 이중사망(二重絲網)·삼중사망(三重絲網)·오중사망(五重絲網)의 기법으로 사각 무늬를 놓은 것이며, 이는 탕건이 독립된 모자구실을 함에 따라 장식화한 변형이다. 말총이 풍부한 제주도는 말총공예의 본고장이었고, 탕건은 제주 여인이 삶을 영위하기 위한 생계 수단이었다. 가느다란 말총을 엮어 만든 탕건을 제작하는 탕건장은 타고난 집중력과 유연한 손놀림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데, 그 기술은 엄마에서 딸로 모녀간에 세습되었다.

탕건장 김공춘 선생

김공춘 선생은 1919년 5월 2일, 제주도 화북에서 아버지 김홍윤 선생과 어머니 박영선 여사 사이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평범한 편이었다. 7살(1925년)에 아버지가 일본의 공장에 취직하여 부모님은 일본으로 건너갔고, 선생은 할머니, 고모와 살면서 탕건 제작기술을 배웠다. 9살(1927년)이 되던 해에 일본에 가서 부모님과 상봉했으나, 이듬해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제주도로 다시 건너와 살았다.

제주도에서 탕건 짜는 기술은 주로 모녀간에 세습되는 작업이었다. 제주도에서 태어난 여자 어린이가 10여세에 이르면 어머니의 무릎 앞에 앉아서 탕건 짜는 기술을 보고 익히면서, 15세쯤 되면 한 사람 몫을 스스로 해내게 된다. 선생도 다른 제주 여인들과 마찬가지로 가족에게 탕건을 배웠고 대대로 탕건을 짜던 가정으로, 할머니와 어머니가 모두 탕건을 잘 짰다. 선생인 예닐곱 살 되던 해에 열 살 위인 고모 김수윤 선생으로부터 탕건 짜는 기술을 배우기 시작하여, 일본에서 돌아온 13~14세 무렵부터는 내다 팔 수 있게 되었다. 선생이 어렸을 당시 화북에서는 해녀를 천하게 여겼기 때문에 바다에 나가지 못하게 했다. 따라서 일반가정에서도 특별히 다른 부업이 없으면, 해녀로서 물질을 하러 나가는 대신 온 동네의 아낙네들이 모여 탕건과 양태 및 총모자 등 말총 공예품을 부업으로 삼았다.

제주도에서 행해지는 탕건 작압은 제집 방안에 작업하던 탕건도구를 두고 밭일이나 바깥일을 보다가 여유 있을 때마다 일하기도 했다. 그러나 화북동에서는 대개 2~3명 혹은 6~7명의 또래들이 혼자 사는 동리의 여인 집에 모여 제작했다. 모여서 일하던 곳을 ‘일청’ 혹은 ‘탕근청(탕건청)’이라 불렀다. 선생도 탕건청에 가서 작업했는데, 탕건청은 대개 동네에서 혼자 사는 과부의 집이었다고 한다. 탕건청에 모이는 동네 처녀들은 비슷한 나이로 10~20명이 모여서 초저녁부터 11시 경까지 작업하고 새벽에 일어나 집에 가서 밥을 먹고 밭일을 하러 나왔다. 동리의 탕건청에서는 또래들끼리 따로 모여 탕건을 만드는 풍습도 있었다. 탕건청에서 탕건을 만들 당시의 김공춘 선생은 젊은 나이에 눈도 밝았기 때문에 엉성한 탕건은 3일에 한 개 정도를 짰다고 한다. 이렇게 며칠이 걸려 완성시킨 탕건이 5개나 10개가 되면, 관덕정이나 화북 주변에 있는 삼양, 조천, 서안 등지에서 5일장이 서는 날 새벽에 내다 팔았다. 1970년대 들어서 새마을운동의 여파로 제주시 화북과 삼양동 일대에 새마을공장이 세워졌다. 이 공장에는 선생을 비롯하여 탕건 제작기능을 지닌 화북동 인근의 수백명의 여성이 취직하여 관광기념품을 제작했다. 당시는 이미 전통 관모가 소비되지 않던 시절이었기에 탕건을 비롯한 총모자, 망건 등 말총공예의 여러 기법을 응용하여 여성용 모자, 브로치 등을 개발했다. 1975년 10월 9일에 있었던 제3회 육영수여사배 전국공예품경진대회에서 입상한 바 있는 선생은 당시에도 솜씨 좋은 축에 들었다. 1980년에 기능보유자가 된 뒤 매년 전승공예대전 및 기능보유자 작품전에 탕건이나 정자관 등을 빠짐없이 출품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다 2009년 2월 명예보유자로 인정되었다. 2020년 10월 3일, 향년 102세의 나이에 노환으로 타계했다. 딸인 김혜정 선생이 2009년 탕건장 기능보유자로 인정되어, 대를 이어 탕건 제작기술의 맥을 잇고 있다.

