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소식

월간문화재

[2018.10] 조선시대 궁궐의 밤문화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8-10-04 조회수 : 3633
img


밤에 공부하는 국왕, 야대(夜對)

조선의 국왕은 왕조를 통치하기 위한 자질을 함양해야 하였고, 이는 세자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이렇게 왕이 공부하는 것을 경연(經筵)이라고 하고, 세자가 공부하는 것은 서연(書筵)이라고 한다. 경연은 국왕의 집무실인 편전(便殿)에서 하였고, 3강(講)과 2대(對)로 나뉜다. 3강은 정식 경연으로 조강(朝講)·주강(晝講)·석강(夕講)이라고 하였다. 각각의 명칭은 공부하는 때를 알게 하지만, 그 시간은모두 낮이었다. 조강은 평명(平明), 곧 동이 틀 무렵에 하였으며, 주강은 낮 12시인 오정(五正)에 하였다. 석강은 미정(未正), 즉 1시부터 3시까지를 나타내는 미시의 가운데 시간, 바로 오후 2시에 하였다. 그렇지만 경연의 빈도나 시간은 왕대별로 달랐다. 영조의 경우 석강은 미정보다 더 늦은 신시(辛時 오후 3~5시)나 유시(酉時 오후 5~7시)에 하였다고 한다. 2대인 소대(召對)와 야대(夜對)는 약식 경연으로 양대(兩對)라고도 한다. 소대는 낮에 하는 것이며, 밤에는 야대를 한다. 곧 야대는 왕이 밤에 공부하는 경연이라할 수 있다.

   야대는 궁궐의 문을 닫은 뒤에 하는 소대로 대개 초경,곧 오후 7시에서 9시 사이에 하였으며, 가끔 이경(二更 저녁 9시부터 11시)에 시작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조선의 국왕은 최고의 통치자이지만, 이를 위해 끊임없이 공부해야하였고, 밤이 되어서도 야대를 통해 학문적 식견을 쌓아야하였다. 야대는 조선 초기부터 시행되어 왔다. 공부하기를좋아하였던 문종도 야대를 하였지만, 경연이 이렇듯 3경과2대로 확대된 것은 성종대였다. 14세에 즉위한 성종은 매우 열심히 경연에서 공부하였다. 성종이 즉위할 당시 하루2번 하던 경연에 석강을 추가하여 3강을 하였으며, 성종 2년부터는 야대를 시작하였다. 경연을 담당하는 관서는 홍문관이었다. 그런 만큼 야대에는 홍문관 관원 2명과 사관 2명, 승지가 함께 참석하였다. 성종대에는 홍문관 관원으로부제학까지 야대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국왕은 경연에서유교 경전과 역대 역사서, 성리학 서적들을 공부하였다. 주로 낮에 하는 3강에서는 경전과 성리서들을 공부하였던 데비해 야대에서는 『국조보감(國朝寶鑑)』 『정관정요(貞觀政要)』 『자치통감(資治通鑑)』 『고려사(高麗史)』 등의 역사서를 공부하였다.

   야대는 공식 업무가 끝나는 시간 이후에 치러졌던 만큼 그 분위기도 낮에 하던 3경과는 사뭇 달랐다. 다소 느슨하고 여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야대가 진행되었던 것이다.영조의 경우 밤잠이 적었기 때문에 야대를 즐겼으며, 종종역시 매우 늦은 시간까지 공부하였고 더러 밤을 새우는 경우도 있었다. 영조는 야대에서 강독이 끝난 후 술을 내려 함께 마시기도 하였는데, 영조가 시의 제목을 주고 시를 지어나누기도 하였다. 이토록 밤이라는 시간, 뒤에 따르는 일정이 없는 시간에 조선의 궁궐에서는 국왕이 야대를 하며 학문적으로도 성장하였으며, 영조처럼 신하들과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군신 간의 친화를 나누는 계기로 삼았던 것이다.




밤이 되어도 즐거운 잔치, 야진찬(夜進饌)

사람들이 만나고 즐거움을 함께 나누는 것은 인간사의 보편적 기쁨으로 왕실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조선시대에는국가와 왕실에 즐거운 의례들을 조선의 예전(禮典)인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가례(嘉禮)’ 조항으로 체계화하였다. 여기에는 다양한 잔치가 있었다. 잔치는 연향(宴響)·연례(宴禮)라고 불렀고, 왕실의 어른을 위해 잔치를올린다는 의미로 진연(進宴)·진찬(進饌)이라고 하였다.조선시대의 연향으로 왕은 신하들과, 왕비는 내외명부들과화합을 다지는 회례연이 있었다. 또한 대왕대비와 왕대비같은 왕실 어른의 생신을 축하한다든지, 국왕과 왕비에게존호를 올린다든지 할 때 잔치를 올렸고, 이를 진연이라고하였다. 잔치에는 왕실 가족들 외에도 신하들과 그 부인들이 참석하여 함께 축하하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이때 맛있는 음식과 함께 음악이나 무용 공연이 제공되었다.

