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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 조선시대 야간통금 해제와 비일상의 밤문화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8-10-04 조회수 : 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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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조선시대에는 엄격하게 야간의 통행을 금지하였고, 법령도 엄중히 적용되었다. 하지만 순찰 관리들의 눈을 피해 은밀한 만남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야금의 시행은 도성의 안전과 직결되므로 이를 어기는 자들을 엄히다루었으나 항상 그러한 것은 아니었다. 『정조실록』 20년(1796) 4월 12일에는 술에 취해 야금시간을 어긴 줄도 모르고 궁궐의 담장에 누워 있던 성균관 진사 이정용을 임금이 너그럽게 봐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왕조실록』, 『일성록』, 『승정원일기』 등에서 알수 있는, 왕이 야금을 해제한 날은 상원일(上元日)·초파일(初八日)·섣달그믐(除夜)과 같은 세시절기와 명절이며, 대부분 정기적으로 시행되었다. 그 밖에는 앞의 사례처럼 일정한 주기로 반복되는 것은 아니지만 동지(冬至), 과거시험, 왕의 생일과 능행(陵幸), 각종 연회 후에도 야금을해제하였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특정한 날의 야금 해제는사람들의 야간 통행을 가능하게 하여 밤을 즐길 수 있도록하였고, 이 과정에서 형성 또는 지속되는 다양한 야행문화를 발달시켰다.



절일(節日)의 풍속과 야금해제

상원(上元)의 보름달 풍속
상원은 정월대보름날을 말하는데, 『정조실록』 6년(1782)기록에 따르면 당속(唐俗)에 상원 전후 각 1일은 통금을 푼다고 하였으니, 오늘부터 내일 모레까지 야금을 풀도록 하교하였다. 정월대보름의 역동적인 모습은 유만공(柳晩恭,1793~1869)의 『세시풍요(歲時風謠)』(1843)에서 찾을 수있다. 특히 이 기록은 <상원(上元)> 17수, <원석(元夕)> 27수로, 정월대보름날 밤의 행사를 따로 기록했다는 점에서주목된다.

   <원석(元夕)>에서는 정월대보름 밤에 행해진 풍속과당시 야간의 풍경을 묘사하였는데, 그것을 대략 15가지로정리할 수 있다. ①보름달 농점치기 ②불싸움 ③조왕신에게 빌기 ④다리밟기 ⑤인정(人定)과 야금해제 ⑥수표교(水標橋)와 광통교(廣通橋)의 정경 ⑦거리의 행렬 ⑧기녀와사내들의 무리 ⑨서울의 거리와 촉류(燭遊) ⑩도찰 관원의모습 ⑪관리들의 밤 유희 ⑫시절가(時節歌) ⑬석전(石戰)과 줄다리기 ⑭문전성시를 이루는 음식점과 술집 ⑮육의전네거리 모습 등이다. 위의 내용 중 특징적인 것들을 중심으로 당시의 모습을 재구성해 보면, 이날은 눈보라가 치는 쌀쌀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추운 줄 모르고 다리를 밟았다. 서울은 광통교(廣通橋)와 수표교(水標橋)에서다리밟기가 성행하였는데, 이러한 답교(踏橋)의 풍속은 다리를 건너면 1년간 다리병(脚病)에 걸리지 않는다는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다리 난간 옆에는 천막이 줄지어 있어 고관들이 촛불과 화로를 켜놓고 앉아있었다. 중인들이 모여 사는 중촌(中村)에는 밤새도록 촛불을 밝혀 연주회를 듣는 야간모임인 촉류(燭游)를 즐겼으며, 몇몇 양반 자제들은 흥이 올라세속의 노래(時節歌)를 불렀다. 국수집과 탕을 파는 가게는 문전성시를 이루고, 술집에서 돼지고기 굽는 냄새가 퍼진다. 어느덧 시간은 5경에 이르러 파루가 울리고 사람들은 흩어진다. 육의전 네거리 앞은 일없는 장사치(賣兒)들이 남아 양뿔 모양의 등(羊角燈) 아래에서 골패놀이를 즐긴다.

초파일의 연등놀이
음력 4월 초파일은 석가모니의 탄생을 축하하는 날이다.초파일의 대표적 ‘밤 풍속’으로는 연등놀이가 있다. 연등을다는 행사는 삼국시대 또는 그 이전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고려시대 태조의 훈요 10조 중 여섯 번째 유훈은“연등회(燃燈會)는 부처를 섬기기 위한 것이니 이 행사를국기일(國忌日)이 겹치지 않는 한 규모의 가감 없이 시행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 뒤 유교사회인 조선에서도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풍속을 단절시키지 않았고, 야금을 해제하여 백성들이 밤늦도록 화려한 연등놀이를 즐길 수 있도록하였다.
   
