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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이야기

윤도장 김종대
발행일 : 2021-01-27 조회수 : 107
윤도장 김종대

1934. 2. 1 ~ | 보유자 인정: 1996년 12월 31일

위대한 문화유산
한국문화재재단의 무형문화재이야기
윤도장 김종대

국가무형문화재 제110호 윤도장
Master Artisan of a Yundo(Geomantic Compass)-Making

아인슈타인은 노년에

'나의 부고'라는 짤막한 글을 쓰면서

아버지가 나침반을 처음 보여주었던 때를 회상했다.

어느 쪽으로 돌려도 나침반 바늘이 항상 북쪽을 가리키는 모습이

어린 소년의 눈에는 무척 신기하게 보였다.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적었다. "나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때 그 경험은 내게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사물의 이면에는

반드시 깊숙이 감춰진 무언가가 있다."

- 조지 존슨의<세상의 비밀을 밝힌 위대한 실험>중에서

우주의 질서를 새겨놓은 나침반

지남반(指南盤) · 지남철(指南鐵) 혹은 패철(佩鐵) 등으로 불리는 윤도(輪圖)는 지남성(指南性)이 있는 바늘, 즉 자침(磁針)을 활용하여 지관들이 음택과 양택 등 풍수지리를 보거나 여행자들이 방향을 보기 위해 사용하던 일종의 나침반을 말한다. 지남침의 원리는 중구 한 대(漢代)에 이미 실용화되어 점을 치는데 사용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부터 윤도가 쓰였는지 확실하지 않다. 다만, 삼국시대에 윤도를 구성하는데 중요한 천문학이 발달했던 것으로 보아 윤도가 제작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삼국시대 신라의 박사(博士)제도 중에 천문 박사가 있었고, 백제에서는 천문학을 담당하던 일관부(日官部)를 두었다. 고구려의 고분벽화의 사신도(四神圖)를 보아도 당시에 음양오행사상이 널리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중국의 역법(曆法)과 주역(周易)이 수입되어 신라에서는 박사와 조교를 두고 「주역」을 가르쳤다. 이렇게 주역과 천문학이 활발히 연구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 시기에 이미 윤도가 쓰이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후 통일 신라 말에 승려 도선(道詵)에 의해 풍수도참 사상이 발달하면서, 윤도는 지상(地相)을 보는데 중요한 기구가 되었고 이는 고려시대까지 널리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가 되면 이전 기록에서는 찾아 볼 수 없었던 ‘윤도(輪圖)’라는 명칭이 실록에 보인다. 선조 33년(1600년)에는 명나라에서 온 지리에 밝은 이문통(李文通)이 나경(羅經)이라는 것을 보여 주었는데, 마치 우리나라의 윤도처럼 생겼다고 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이전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윤도가 쓰이고 있었고, 중국에서는 나경이라는 명칭으로 윤도와 같은 것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영조 7년(1731년)에 허원(許遠)이라는 사람이 새로 지남철을 만들었는데, 해의 그림자를 취하여 남북을 정하니 그 법이 아주 정밀했다. 또한 영조 18년(1742년)에는 관상감(觀象監)에서 중국에서 구해 온 천문도(天文圖)와 5층 윤도는 모두 천문·지리의 쓰임에 요긴한 것이므로 본떠 만들기를 청해 허락했다. 관상감에서 윤도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윤도에 별자리로 점을 치는 점성술의 요소와 계절의 변화를 나타내는 절후 등이 있는 것과 일치한다. 특히, 조선시대에 들어와 주목할 만한 사실은 풍수가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윤도가 다양한 용도로 널리 쓰이게 되었다는 점이다. 뱃사람이나 여행자들이 방향을 보는데 이용하기도 하고, 천문학자들이나 일반인들의 휴대용 해시계에 정확한 남북[子午]을 정하는데도 윤도가 필요했다. 그래서 거의 모든 휴대용 해시계에는 간단한 윤도를 함께 붙이는 것이 통례가 되었다. 사대부들은 부채의 끝에 작고 단순한 모양의 2·3층짜리 윤도를 만들어 매달고 다니기도 했다. 부채에 매단 선추(扇錘)는 12방위 또는 24방위만을 표시한 소형 지남침으로 가장 실용적인 멋을 가졌으며, 그 아름다운 조각과 더불어 조선의 독특한 휴대용 나침반으로 발달하였다.

