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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 세종대의 국가 의례공간 정비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8-04-17 조회수 : 2062
세종대의 국가 의례공간 정비


조선의 법궁 경복궁, 완전한 의례 공간으로 재정립 
경복궁(景福宮)은 조선조의 법궁으로 창건됐으나 정종의 개경 환도와 태종의 창덕궁 건설로 인해 오랫동안 비어 있 었다. 특히 1412년에는 경회루(慶會樓)가 건립돼 경복궁 배치에 큰 변화가 있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경복궁이 재 정비되는 것은 세종대의 일이었다. 경복궁 근정전(勤政殿) 에서 즉위한 세종은 재위 7년부터 본격적으로 경복궁에 임어했으며, 이 시기의 경복궁 내에는 여러 건의 건축공사 가 진행됐다. 영추문(迎秋門) 건춘문(建春門) 광화문(光化 門) 융문루(隆文樓) 융무루(隆武樓) 등의 여러 성곽문, 사 정전(思政殿) 경회루(慶會樓) 강녕전(康寧殿) 등 중심부 의 여러 전각에 대한 개수 작업을 비롯해 동궁(東宮) 내루 (內樓) 문소전(文昭殿) 북문(北門) 흠경각(欽敬閣) 교태 전(交泰殿) 계조당(繼照堂) 함원전(咸元殿) 자미당(紫薇 堂) 종회당(宗會堂) 송백당(松栢堂) 인지당(麟趾堂) 청연 루(淸燕樓) 등의 건립은 당시의 중요한 공사들이었다. 이 들 전각의 공사는 궁궐의 형태를 갖추는 일이었을 뿐만 아 니라 의례 정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세종대 의례공간 정비에서 주목되는 계기는 세종 9년 4월의 왕세자 혼례에 관계된 의례규정 정비였다. 여기에서는 내전과 동궁의 공 간이 주된 장소로 활용됐는데 당시의 동궁은 경복궁 밖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근정전·사정전·내전 등 궁궐 내 다른 전각들과 복합적인 관계 속에서 의례를 행하기에 는 어려움이 있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곧바로 4개월 후에 경복궁 내에 동궁을 영건하기 시작했다. 동궁 의 영건에 이어 진행된 사정전 확장공사 역시 사정전을 본 격적인 행례공간으로 사용하는 대표적 예법인 상참의(常 參儀)의 정비와 관련이 있다. 세종은 상참을 통해 매일 군 주와 신하의 관계를 확인하면서 하루의 시작을 삼고자 했 다. 상참은 조하·조참과 더불어 조선의 주요 조회의식 중 하나다. 그런데 상참을 행할 편전인 사정전의 공간이 그 리 넉넉하지 않아 사정전을 확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러 한 의례정비와 공간 확충의 관계는 혼례를 중심으로 정비 된 내전 의례와 강녕전의 개수를 비롯해 문소전과 계조당의 영건 등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됐다. 세종 14년의 문소전 영건에 따라 문소전이안례(文昭殿移安禮) 등의 의 례를 정리하게 됐고, 25년의 계조당 영건은 세자에게 모든 정사를 위임하고자 했던 세종의 의도에 따라 왕세자가 정 치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계조당 영건과 더불어 왕세자의 조참의(朝參儀) 조하의(朝賀儀) 인견의 주(引見儀註) 양로연의(養老宴儀) 등 예법의 항목이 정비 됐다. 이렇듯 경복궁은 세종의 국가의례 정비에 맞춰 완전 한 의례의 공간으로 재탄생하게 됐다. 이때 정비된 경복궁 의 체계는 이후 『국조오례의』의 등장에도 중요한 기반이 됐으며, 조선의 긴 역사 내내 법궁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보여주었다.


종묘의 별모 ‘영녕전’ 창건으로 왕조의 지속성 확대 
종묘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종묘는 역성혁명을 통해 왕 위를 차지한 태조 스스로 정통성을 부여하고자 하는 목 적을 갖고 있었다. 그렇기에 태조는 자신의 4대조를 군주 로 추존해 종묘에 모신 바 있다. 여기에는 중요한 논란거 리가 포함돼 있다. 동아시아의 종묘는 시조묘에 대해 특별 한 존숭의 의미를 부여하는데 개국군주인 태조를 시조묘 로 둘 것인지, 아니면 태조에 의해 처음 봉안된 목조를 시 조묘로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그것이다. 이 문제가 두 드러진 것이 바로 세종대의 일이다. 태조대에 마련된 종묘 정전에는 태조의 4대조인 목왕(穆王)부터 그 후대인 익왕 (翼王) 도왕(度王) 환왕(桓王)이 추존되어 봉안됐고 태종 11년에 들어 목조·익조·도조·환조로 존호를 가상했다. 이러한 방식은 고대 중국의 주나라 무왕대의 종묘 제도를 근간으로 하여 송나라의 제도를 크게 참고한 것이었다. 조 선의 종묘는 시조묘 1위와 4대의 조상 등 모두 5위의 신 위를 모시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태조 사후에는 목조부터 태조까지 모두 5위의 신위를 모시되, 누가 시조묘인지 굳 이 결정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다면, 세종 1년에 승하 한 공정대왕, 즉 정종을 종묘에 부묘할 시점이 됐을 때에 는 이 부분을 결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태조가 시조 묘라면 가장 대수가 오래된 목조에 대한 제사를 정지하면 될 것이고, 목조가 시조묘라면 시조묘를 제외하고 가장 오 래된 익조의 제사를 그만둘 상황이었다. 한편 제사를 중지 하는 신위를 어떻게 할 것인가도 문제였다. 허조(許稠) 등 이 제시한 방안은 목조를 시조묘로 삼고 익조의 신위를 없 애는 것, 별묘를 지어 태조의 4대조 신위는 점차로 별묘로 이안하는 것, 아니면 별묘를 만들지 않고 매안(埋安)해 더 이상 종묘에서 모시지 않는 것 등이었다. 결론적으로 이 논의는 태조를 시조묘로 삼음으로써 목조의 제사를 정지 하는 것으로 결정됐고, 별묘를 만들어 종묘의 정전과는 다 른 형태로 제사를 유지하는 것으로 정돈됐다. 