   조선시대 세시기(歲時記)인 『경도잡지』(1800c), 『열양세시기』(1819), 『동국세시기』(1840c)에는 초파일날 민가의 연등놀이가 기록되어 있다. 이날은 야금을 해제하므로남녀노소 모두 초저녁부터 남산과 북악의 산기슭에 올라가불야성이 된 시내 광경을 구경하고 밤새도록 떠들며 놀았다. 초파일 연등을 다는 행사는 민가를 비롯하여 궁중에서도 성대하게 행해졌다. 『열양세시기』에 따르면 이날 궁가(宮家)와 내사(內司) 등에서는 정교하고 화려한 등을 임금에게 바쳐 서로 경쟁한다고 하였다. 세시기에 묘사된 연등중에는 해와 달 모양을 한 일월권(日月圈)을 장대에 꽂아바람을 받아 현란하게 돌아가게 하거나 혹은 빙빙 도는 전등을 매달아 마치 탄알이 날아가는 것처럼 불빛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있었고, 이 외에도 연꽃 모양의 등부터 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마늘·수박 모양의 등, 상서로운 동물인 학·잉어·자라 등과 불을 붙여 움직이는 형태의 연등 등 그 종류가 아주 다양하였다.



한양도성의 철야풍속(徹夜風俗)

조선시대는 도성 내에 초경 3점부터 5경 3점까지 야간통행이 금지되고, 특정한 날에만 야금(夜禁)이 해제되었기 때문에 밤은 모두가 일상적으로 누릴 수 있는 시·공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공식적인 3대 철야일(徹夜日)이 존재하여경신일(庚申日)·교년일(交年日)·제야일(除夜日)을 맞이하면 궁중과 민가에서는 불을 밝히고 밤을 새웠다.

밤을 지켜 복을 얻는 경신일(庚申日)
경신(庚申)은 육십갑자의 57번째 날로,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이날에 잠을 자지 않고 밤을 새우는 경신수야(庚申守夜)를 행하였다. 경신일의 밤샘 풍속은 도교 사상과 관련이 깊은데, 밤을 새우는 이유는 몸에서 삼시충(三尸蟲)이빠져나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삼시(三尸)는 도가에서 사람의 몸에 사는 3마리의 벌레를 말한다. 도교에서 경신일은 하늘과 땅이 만나는 날로 간주하여, 이날 잠이 들면몸 안에 있던 삼시충이 빠져나가서 그간 몸담고 있었던 인간의 행적을 하늘에 보고하게 된다. 상제(上帝)는 이를 듣고 잘잘못을 따져 사람의 수(壽)와 명(命)을 조정한다. 따라서 삼시충으로 인해 수명이 줄어들 수도 있기에 사람들은 졸음을 쫓아가며 밤을 새웠으며, 자신에게 나쁜 일이 미치지 않도록 밤을 지킨다는 의미로 경신수야(庚申守夜)나수경신(守庚申)이라 표현하였다.
   
   경신일의 밤샘은 『고려사』, 『세가(世家)』의 원종 6년(1265)에 “태자가 밤새 잔치를 열고 풍악을 울렸는데, 당시 나라의 풍속에서는 도가(道家)의 말에 따라 이날이 되면 반드시 모여 마시면서 밤을 새웠고, 이것을 수경신(守庚申)이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뒤 조선시대 중종28년(1533) 11월 22일(경신일) 기사에 “태종 때부터 경신을 지켰고, 성종까지도 지속되었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2혜원 신윤복의 ‘월하정인(月下情人)’.야심한 시각에 행해진 남녀의 밀회를 그린것이다. 화폭에 담긴 시구에는 ‘달빛이 침침한3경(月沈沈夜三更) 두 사람의 마음은 두 사람만안다네(兩人心事兩人知)’라고 적혀 있다. 시에는정확한 시간이 기록되어 있어 얼마나 늦은시각에 만남이 이루어졌는지 알 수 있는데,달빛이 침침한 3경(三更)은 대략 밤 11시부터1시까지로 야간에 통행하는 것이 금지된시간이다.소장처: 간송미술문화재단3혜원 신윤복의 ‘야금모행(夜禁冒行)’.‘야금모행(夜禁冒行)’이라는 제목에서도알 수 있듯이 야간통행금지 시간에 몰래야행(夜行)하는 모습을 묘사하였다. 붉은 옷을입은 별감과 흰 옷을 입은 양반이 기생과 함께으슥한 밤길을 걷고 있다. 두 작품 모두 초승달이환하게 걸려 있고, 우측의 화폭에는 초롱을 든어린 하인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 깊은밤중의 비밀스러운 만남을 감상할 수 있다.소장처: 간송미술문화재단2 316 월간 문화재 2018 10 . 11 17보아 이 문화는 고려 때부터 지속되어 조선까지 행하여졌음을 추정할 수 있다. 궁중의 경신수야 풍속은 동지섣달에집중되어 있으며 밤샘 연회의 형태로 나타난다. 태조 7년(1398) 12월에는 경신날 종친과 관료들을 내전(內殿)으로불러 밤을 지키도록(守夜) 하였으며, 세조 1년(1455) 12월에는 관원에게 밤을 새도록 전교하고 술과 도탕(賭帑)을하사하였다. 그 후 연산군을 지나 중종 시기까지도 경신일의 철야풍속은 계속 되었는데, 연산 11년(1505) 12월에는조정의 대신들을 모아 밤을 지키며 시를 지어 바치도록 하였다.