이렇듯 윤도는 묘자리를 보는 지관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유용하게 쓰이던 생활 과학 도구였다. 그러나 해방이 된 후 서구의 문물의 영향으로 윤도와 관련된 학문들이 미신으로 격하되어 쇠락하면서 윤도 역시 잊혀지게 되었다. 지금은 몇몇 지관들과 가보(家寶)로 소장하기 위해 찾는 사람들에 의해 겨우 명맥을 유지해 가고 있다.

윤도의 구성과 원리

윤도의 구성과 원리 윤도는 중심에 자침을 두고 24방위를 기본으로 여러 개의 동심원에 쓰여진 방위(方位)들로 구성되어 있다. 거기에는 음양(陰陽)·오행(五行)·팔괘(八卦)·십간(十干)·십이지(十二支) 및 24절후(節侯)가 조합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다. 때문에 윤도는 고대 동양인들이 우주의 순리와 법칙을 이해하고, 그 나름대로 합리적인 사고로 체계화한 음양오해 사상을 표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모란만초문이층농(牧丹蔓草紋二層籠) _ 75×40×122cm _ 01

윤도장 김종대 선생

전북 고창군 성내면 산림리 낙산(洛山)마을에서 윤도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300여년전부터라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흥덕현(興德縣)에 속해 이곳에서 만든 윤도는 ‘흥덕 패철’이라고 불렸다. 방향이 정확하고 견고해 전통 나침반으로는 유일하게 지금까지 그 맥이 이어오고 있다. 김종대 선생의 집안 윤도장 일을 하게 된 것은, 그의 조부인 김권삼 선생이 마을에서 윤도일을 하고 있던 ‘한운장’이라고 알려진 한씨라는 분에게서 기능을 물려받으면서부터이다. 김권삼 선생은 네아들 중에 손재주가 있던 둘째 아들 김정의 선생에게 윤도장일을 물려 주었다. 손재주가 좋고 한학(漢學)에 밝았던 김정의 선생은 20세가 넘어 일을 시작해 65세로 작고할 때까지 일반 평철 이외에도 정교하고 사실적인 조각 기법이 필요한 선추와 면경철 등을 많이 제작하였다. 김정의 선생의 작업을 계승한 사람은 막내동생의 아들인 김종대 선생이었다. 아들이 있었으나, 아들에게는 소질이 없다고 판단하여 손재주 좋은 조카에게 일을 맡겼던 것이다.

김종대 선생은 1934년 전라북도 고창군 성내면 산림리 낙산마을에서 김영근 선생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형이 일찍 죽어 외아들로 자랐다. 백부의 윤도를 만드는 일을 골목을 사이에 두고 보면서 자란 김종대 선생은 어려서부터 손재주가 좋았다. 군대를 다녀온 후 백부로부터 윤도일을 물려받았다. 백부는 이익이 없더라도 가업으로 계승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때가 1963년 서른 하나 되던 해로, 윤도 만드는데 필요한 모든 작업 도구를 물려받았다. 대대로 전해오는 연장은 가져왔으나, 윤도 제작에 관한 자세한 훈련을 백부에게 받지 못했기 때문에 혼자 일을 시작할 수가 없었다. 백부는 조카를 도제로 삼아 정식으로 기술을 전수한 적이 없어, 어려서부터 보고들은 것과 말씀으로만 대략적인 설명르 들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백부의 일을 돕던 큰백부의 아들인 사촌형이 계속 윤도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촌형이 연장을 가져다가 윤도를 만들었다. 대신 김종대 선생은 12년간 농협에 다니면서 틈틈이 사촌형에게서 일을 배웠다. 그후 농협으 그만두고 2년쯤 사촌형과 일을 같이 하면서 윤도 만드는 세세한 과정까지 익혔다. 사촌형은 둘째 백부가 일을 할 때부터 일을 익혀 백부를 도왔으나, 나이가 많아 일을 물려받지는 못했다. 김종대 선생은 일을 시작하면서 윤도에 필요하다고 하여 서당에 다니면서 한자를 익히고 모르는 것은 사촌형에게 물어 배웠다. 그리하여 마흔이 넘어서야 혼자 재료 준비에서 완성까지를 자신있게 해 낼 수 있게 되었다.

김종대 선생은 평생 낙산마을을 떠난 적이 없다. 외아들이라 부모님을 모셔야 했고, 윤도는 낙산마을에서 만들어야 한다는 묵시적인 약속 때문에 12년간 다니던 농협도 그만 두면서 윤도일을 지키고 있다. 정교한 손끝을 가진 ‘전통 나침반’의 명인 김종대 선생은 윤도를 만들어 큰돈을 벌어야 겠다든가 하는 욕심이 없다. 그저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가업이기에 묵묵히 조부·백부의 뒤를 이어 3대째 윤도 제작의 기법을 이어 그 명맥을 유지하는데 노력할 뿐이다. 현재 큰아들인 김희수 선생이 전수교육조교로 인정되어 윤도장 제작 기술을 이어오고 있다.