   대개 궁궐에서의 잔치는 일과시간에 치러진 만큼 낮에열렸다. 잔치를 준비하기 전에 날짜를 정하는데 이를 택일(擇日)이라고 하며, 이때 시간도 함께 정한다. 잔치는 묘시(새벽 5시부터 7시까지)나 진시(오전 7시부터 9시)에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19세기 순조 대부터는 밤에도 잔치를 하였다. 낮에 잔치를 한 데 이어서 2경, 곧 저녁 7시부터 다시 잔치를 하였다. 이렇게 궁궐에서는 밤에도 즐거움을 나누는 잔치를 이어갔고, 이것을 야진연(夜進宴)·야진찬(夜進饌)이라 하였다. 조선시대 궁궐의 잔치에서 야진찬이 시작된 것은 순조 28년(1828년)부터였다. 이때의 잔치는 왕비 순원왕후의 40세 생일을 축하하는 진작례로 시행되었으며, 당시 대리청정을 하던 효명세자가 주관하였다. 2월 12일 창경궁 자경전에서 시행된 순원왕후생신 축하 진연은 묘시에 시작되었다. 그리고 같은 장소에서 저녁 7시부터(2경) ‘야진별반과(夜進別盤果)’라고 하여밤에 진연이 이어졌다. 이듬해 순조 29년 2월 9일에는 순조의 40세 생신을 축하하면서 즉위 30주년을 기념하는 진찬이 창경궁 명정전에서 치러졌다. 이날은 창경궁 외전에서 외진찬이 펼쳐졌으며, 2월 12일에 자경전에서 내진찬이열렸다. 외진찬은 오시(오전 11시부터)에 시작하였으며,내진찬은 진시(오전 7시부터)부터 시작되었다. 이날 역시2경에 야진찬이 시행되었다. 이렇듯 야진찬을 시행하는 것은 궁궐 잔치의 하나의 선례가 되어 이후로도 계속되었다.헌종 14년(1848년) 순원왕후의 육순을 축하하는 진연에서역시 2경에 야진찬이 시행되었다.

   이처럼 순조 대 이후로 야진찬이 시행된 것은 왕실의잔치 규모가 확대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야진찬 이외에도 진연을 주관하는 주빈이 주인이 되는 회작(會酌)까지 시행되며 기존에 없던 야진찬과 회작으로 진연의 의식이 확장되었다. 이것은 왕실의 위상을 과시하기 위한 조처로 볼 수 있지만, 의례적인 측면에서는 조선 후기로 갈수록 왕실의 의례가 더욱 화려해지고 의식적으로 발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야진찬은 본 진찬과는 규모와 의례가 달랐던 만큼 그 의미도 다르다고 여겨진다. 본 진찬, 주로 내진찬이 끝난 후 야진찬이 이어졌는데, 이때 참석자는 외진찬·내진찬과는 달랐다. 순조 28년의 진연은 주인이 순원왕후였다. 이날의 야진별반과에는 순조와 순원왕후가 세자로부터 술과 차를 받는 의례가 치러졌다. 순조 29년의 진연은 순조를 축하하기 위한 잔치였다. 이때의 야진찬에서는순조와 세자만 참석하여 세자가 순조에게 술을 올리는 것으로 치러졌다.

   또 헌종 14년 진연은 대왕대비 순원왕후의 육순을 축하하는 자리였고, 국왕인 헌종이 주관하였다. 이날의 야진찬에는 대왕대비와 헌종이 참석하여 헌종이 헌수(獻壽)하는 의례를 치렀다. 본 진찬은 대왕대비 이하 왕과 왕비, 세자 내외, 왕실의 종친과 내명부, 문무관과 외명부들이 참석하는 큰 잔치였다. 이에 비해 야진찬은 화려한 진연을 치르고 나서 진연의 주인공과 주관하는 왕 혹은 왕세자가 술과차를 드리면서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다시 한 번 축하를 드리는, 진연을 정리하면서 그 의미를 강조하는 의례였다고볼 수 있다.

   야진찬의 준비는 진찬이 끝나고 이어서 진행되었다.여관들은 야진찬의 참석자의 자리와 상을 준비하고, 밤에잔치가 치러지는 만큼 전각 안과 밖에 불을 밝힌다. 전각안에는 등(燈)을 달았고, 계단에는 사롱등(紗籠燈)을 달았으며, 그 외에도 전각 안과 밖에는 초(燭)를 설치하여 환하게 밝혔다. 의식을 치를 때는 악공이 음악을 연주하였고,여령 등이 창을 하고 춤을 추었다. 헌종은 대왕대비 순원왕후의 육순 축하 야진찬에서 순원왕후에게 작(爵)을 올렸고, “천세 천세 천천세”를 외치는 산호(山呼)를 하였다.



