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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 세종의 생애와 업적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8-04-17 조회수 : 9147
세종의 생아와 업적


세종 생애 54년,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 
세종의 생애는 크게 둘로 나눠 볼 수 있다. 스물두 살의 중 반부, 즉 1418년 8월 즉위 이전의 왕자 시절과 그 이후 국 왕 시절이 그것이다. 이 시기는 시간상으로 비록 연속돼 있 지만, 왕위에 올랐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그를 바라보는 세 상의 시선과 그 자신이 겪게 된 경험을 전혀 새롭게 만들었 다. 따라서 세종 생애 54년을 볼 때 ‘변화한 것’과 ‘변화되지 않은 것’이라는 두 가지 관점으로 나누어 살펴볼 필요가 있 다. 먼저 변하지 않은 것이다. 사람들이 국왕 세종에게 기대 했던 것, 그리고 세종 자신이 생각한 시대적 사명은 변함없 이 계속됐다. 그는 할아버지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지 6 년째 되는 1397년에 태어났다.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새 로운 나라를 세운 건국의 주역들은 권력의 중심이 어디여 야 하느냐에 대해서는 서로 의견이 달랐지만, 그들이 생각 하는 시대과제는 같았다. 

그것은 바로 당시 사람들의 표현을 따르면 “수성(守成) 의 단계”로의 진입이었다(세종실록 8년 1월 26일, 15년 11 월 19일).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을 수는 있지만 천하를 다스 릴 수 없다’는 말처럼, 창업의 단계에서 수성의 시대로 전환 하지 않으면, 신생 조선왕조가 오래갈 수 없다는 것을 그들 은 잘 알고 있었다. 수성 군주가 해결해야 할 첫 과제는 민 생과 국가재정의 확충이었다. 고려 말 외침(外侵)과 내우 (內憂) 속에서 국가 창고가 텅 빈 상태에서 민심이 어디로 기우는지를 직접 목격한 조선의 건국자들이었다. 그들은 백 성들의 먹거리 해결과 재정 확충 없는 국가 안정은 불가능 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었다. 세종에게 기대한 둘째 시대 적 과제는 국제관계의 안정화를 통한 전쟁의 방지였다. 건 국 초기 ‘표전문 사태’ 등 일련의 외교 갈등으로 어려움을 겪은 건국자들은 신흥 패권국 명나라와의 동맹관계를 굳건 히 하는 것과, 이를 지렛대 삼아 여진족과 일본을 견제하거 나 포용해 평화체제를 구축해야 하는 국가적 과제를 안고 있었다. 수성 군주의 셋째 과제는 국가체제의 정비였다. 국 가가 지속가능하려면 무엇보다 우수한 인재들이 제자리에 서 보람을 느끼며 일할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이들 세 가지 조선 초기의 국내외 상황이 (양녕이 아닌) 충녕으로 세자를 교체하게 했으며, ‘변하지 않는’ 국 정과제를 훌륭히 해낸 사람이 바로 세종 이도였다. 그런데 세종이 왕위에 오른 후에도 변화되지 않은 것이 있었다. 그 것은 왕이 되기 전과 즉위 초반(상왕 통치기)까지 큰 결정 을 내리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었다. 경복궁 서편의 인왕 산 자락에서 태어나 스승을 만나고, 결혼을 하고, 세자로 간택되는 것까지 모든 것은 아버지 이방원이 결정했다. 물론 그 가 스물두 살이 되는 1418년 6월에 아버지와 큰형 양녕의 갈 등이 고조되더니 급기야 큰형이 세자 자리에서 쫓겨나고, 우 여곡절 끝에 자신이 그 자리에 앉게 되면서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세자 충녕은 이때부터 차기 국왕 교육을 받기 위해 서연관이라는 ‘국왕인수위’의 도움을 받았다. 의용위라는 경 호부대의 호위도 뒤따랐다. 결정적으로 ‘조계(朝啓)’라고 불 리는 정식 어전회의에 참석해 본격적인 정치수업을 받게 된 것도 이 시기였다(태종실록 18년 6월 21일). 

이러한 ‘제2인자’ 생활은 그때까지의 삶과는 상당히 다 른 것이었지만, 여전히 부왕의 울타리 안에 머물러 있었다는 점에서는 비슷했다. 부왕의 보호 상태는 왕위에 오른 1418년 8월 이후로도 지속됐다. 부왕 태종이 내린 결정을 그는 받아 들이면 됐다. 