작품

윤도평철(십장생조각) 26×26×8cm, 면경철 5×6×2cm, 선추 5×5×2cm
모란만초문이층농(牧丹蔓草紋二層籠) _ 75×40×122cm _ 01
모란만초문이층농(牧丹蔓草紋二層籠) _ 75×40×122cm _ 02

제작과정

윤도의 재료로는 대추나무나 회양목·은행나무를 쓰는데, 이 나무들은 눈매가 곱고 단단하여 정교한 조각이 가능한 것들이다. 박달나무를 재료로 사용하기도 하는데 김종대 선생은 무르고 가볍기 때문에 박달나무를 잘 사용하지 않고 대추나무를 주로 사용한다. 대추나무는 재질이 단단하고 말려 놓으면 잘 트지 않을 뿐 아니라 비단결같이 윤기가 나면서 오래 갖고 다닐수록 색이 더욱 빨갛고 곱게 나기 때문이다.

윤도의 제작과정은 나무를 잘라 모양을 만들고 다듬어 놓은 원통형 나무의 중심을 잡는다. 한번 잡아 놓은 중심점은 윤도가 완성될 때까지 기준점이 되며, 나중에 자침을 받쳐줄 받침대를 세울 곳이기도 하다. 이후 층수를 정하여 그린다. 층수를 정할 때 각 동심원 사이의 간격은 각자(刻字)할 글자수를 고려해 가장 안쪽 자침이 들어가는 원의 크기가 전체적으로 균형을 이루도록 조절한다. 이후 분금을 하게 되는데 정확한 분금은 윤도의 생명이기 때문에 윤도를 만드는 작업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과정이다. 분금작업이 끝나면 글자를 새기는 각자하기를 한다. 글자를 새기는 작업은 까다롭고 지루한 일이다. 한 층을 각자하는데 보통 한나절이 걸리고, 글자 수가 많은 층은 꼬박 하루가 걸린다.

수일에 걸쳐 각자가 끝나면 먹·옥돌가루·주사 등으로 분금과 글자를 선명하게 색을 입힌다. 그런 다음 자침을 만드는데 자침의 재료는 큰 쇠바늘이 주로 쓰이고, 최근에 와서는 쇠로 된 우산살을 이용하기도 한다. 자침을 만들어 침의 균형이 잘 맞으면 다음에는 색을 내야 한다. 색내기가 끝나면 여기에 자력을 입혀야 한다. 침을 자연 자석에 15분~30분 붙여 놓으면 자성(磁性)이 생겨 지오(指午)를 하게 된다. 이렇게 침이 자석에서 자력을 얻어 남북을 가리키게 되면 비로소 자침(磁針)이 되는 것이다. 자연 자석에도 남북의 구분이 있기 때문에 침을 자석에 붙일 때 잘 맞추어야 한다. 뚜껑 표면을 마무리한 후 자오 맞추기를 하게 된다.

낙산마을 뒷산에는 거북바위가 동서 방향으로 누워있다. 이 거북바위 등에는 몇 개의 작은 구명이 등을 따라 일직선으로 파져 있다. 완성된 윤도의 자침을 자오(子午 : 남북)에 맞추어 놓고, 실을 거북 바위 등의 동서방향으로 맞추면 자침과 실이 직각을 이루게 된다. 그러면 윤도의 정확성이 확인되는 것이다.

1. 걸음쇠간격을 조절하여 분금한다

1. 걸음쇠간격을 조절하여 분금한다

2. 자연자석에 붙여서 자력을 입힌다

2. 자연자석에 붙여서 자력을 입힌다

3. 자침을 올려놓고 균형을 맞춘다

3. 자침을 올려놓고 균형을 맞춘다

약력

  • 1934년 전북 고창군 성내면 출생
  • 1963년 전국공예품경진대회 금상
  • 1979년 독립공방 운영
  • 1996년 국가무형문화재 제110호 윤도장 기능보유자 인정
  • 2003년 국가무형문화재 윤도장 작품 공개 및 전시
  • 1996년~현재 국가무형문화재보유자작품전 출품
  • 글 이치헌 / 한국문화재재단

  • 사진 서헌강(문화재전문 사진작가)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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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도(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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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도평철(십장생조각), 거북이, 면경철, 선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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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도평철(용조각), 거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