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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이야기

화각장 이재만
발행일 : 2021-01-27 조회수 : 5493
화각장 이재만

1953. 1. 17. ~ | 보유자 인정: 1996년 12월 31일

위대한 문화유산
한국문화재재단의 무형문화재이야기
화각장 이재만

국가무형문화재 화각장
Master Artisan of Ox-horn Inlaying Holder

얼마나 아팠겠느냐? 얼마나 괴로웠겠느냐?

그 정갈하던 서체가 이토록 흐트러지다니...형선아! (예, 전하.)

부제조 상궁에게 일러 화각함을 찾아오라 이르거라. (예?)

기억이 나질 않는다. 연우의 서체가...기억이 나질 않아...

보아야겠다. 내게 주었던 그 서찰을... 다시 한 번 보아야겠다.

- 드라마 <해를 품은 달> 10회 훤의 대사 중

쇠뿔에 혼을 그려 넣는 화각장

화각(華角)공예는 쇠뿔을 얇게 종잇장처럼 얇게 갈아 투명하게 만든 뒷면에 색채로 그림을 그려 비쳐 보이게 한 후 목재로 된 기물의 표면에 접착제로 붙여 치장하는 것을 말하며, 이러한 기능을 가진 장인(匠人)을 화각장(華角匠)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기술은 원래 중국의 당나라 시대부터 있었던 대모복채(玳瑁伏彩) 장식 기술에서 기인한다. 대모(열대, 아열대 지역에 분포한 거북이의 일종)의 등딱지를 얇게 갈아서 그림을 복채하여 목공예품의 표면에 붙여 치장하는 당대의 기술이 당과 교역이 많던 통일신라로 이입되었고,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이어진 기술이다. 그러나 국내에는 이를 증명할 솩실한 유물도 문헌의 기록도 없다. 다만 일본의 고대 보물 창고인 쇼소인(正倉院)에 소장되어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대모복채칼집과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나전칠기에 자개무늬와 더불어 사용된 대모전(玳瑁鈿)에서 그 기술의 맥락을 살펴볼 수 있다.

이러한 대모전 사용기법도 고려시대 중기 이전에는 성행했으나 수입품인 대모의 수급이 원활하지 못한 이유와 더불어 대모는 빗과 장신구 등의 제작 재료로서 뿐만 아니라 한방의 중요한 약재로도 사용되어 그 사용처가 점점 더 많아져 귀해졌기 때문에 점차 쇠퇴하게 된다. 이후 대모가 쇠뿔(牛角)로 대체되어 18세기 경 조선시대에 화각 공예가 성행하게 된다. 다만, 쇠뿔로 만든 화각공예품의 경우 부패되어 18세기 이전의 것으로 판단되는 유물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은 까닭에 쇠뿔을 이용한 화각공예의 출발은 18세기 이전으로 보여 진다. 이러한 기술이 지금까지 전승될 수 있었던 것은 한말(고종시대)부터 3대째 각질장(角質匠) 겸 대모공장(玳瑁工匠)이었던 음일천 선생이 1920년대 초부터 화각장 공예 기술에 대한 조사 연구와 수련을 거쳐 화각공예품 제작에 전념하여 1970년대 초까지 꾸준히 활동해 왔기 때문이며, 선생에게서 기술을 전수받은 이재만 선생이 국가 지정 국가무형문화재 화각장 기능보유자로 인정됨으로써 지금까지 그 기술 전승이 이루어지고 있다.

화각공예의 맥을 잇는 유일한 국가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 이재만 선생

화각장 기능보유자인 이재만 선생은 대목장(大木匠)이었던 아버지 이금달 선생(조부는 단청장이었다고 한다.)과 자수 솜씨가 뛰어났던 어머니 정경희 여사의 슬하에 4남 1녀의 막내로 1953년에 태어나 서울 성수동에서 성장하였다. 이재만 선생은 한 살이 조금 지났을 무렵 넘어지면서 두 손으로 화롯불을 잘못 짚어 큰 화상을 입은후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여 열 손가락 가운데 온전한 손가락이 몇 남지 않았으며 상당수의 손가락이 긑마디 또는 둘째마다까지 손실되었다. 그럼에도 그림 솜씨가 뒤어나 초등학교 시절에 전국미술실기대회에서 수차례 입상한 경험이 있다.