현명한 결정 내리는 군주, 세종 
세종 나이 26세가 되던 1422년(세종 4년) 5월이 되면서 비로 소 큰 변화가 생겼다. 부왕 태종이 사망하면서 세종 자신이 모든 결정을 내려야 했다. 이제 더 이상 누구에게 어려운 결 정을 맡길 수 없는 상황이 됐다. 태종의 사망 이후 세종이 부 닥친 첫 위기는 강원도 대기근이었다. 그 지역의 흉년으로 인 구의 27%가 흩어져 사라졌고, 약 58%의 농토가 황폐화된 위 기상황에서 그는 여러 가지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작게는 어전회의 안건 중에서 무엇을 먼저 다룰 것인가 로부터 해서 – 세종은 “매일 일을 아뢸 적에 흉년에 관한 정 사를 첫째로 삼으라”라고 지시했다(세종실록 4년 12월 4일). – 관할 구역 밖의 사람들이 찾아와도 구휼 식량을 나눠 줄 것인가 말 것인가 – 세종은 배분하는 관료가 아닌 백성의 입장에서 “나눠 주라”로 결정했다(세종실록 5년 1월 10일). – 등 크고 작은 결정을 슬기롭게 내렸다. 그 결과 “고향을 떠 나 떠도는 백성들이 많았으나, 굶주려 죽은 사람은 적었다”는 실록 기사처럼, 청년 군주 세종은 경제위기를 성공적으로 극 복했고, 이는 신민들로부터 신뢰를 얻는 첫 경험이 됐다(세 종실록 4년 윤12월 28일). 이후로도 세종의 판단과 결정이 적실하고 성과를 거둔 일이 많아졌다. 명나라에서 소 1만 마 리를 요청했을 때 따를 것인가 말 것인가(재위 13년), 북방영 토개척을 강행할 것인가(재위 14년), 그리고 공법이라는 세 제개혁을 지속할 것인가 말 것인가(재위 18년) 등의 고비에 서, 그는 널리 묻고[廣問(광문)] 숙고한 다음[徐思(서사)] 결 정했고, 내린 결정에 대해서는 정밀한 대안을 마련해서[精究 (정구)] 일관되게 추진하는[專治(전치)] 방식으로 국정을 이끌어 갔다. 그가 이처럼 슬기로운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배 경에는 집현전이라는 뛰어난 싱크탱크가 있었다. 집현전은 어떤 결정을 내리기 전에 과거의 유사한 사례를 심도 깊게 연구한 다음 국왕에게 최적의 대안을 제시했다. 거짓된 정보 와 잘못된 지식을 걸러내는 것도 집현전 학사의 몫이었다. 그 렇게 해서 올라온 정책 과제는 경연(經筵)이라는 창의적 어 전회의에서 다각적으로 검토됐다.





세종 리더십의 비결, 강거목장(綱擧目張) 
세종이 재위 32년 만에 사망했을 때 신하들은 그를 ‘해동요 순(海東堯舜)’이라고 불렀다. 전설적인 중국의 요순 임금처 럼 태평시대를 만든 뛰어난 군주였다는 평가다.  

신하들은 그 비결로 인재경영과 지식경영 두 가지를 꼽 았는데, 이중에서 후자인 지식경영이 셋째 시대과제인 국가 시스템 정비와 관련해 주목된다. 신하들은 그가 “나랏일을 할 때 반드시 옛 일을 스승 삼았고[事必師古(사필사고)]”, 그렇 게 축적된 성공과 실패 사례를 토대로 “제도를 밝게 구비했 다[制度明備(제도명비)]”고 평가했다(세종실록 32년 2월 22 일). 한마디로 그가 왕위에 오를 때 요청됐던 시대 과제인 ‘민 생’과 ‘평화’와 ‘체제정비’가 모두 달성됐다는 얘기였다. 

흥미롭게도 신하들은 세종의 일하는 방법과 관련해서 “강거목장(綱擧目張)”이라는 표현을 썼다(세종실록 32년 2월 22일). “그물의 벼리를 드니, 그물눈들이 일제히 펴졌다”는 이 말은 그가 일머리에서 핵심(key link) 부분을 잘 파악해서 당 기는 지도자였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세종은 태종이 뽑고 양 성한 인재들로 하여금 능력에 적합한 자리에 배치해 신명나 게 일하게 했다. 그래서 “국왕이 몇 달 동안 궁궐을 비워도 나 랏일이 적체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세종실록 20년 5월 27 일). 수성의 사명을 완벽히 해낸 것이다. 고대 로마공화정을 연구한 시오노 나나미는 “가도(街道)를 발명한 것은 로마인 이 아니지만 가도를 그물처럼 얽힌 도로망으로 구성하면 그 기능이 더욱 높아진다는 것을 생각하고 실행한 것은 로마인 이다”라고 말했다. 이 말을 조선 초기의 상황에 비춰 보면 이 렇게 바꿔 표현할 수 있겠다. ‘뛰어난 인재를 가려 뽑고 기른 것은 태종이었다. 하지만 그 인재를 적소에 배치하고 비전을 공유해 움직이게 만든 것은 세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