공정대왕의 부묘는 조선 종묘의 시조묘를 태조로 확 정짓는 계기가 됐다. 이에 따라 목조의 신위는 새로 조성 된 별묘 영녕전으로 이안되게 됐는데, 영녕전은 이후 익 조·도조·환조 신위 이안을 염두에 두고 4개의 신실로 구성됐다. 세종대에 있었던 종묘의 가장 큰 변모는 바로 영녕전의 영건이었다. 이때 만들어진 영녕전은 종묘의 별 묘로서 왕조의 지속과 함께 확장돼 왔다.





세종, 건축에 의식규범을 더하다 
세종대에 진행된 궁궐과 종묘의 건축적 정비는 특정한 의 식의 도입을 계기로, 혹은 의식 규범의 분명하지 않은 부 분을 정돈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즉 건축과 의식규범 이 서로 합치되도록 하는 작업으로 이해할 수 있다. 상참 의식의 도입과 사정전의 정비, 왕세자 혼례의 의식규범 정 의와 동궁의 궁궐 내 영건, 시조묘의 확정과 체천 후 처리 방식의 논의를 통한 영녕전의 건립 등은 단순히 화려한 건 축을 만들어 내고자 하는 작업이 아니라 의식에 합당한 공 간적 바탕의 마련이라는 동일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 

이 시기의 의례공간 정비가 완전한 것은 아니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영녕전이 사친묘인지 조묘인지의 엄밀한 정의가 없었던 채로 시간을 누적한 탓에 현종대에 들어 영 녕전의 정체성에 대한 논쟁이 촉발되기도 했다. 경복궁의 사정전은 창덕궁과 창경궁 등 여타의 궁궐 편전과 다른 유 형으로 구별됐다. 한편으로는 이때 완전한 의례공간으로 정비됐다고 하더라도 의식에 대한 입장이 바뀌거나 세부 가 변경되는 등 기준 자체가 바뀌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 만 조선시대 내내 때로는 의식을, 때로는 건축 공간을 정 비하면서 이 둘 사이의 간극을 조율해 나간 것은 세종대의 이러한 노력으로부터 비롯된 게 분명하다. 몇 가지의 단서 에도 불구하고 세종대에 정비돼 조선전기를 관통해 존재 했던 의례공간의 면모를 구체적으로 고찰하기에는 어려움 이 있다. 다만 후대의 기록 등 제한된 사료에 의해 그 대략 의 윤곽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문소전 영건은 세종 당 시의 유교 건축에 대한 이해 수준을 가늠하게 하는 중요한 지표가 된다. 묘라고 하는 건축은 죽은 자의 신위를 모시 는 공간이기 때문에 건축의 원칙성이 강조될 수 있는 가능 성을 가진다. 문소전에 관련된 의례들이 포함되는 길례(吉禮)는 역대 군주들이 가장 중요시하던 의례였으며, 또한 생활공간이 아니기 때문에 고제의 구현 외에 다른 건축적 관습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다는 점이 그것이다. 조선전 기 궁궐 내에 존재한 건축물들에 관한 비교적 상세한 그림 자료는 『국조오례의』 서례의 문소전도(文昭殿圖)가 유일 하기 때문에 다른 전각들에 대해 평면의 형상까지 유추할 방법은 없지만 문소전의 예로 보건대, 유교의 건축 제도에 대한 이해의 수준은 점차로 높아 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 고, 이러한 예학적 수준은 궁궐 건물의 영건과 개수에 어 느 정도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점을 전제한다면, 세종대에 이루어진 예학적 성과는 사정전·강녕전·동궁 등 당시에 건립되거나 개작 된 전각들에 반영됐을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창건 당시 경복궁의 공간으로는 세종대에 완비된 의례를 제대로 설 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세종대에 완비된 의례공간으로 서의 경복궁과 종묘의 건축은 큰 변화 없이 지속됐다. 이 는 의례공간으로서의 궁궐과 종묘의 건축이 세종대에 이 미 본격적인 궤도에 올라섰음을 방증하는 것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