만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란 선생은 만 열여섯 살 때 우연한 기회에 친구의 소개로 음일천 선생의 공방에 들렸다가 음일천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게 된다. 어린 나이에 주경야독의 생활은 대단히 힘겨웠다. 초기 1년 반 동안은 당시 인기 만화가 이상호 선생의 조수로 발탁되어 만화를 그리는 생활을 즐기며 극장 간판을 그리는 부업도 가끔 갖는 등 화각 기술의 전수활동에 한때 게을리 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외도를 하다 보니 화각 공예에 대한 가치 인식이 오히려 높아졌고 장래 직업을 생각하면서부터 음일천 선생의 지시대로 충실하게 기술 연마에 정진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하일동 공방의 갑작스런 화재와 더불어 스승에게 수족 마비 증세가 생겨 급기야는 공방을 폐쇄하게 되었고 이후 이재만 선생은 독립하여 작업을 하게 되었다. 1960년대 말 경 화각장 공예에 대한 이론적 연구를 위해 음일천 선생의 공방을 자주 드나들던 정명호 교수(당시 원광대학교 강사)의 청탁으로 이재만 선생은 1971년경부터 정명호 교수의 자택에서 각종의 화각 공예품을 제작해 주었고, 1984년에는 당시 삼성동의 무형문화재전수회관(현 국가무형문화재전수교육관의 전신)의 화각 공방 관리 책임자로 있으면서 작업을 전담해 주며 자신의 작품도 만들었다고 한다. 이후 꾸준한 작품활동으로 전승공예대전 등 다양한 공예전에서 입상을 하였으며, 한국문화재재단에서 운영하는 한국전통공예건축학교(당시 경복궁 내에 위치한 한국전통공예미술관의 부설 교육기관)에서 화각 공예기술을 강의하는 등 전수 교육활동에도 힘썼다.

1996년 국가무형문화재 화각장 기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이재만 선생은 많은 품목의 문화상품 개발에도 적극적이다. 화각 공에품의 생활화에 큰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다. 공예 품목의 다양화는 공예품의 생활화로 이어지며 과거의 전통공예품들이 실용품이었던 것을 생각한다면, 공예의 생활화를 위한 다양한 용도의 품목 개발은 공예인다운 정신의 발로라 하겠다.

작품

화각 구절판 34×10cm

아홉 칸으로 나뉜 목기를 말하는 것으로 아홉 가지 (음식)재료를 담았다 하여 구절판(九折坂) 이라고 한다. 십장생 문양으로 장수하는 의미를 함께 담았다.

화각 구절판 34×10cm
화각사주함 59x33x34cm
화각사주함 59x33x34cm _ 01
화각사주함 59x33x34cm _ 02
화각서류함 36.5x28.5x12cm
화각서류함 36.5x28.5x12cm _ 01
화각서류함 36.5x28.5x12cm _ 02
화각좌경 26x34x23cm
화각좌경 26x34x23cm_01
화각좌경 26x34x23cm_02
화각좌경 26x34x23cm_03

제작과정 및 제작도구

화각 공예는 크게 네 가지 공정으로 이루어지는데, 쇠뿔과 뼈를 가공하는 골각(骨角)작업공정과 목재로 만드는 기물 바탕, 즉 백골을 만들기 위한 목공 작업 공정, 각지에 무늬(그림)를 그려 넣고 백골 표면에 그것을 붙이며 각지가 붙지 않는 여백 부분(기물의 밑바닥 또는 내부 등)에 옻칠을 하는 채화 및 옻칠 작업공정과 경첩·들쇠 등 금속 장식을 만들기 위한 장석 제작 공정으로 이루어진다.

주된 재료는 종잇장처럼 얇고 투명한 각지(角紙)를 만들기 위한 재료인 쇠뿔과 각지를 이어 붙인 경계선 부분에 박는 계선재인 쇠뼈, 이들을 기물의 본 바탕인 백골에 부착하기 위한 접착제인 부레풀, 무늬의 채색을 위한 채료(彩料), 각지를 붙이지 않는 백골 부분에 칠하는 도장재인 옻, 그리고 각지와 옻칠된 표면에 윤을 내는 광택제로 나뉜다.