작품

특별히 장식이랄 게 없고, 고정된 형식을 꾸준히 반복하는 일이라서 남은 관건은 눈 밝은 이나 알아볼 수 있는 품격일 것이다. 미세한 차이가 크게 느껴지는 작품이 바로 탕건이다. 선생의 작품은 이런 맥락에서 잔잔한 감동을 안겨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바둑탕건 21x16cm바둑탕건 21x16cm

바둑무늬의 탕건으로 남자들이 갓을 쓸 때 받쳐쓰는 모자의 일종으로 사모나 갓대신 평상시 집안에서 쓴다.

접탕건 21x16cm접탕건 21x16cm

남자들이 갓을 쓸 때 받쳐 쓰는 모자의 일종으로 사모나 갓대신 평상시 집안에서 쓴다.

제작도구와 작업과정

탕건은 줄수와 도리수의 촘촘한 정도에 따라 막줄탕건, 상탕건, 중탕건 및 하탕건으로 구분된다. 제작도구에는 탕건골, 알통골, 쳇때기, 마흐레, 털망, 총사발, 탕건바농, 연발, 박죽, 미명실, 뜸, 장낭과 장낭실, 중등띠, 총칼, 먹솔과 먹사지, 정술, 재골, 재골용 장낭, 골무, 차롱 등이 쓰인다.

제작도구
제작도구들

탕건골 : 탕건의 형태로 짜내거나 정자관의 이마 부분을 짜기 위해 사용하는 나무틀

마흐레 : 쳇때기 위에 얹어서 탕건골이 안정적으로 놓여 탕건을 잘 결을 수 있도록 완충작용을 하던 것

쳇때기 : 탕건골을 올려놓고 탕건을 결어가는 일종의 작업대이자 작업도구를 넣어두는 수납장치

연발 : 탕건골의 표면을 매끈하게 만들어 탕건 작업을 쉽게 도와주는 보조도구

정자관 제작모습
정자관 제작모습

정자관은 첫관, 중간관, 막관을 따로 제작한 후 줄머리, 관꼭대기를 연결하여 만든다. 사진은 정자관의 막관을 제작하는 모습이다.

[KBS 6시 내고향] 내고향 문화재 26편


(말의 고장 제주도의 제주마. 농경용으로 밭 밟기(진압), 말 테우리(짐 운반), 마차(농산물 출하)로도 사용되었고 갓이나 망건 및 탕건 정자관 등 모자의 소재로 말총이 이용되었다.)