답안지를 쓰다 보니 밤이 되었네, 알성시(謁聖試)

조선시대에 관료가 되기 위해서는 과거시험을 치러야 하였다. 과거시험은 답안지를 작성하여 제출해야 하기 때문에 해가 저문 후에는 이를 위한 준비도 별도로 필요한 만큼 치러지기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궁궐에서 밤에 과거시험이 치러지기도 하였다. 궁궐에서 과거시험을 치르는 경우는 국왕이 참석하기 때문인데, 이를 친림시(親臨試)라고한다. 하지만 그 시험이 밤에 치러진 것은 말하기 부끄러운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답안지 작성이 늦어져서시험시간을 넘겨 밤까지 작성할 때가 있었다. 결국 밤에 과거 시험을 치르는 것인데, 시험을 감독하는 시관이나 응시자 모두 힘든 일이었다. 숙종 대에는 성균관 문묘에서 치러야 할 알성시를 궁궐에서 시행하였고, 시험이 밤까지 계속되었다. 왜 그랬을까?
   알성시(謁聖試)는 국왕이 성균관 문묘(文廟)에 행차하여 공자와 선현들의 신위에 작헌례(酌獻禮)를 마친 후 치르는 시험이었다. 이 시험은 보통 3번의 과정을 통과해야하는 정기시에 비해 단 한 차례 시험만으로 최종 급제자를 선발하였으며, 성균관과 사학(四學)의 유생들을 대상으로 하였다. 그러나 그 문호가 점차 넓어져서 전국의 유생들이 시험을 치르는 경우가 빈번하였다. 이토록 알성시는 특별한 시험이었으며, 정기적으로 치르는 시험이 아니었기때문에 별시라고 불렀다. 과거시험을 통해 관료사회로나가려는 유생들에게 알성시는 기회였다. 단 한 번의 시험으로 합격할 수 있고, 즉일방방(卽日放榜)이라 하여 시험본 당일에 급제자가 발표되었고, 방방의까지 진행되었던것이다.

   알성시에는 많은 응시자가 몰렸다. 조선후기에는 다른과거시험에도 응시자가 급증하였지만, 알성시나 이와 비슷한 정시(廷試)처럼 국왕 앞에서 시험을 보고 단 한 번의 시험으로 합격할 수 있는 시험에는 더더욱 응시생이 급증하였다. 알성시 응시가 전국의 유생에게 개방된 후에는 응시자가 1만 명이 넘을 정도였고, 숙종 12년(1686년)에는 8명의 응시생이 깔려 죽는 사고도 발생하였다. 알성시는 국왕이 성균관에 행차하였을 때 치르는 시험이었던 만큼 성균관 명륜당(明倫堂)에서 시험을 치렀다. 그러나 응시자가늘어나자 시험 장소를 늘리거나 변경해야 하였다. 압사사고가 발생한 숙종 12년에는 명륜당 서쪽 담장을 허물어 반수당(泮水堂)까지 넓혀 시험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이렇게해도 응시생을 감당하지 못할 때는 궁궐로 옮겨서 시험을치렀다. 궁궐에서 알성시를 실시할 때는 춘당대(春塘臺)에서 시험을 진행하였다.

   알성시는 한 문제만 출제하고, 오전에 시험을 치렀다.시험문제는 주로 표(表)로 출제되었다. 표는 형식을 갖추어 써야 하는 매우 어려운 시험이었다. 보통 과거시험의 마지막 과정에서는 책문(策問)을 출제하여 식견을 밝히도록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지만 알성시는 한 번의 시험으로 합격자가 결정되고, 그 합격자도 시험 당일 발표하기 때문에 책문과 같이 장문으로 답안을 작성하는 것은 곤란하였다. 그리고 누구나 지을 수 있는 쉬운 시험은 변별력이떨어지는 만큼 어려운 표를 작성하는 것으로 출제되었다.

   시험이 어려울수록 응시자나 채점자 모두 곤란한 상황을 맞기도 하였다. 알성시의 답안지는 오시(오전 11시에서 오후 1시)를 전후로 제출하도록 하였지만 제 시간에 마무리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늦어도 2경(저녁 7시에서 9시)이 되면 답안지 제출을 마감하였다. 날이 어두워지면 부정의 여지가 많아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몰 후 더이상 답안지 작성이 어려워지는 2경이 지나서도 여전히 답안을 작성하는 응시생들이 있었고, 3경이나 4경까지 시험을 치르기도 하였다. 이때 시관은 재량으로 불을 밝히고 시험 시간을 좀 더 연장해 주었다. 이러한 문제로 인해 답안지 제출 마감은 2경으로 정하고, 시간이 지난 답안지는 받지 않겠다고 하였지만, 때때로 시관의 독촉에도 3・4경이지나도록 답안을 작성하는 응시생이 있었다. 이토록 최선을 다해서 답안을 작성하고 관료사회에 입성하겠다는 의지는 궁궐에서 밤에도 불을 밝히고 시험을 치르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 글. 임혜련. 숙명여대 인문학연구소 연구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