이외에 제작도구로는 뿔과 뼈를 자르거나 켜는데 사용하는 틀톱, 실톱, 계선톱, 과기와 갈기칼, 조각도, 가위, 평줄과 벌줄 및 금환, 인두와 다리미, 압착기와 누름쇠판 및 누름쇠, 황새집게, 뿔방망이틀, 풍로와 석쇠 및 풍구, 작두, 기타 제도 용구 등이 사용된다.

1. 반투명징에 그려놓은 연필 무뉘그림에먹선을 넣는 모습

1. 반투명징에 그려놓은 연필 무뉘그림에먹선을 넣는 모습

2. 완성된 먹선화(밑그림)를 뒤집어 놓은 상태

2. 완성된 먹선화(밑그림)를 뒤집어 놓은 상태

3. 채색 작업 모습

3. 채색 작업 모습

4. 화각 공예의 재료인 쇠뿔과 작업중인 이재만 선생

4. 화각 공예의 재료인 쇠뿔과 작업중인 이재만 선생

쇠뿔로 창조하는 예술, 화각장



프로그램 동영상 소스코드 정보
대본보기 화각은 쇠뿔을 얇게 갈아 투명하게 만든 판을 말하며, 이것을 이용해서 공예품을 만드는 사람을 화각장이라 한다. 화각공예는 재료가 귀하고 공정이 까다로와서 생산이 많지 않았으므로 특수 귀족층들의 기호품이나 애장품에 주로 이용되었다.
화각공예가 언제부터 만들어졌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고려시대 나전칠기인 경함과 염주합에는 복채기법으로 된 대모가 나전과 같이 사용되었고, 이러한 기법은 조선 전기와 중기의 나전에까지 이어졌으나 조선 중기 이후부터는 화각으로만 장식한 화각공예품이 발달하였다.
화각공예는 투명도가 높은 쇠뿔을 종잇장처럼 얇게 편 다음 뒷면에 오색찬란한 단청안료로 갖가지 문양을 그리고 채색하여, 나무 등으로 만든 각종 기물인 백골 위에 붙이고 백골의 내부와 뼈대 등 화각 이외의 여백은 옻칠을 하여 마감하는 기법이다. 화각공예품으로는 장·농·사방탁자·문갑과 같은 가구류와 작은 예물함, 경대, 필통, 화약통, 바느질자, 경상, 연상, 반짇고리, 부채, 붓대 등이 있다.
화각공예는 색채 및 문양에서 장식성이 뛰어난 실용공예로서 우리나라의 전통공예, 특히 목공예 가운데에서도 매우 특색이 있다.

약력

  • 1953년출생
  • 1974년제8회 동아공예대전 입선
  • 1979년원석화각공방 개설, 세계공예협의회 인도전시회 출품
  • 1983년산림박물관 개관 기념전 초대출품
  • 1986년
    • 제11회 전승공예대전 보석함 입선
    • - 12회·13회·16회·17회 입선, 14회·19회 장려상, 18회 문화체육부장관상, 21회 문화재관리국장상
  • 1990년한국문화재보호재단 한국전통공예건축학교 화각반 강사
  • 1993년일본 다카시마야 한국전통공예대전 출품
  • 1995년인천광역시공예인협회 창립 초대 회장
  • 1996년국가무형문화재 화각장 기능보유자 인정
  • 1997년IPU 서울총회 기념전 출품
  • 1998년국가무형문화재전수교육관 화각공방 운영
  • 2001년중국 공예전시관 <한국전통공예특별전> 출품
  • 2002년일본 교토 전통공예전시<한국전통문화의 향기>전 출품
  • 글 이치헌 / 한국문화재재단

  • 사진 서헌강(문화재전문 사진작가)

갤러리

채색 작업 모습.jpg

채색 작업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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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각사주함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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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각사주함_50x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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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각예물함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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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각예물함_50x29x28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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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각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