프로그램 동영상 소스코드 정보
대본보기 [KBS 6시 내고향] 내고향 문화재 26편 제주마
자막> 임혁필
인물> 임혁필
임혁필) 자 오늘은 제가 오늘 문화재 힌트를 하나 보여드릴 건데 한번 맞혀보세요. 바로 이겁니다. (말소리) 네, 맞습니다, 괜히 한 것 같습니다. 근데 이게 말인데 그냥 말은 아니고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제주말입니다. 신비의 섬 제주도에서 만나는 제주말, 지금 시작합니다.
자막> 내고향 문화재
타이틀> 내고향 문화재
NAR> 천혜의 자연을 품고 있는 섬 제주도. 그곳에 소중한 우리의 자연유산이 있습니다. 드넓은 초원을 자유롭게 뛰노는 제주마.
자막> 말의 고장 제주도 제주마 제주특별자치도
서브타이틀> 말의 고장 제주도 제주마
NAR> 아름다운 섬 제주도에서만 만날 수 있는 그림 같은 풍경. 그곳으로 지금 떠나보시죠.
자막>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장소>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NAR> 성산 일출봉이 보이는 해안가 날씨는 좀 흐렸지만, 그 나름대로 운치가 있습니다. 마치 한 폭의 수묵화 같지 않습니까?
자막> 성산 일출봉 천연기념물 제420호(세계자연유산)
NAR> 성산 일출봉은 천연보호구역으로 세계자연유산이기도 합니다. 저 멀리 말도 많이 보이시나요?
임혁필) 저기 말이 보입니다.
자막> 사람은 서울로 말은 제주로~
임혁필) 아 사람은 서울로 보내고 말은 제주로 보내라고 하지 않습니까? 제주하면 말 아니겠습니까?
NAR> 이곳에서는 쉽게 말을 볼 수 있는데요. 특히 사람들이 말을 타고 해안가를 도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임혁필) 안녕하세요.
김용재) 안녕하세요.
임혁필) 아니 제가 멀찍이서 봤는데 이 멋진 해안에서 말과 함께 거니는 모습이 너무 멋있습니다. 근데 저도 좀 탈 수 있을까요?
김용재) 예, 탈 수 있습니다.
임혁필) 안녕하세요?
말)….
임혁필) 하나 둘 셋
김용재) 발끝은 하늘을 보면 편합니다.
자막> 발끝을 하늘로~
임혁필) 아 하늘이요?
NAR> 혼자서 멋있게 달려보고 싶었지만, 몸이 제 맘 같지 않아서….
남자 MC> 아 뭐 어디 잡혀가는 사람 같아요.
여자 MC> 굉장히 경직돼 있어요.
NAR> 전 최고로 기쁜 표정이었는데…. 말을 타고 도착한 곳은 해안가에 있는 한 승마장입니다.
여자 MC> 아 멋있네요~
NAR> 이곳에서는 더 많은 말들을 볼 수 있는데요. 특히 성산 일출봉 해안가 일대는 천해 자연환경 덕분에 말들이 자라기 좋은 환경이라고 합니다.
임혁필) 제가 타고 온 말. 이 말이 어떤 말인가요?
자막> 김용재 / 대표/OO 승마장
인물> 김용재 / 대표/OO 승마장
자막> 한라마라고 해서 옛날 더러브렛(세계적인 경주마) 말이 있는데 그 말과 제주마 중간에서 태어난 말을 한라마라고 합니다.
김용재) 한라마라고 해서 옛날 더러브렛(세계적인 경주마) 말이 있는데 그 말과 제주마 중간에서 태어난 말을 한라마라고 합니다. 제주마는 천연기념물이에요.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돼 있죠.
자막> 제주마는 천연기념물로 지정
임혁필) 예? 천연기념물이요? 그럼 우리나라 문화재인 거 아니에요?
자막> 천연기념물?!
임혁필) 아니 잠깐만. 아 이제 좀 알 것 같습니다. 하하하 아니 그러면 제주마를 볼 수 있는 곳이 어딘가요?
자막> 제주마를 볼 수 있는 곳은?
김용재) 제주시의 용강동에 가면요 그 5.16도로변에 방목하는 곳이 있습니다.
자막> 제주축산진흥원 목마장 제주시 용강동
장소> 제주축산진흥원 목마장
NAR> 천연기념물 제347호로 지정된 제주마는 따로 보호 관리되고 있는데요.
자막> 자료제공 문화유산채널 제주의 제주마 천연기념물 제347호
NAR> 저 푸른 초원위를 힘차게 달려가는 제주마. 정말 멋있지 않습니까?
남자 MC> 아니 무슨 영화에 나오는 말들 같아요.
NAR> 한때는 2만 마리가 넘었지만 지금 그 수가 급격히 줄어 보호가 절실합니다.
임혁필) 아까 얘기 들었던 천연기념물 제주마인 것 같습니다. 근데 아까 한라말과는 다르게 다리도 짧은 것 같고 몸집도 작고 배도 나오고 조랑말 같네요.
자막> 다리도 짧고 몸집도 작고 배도 나오고~ 제주마 = 조랑말 = 과하마 = 삼척마
NAR> 과실나무 밑을 지날 정도로 키가 작다고 해서요 과하마라고도 불렸다고 합니다.
자막> 제주마는 언제부터 제주도에서 사육되지 시작한 걸까?
임혁필) 이 제주마가 언제부터 이 제주도에 사육되지 시작한 건가요?
자막> 김경원 / 원장/제주 축산진흥원
인물> 김경원 / 원장/제주 축산진흥원
자막> 고려시대 충렬왕 2년인 1276년에 성산읍 수산평에 160여 마리가 들어오는 걸 시작으로 해서 원나라가 우리나라를 지배하는 100년 동안 제주도에서 말이 증식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내부적으로 군마로써 활용하는 그런 계기가 됐습니다.
김경원) 고려시대 충렬왕 2년인 1276년에 성산읍 수산평에 160여 마리가 들어오는 걸 시작으로 해서 원나라가 우리나라를 지배하는 100년 동안 제주도에서 말이 증식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내부적으로 군마로써 활용하는 그런 계기가 됐습니다.
NAR> 몸집은 작지만, 이 제주마가 다부집니다. 장거리 이동에 적합하고요 발톱이 견고해서 산간지대에서 잘 견딜 수 있습니다.
자막> 응상백 태조 이성계 명마
NAR> 태조 이성계의 명마 응상백도 제주마고요
자막> 탐라순력도 공마봉진 보물 제652-6호
NAR> 그뿐만 아니라 제주 목사가 신성한 말을 점검하는 그림을 그릴 정도로 제주마는 유명했습니다.
김경원) 이제 우리 농가에서도 농경용으로 많이 이용됐습니다
자막> 밭 밟기(진압) 말 테우리(짐 운반) 마차(농산물 출하)
김경원) 밭갈이라던가 운반하는 마차, 지금 자동차에 해당되는 승용. 그다음 우리가 쓰는 것이라던가 망건. 이런 소재로 말총이 이용되어 왔고
자막> 갓이나 망건 및 탕건 정자관 등 모자의 소재로 말총이 이용
임혁필) 아니 그럼 그 대감님들이 쓰는 모자, 갓. 그거 만드는 데가 지금 있습니까?
김경원) 지금 이제 거의 뭐 돌아가시고 한 두 분 정도가 기능보유자로서 역할을 하고있는걸로 알고 있습니다.
NAR> 그래서 직접 무형문화재전수회관에 찾아가 봤습니다.
자막> 제주시무형문화재전수회관
장소> 제주시무형문화재전수회관
자막> 김혜정/중요무형문화재 제67호 탕건장
인물> 김혜정/중요무형문화재 제67호 탕건장
NAR> 예부터 제주에서는 말총으로 갓 등의 공예품을 만드는 관모 공예가 성행했습니다.
임혁필) 선생님, 노래가 너무 구슬픈데 이게 무슨 노래인가요?
김혜정) 이것은 탕건 노래에요
자막> 탕건 노래!
임혁필) 탕건 노래요? 아니 그럼 지금 만드시는 게 탕건이에요?
자막> 탕건
NAR> 탕건은 양반들이 갓 안에 쓰던 실내용 모자인데요.
자막> 조선시대 양반들이 실내에서 예를 갖추기 위해 착용했던 모자
19세기 중반 이후 서민들도 사용
NAR> 조선시대 선비들은 실내에서도 예의를 갖추기 위해 모자를 착용했고 19세기 중반 이후에는 서민들도 썼다고 하네요. 우리나라 말총이 대부분 제주도에서 생산되기 때문에 탕건은 제주도에서 가장 많이 만들어지는데요. 한땀 한땀 담긴 정성은 장인의 명함도 못내 밀 것 같습니다.
자막> 홑탕건
NAR> 탕건은 엮어나가는 방법에 따라 모양이 달라지는데요. 이건 홑겹으로 엮는 홑탕건
자막> 겹탕건
NAR> 좌우겹으로 엮은 겹탕건입니다.
자막> 바둑탕건
NAR> 그리고 바둑판 모양과 같다고 해서 바둑탕건입니다.
임혁필) 그러면 지금 만드신 이 탕건이 제주마. 제주마의 말총으로 만든 거잖아요?
김혜정) 예.
자막> 제주마의 말총!
임혁필) 아~ 이거 보십쇼. 이게 제주마의 말총입니다. 근데 제가 정말 궁금한 게 있는데 왜 다른 재료도 많이 있는데 굳이 이 말총을 가지고 탕건을 만들었을까요?
자막> 왜? 말총으로 탕건을 만든 걸까요?
자막> 김혜정/중요무형문화재 제67호 탕건장 머리에 쓰면 가볍고 땀도 흡수가 잘 되고 그래서 꼭 말총으로 만드는 거예요. 다른 재료로는 이렇게 만들지 못해요. 구부러져서
김혜정) 머리에 쓰면 가볍고 땀도 흡수가 잘 되고 그래서 꼭 말총으로 만드는 거예요. 다른 재료로는 이렇게 만들지 못해요. 구부러져서
자막> 탕건 하나 제작 기간 3개월!
김혜정) 다 만들고 나면 이렇게 완성이 돼요. 하다 보면 이것도 3개월이 걸려요.
자막> 탕건 노래
이년 이년 이년의 탕건 한코 두코나 몾아나지라 요 탕건 몾아근 장보아그네 우리 집의 온 식구 밥먹구 살 탕건
자막> 故 김공춘 19419년생/중요무형문화재 제67호 탕건장
NAR> 바다에 나가지 않은 아낙네들이 모여 탕건을 만드는 탕건청이나 일청이 있었는데요. 제주도에서 태어난 여자아이는 10살만 돼도 어머니 무릎에 앉아 탕건을 짰을 정도라고 해요.
임혁필) 제가 한 번 써봐도 될까요?
자막>….
김혜정)…. 그렇게 하세요. 멀리에서 오셨는데 씌워드려야죠.
자막> 멀리에서 오셨는데 씌워드려야죠~
임혁필) 이게 원래는 쓰면 안 되는 건가 봐요.
김혜정) 제가 남에게는 씌워보지 못했어요.
임혁필) 아 네. 머리에 잘 맞아 될 텐데 걱정입니다. 아이고 내가 머리가 너무 큰 것 같습니다. 어떤가요? 괜찮나요?
김혜정) 이건 정자관이에요.
임혁필) 우와. 탕건하고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예술적 작품이네요.
자막> 정자관
NAR> 정자관은 탕건 위에 덧쓰는 실내용 모자입니다.
남자 MC) 이게 사극에서나 본 모자네요.
여자 MC) 맞아요.
남자 MC)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에요.
여자 MC) 그러게요.
임혁필) 이거 한 번 써봐도 됩니까? 어~ 이렇게 딱 쓰고 이리 오너라~
자막> 이리 오너라~
임혁필) 좀 양반 같습니까?
김혜정) 그렇지요.
임혁필) 그렇다면 층이 세 개나 있으니까 영의정이나 그런 분들이 쓰시는 겁니까?
김혜정) 그렇죠. 평민들은 못 썼어요.
자막> 정자가 3층이면 고관급 양반이 사용
임혁필) 영의장, 좌의정 뭐 이런 분들?
김혜정) 예.
임혁필) 오. 이리 오너라~
자막> 이리 오너라~
NAR> 쓰임새가 많아 그 가치가 더 특별했던 제주마. 이제는 제주가 아니면 쉽게 볼 수 없는 풍경이 되었는데요. 그래서 오늘도 그림으로 남겨보았습니다.
자막> 제작지원
NAR> 점점 사라져가고 있지만 그래서 더 잘 보존해야 할 우리 문화재. 앞으로 쭉 지켜나가겠습니다.
자막> 구성 강문진
자료조사 권유니
자료제공 문화유산채널
촬영 조영진
연출 허성무
뉴데이픽쳐스
남자 MC) 네 잘 봤습니다. 이게 제가 또 얼굴이 길어서 말한테 그렇게 정이 가요. 아니 저 제주말 타고 아까 앞서 말씀해주셨던 대이작도 풀등 달리면 뭐 금상첨화겠네요.
여자 MC) 그러게요. 그리고 또 마지막에 나왔던 그 탕건이 정말 인상적이었는데 와 정말 여성들의 눈물과 땀으로 이루어진 작품이었어요.
남자 MC) 감탄했습니다. 진짜
자막> 임혁필
인물> 임혁필
임혁필) 요즘에는 제주마가 줄어가지고요 말총 구하기가 어렵다고 해요. 그리고 저 탕건을 하나 만드는 데도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많이 못 만든다고 합니다. 그래서 탕건과 제주마, 여러분들 오래오래 보려면요.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필요합니다.
남자 MC) 개체 수가 줄어든다고 하니까 아쉽네요. 잘 오래오래 보존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약력

  • 1919년제주도 화북 출생
  • 1975년제3회 육영수여사배 전국공예품 경진대회 입상
  • 1980년제5회 전승공예전 입선
  • 1980년국가무형유산 탕건장 기능보유자 인정
  • 1981년~1992년제6회 전승고예전(한국민속박물관)~제12회 전승공예전 출품
  • 1982년한미수교 100주년 기념 행사 감사패
  • 1985년,2000년국가무형유산 기록영화 제작
  • 2009년국가무형유산 탕건장 명예보유자 인정
  • 2020년별세
  • 글 이치헌 / (국가유산진흥원 전승지원실장 / 「인간, 문화재 무송 박병천」 저자)

  • 사진 서헌강(문화재전문 사진작가)

갤러리

정자관.jpg

정자관

정자관과 탕건.jpg

정자관과 탕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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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건 제작과정(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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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건 제작과정(2)

작업 중인 선생의 모습(1).jpg

작업 중인 선생의 모습(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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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 중인 선생의 모습(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