   경신일의 밤샘은 궁중뿐만 아니라 양반가에서도 행하였다. 조선시대 양반들이 경신일을 맞아 행하던 풍속을 조선 중기 문신 조극선(趙克善, 1595~1658)의 일기 『인재일록』(15~29세)과 『야곡일록』(30~41세)을 통해 살펴보면,기록에는 ‘야회(夜會)’ 또는 ‘경신회(庚申會)’라는 단어가많이 등장한다. 경신회는 동지섣달뿐만 아니라 연초에도열리는데, 지인들이 모여 등불을 켜놓고 술과 음식을 즐기거나, 승경도놀이(政圖)와 쌍륙(雙六)과 같은 놀이를 하며밤을 지새웠다



새해와 묵은해가 교차하는 교년일(交年日)
교년(交年)은 음력 12월 24일로, 해(年)가 교차하는 날을말한다. 이때를 맞이하면 궁중에서는 왕과 신하들이 함께모여 밤을 새우고, 새해를 맞이하였으며, 이러한 모임을 교년회(交年會)라 하였다. 교년의 유래는 부엌신인 조왕과의관련성이 깊다. 중국 송대(宋代)의 기록인 『동경몽화록(東京夢華錄)』의 <12월>조를 보면, “매년 12월 24일 교년의 밤이 되면 사람들은 승려를 불러 경전을 읽게 하고, 술과 과일을 준비하여 영신(送神)을 행하며 온 가족이 전지(錢紙)를 태우고, 부뚜막 위에 조왕신(灶馬)의 그림을 붙인다. 술지게미를 아궁이 문에 바르며, 이를 ‘취사명(醉司命)’이라한다”고 하였다. 다만 궁중의 교년 행사와 조왕신의 관련성은 눈에 띄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리고 중국과는 달리 조선에서는 민가의 교년일 철야 모습이 문헌에 두드러지게 등장하지 않는다. 따라서 새해와 묵은해가 교차한다고 믿었던 12월 24일의 교년 풍속은 궁중 중심으로 행하여진 연말행사의 하나로 추측된다.
 
   성종 11년(1480) 12월 24일의 교년에는 왕이 후원에서 종친들의 활쏘기를 관람하고 날이 저문 뒤에 선정전(宣政殿)으로 자리를 옮겨 종친들과 함께 활을 쏘았으며, 밤새도록 기생과 공인들이 음악을 연주하도록 하였다.



송구영신의 밤 제야일(除夜日)
제야는 한 해의 마지막 날 밤이다. 『일성록』에 담긴 정조18년(1794) 12월 28일의 기록에는 “세(歲) 전후 3일 동안각 관사는 장패(藏牌)하고, 제석과 설날 뒤 3일간 야금을풀라”고 명하였다. 여기서 ‘장패’는 야금을 해제하는 날 도성을 순찰하는 순라군(巡邏軍)이 들고 다니는 패를 거두는것을 말한다. 제야에 야금을 해제한 가장 큰 이유는, 잠을자지 않고 밤을 새우는 수세(守歲) 풍속이 행하여졌기 때문이다. 오늘날 섣달그믐의 자정에는 제야의 종소리를 듣기 위해 많은 인파가 보신각으로 몰리는 야행(夜行) 풍속이 있는 것처럼, 조선시대의 제야에는 집집마다 불을 환하게 밝히고 가족이 함께 둘러앉아 밤을 새우며 해(年)를 지키는 수세(守歲)를 행하였다. 또한 제야의 다음날인 설날의 3일간도 밤에 통행을 가능하게 하였는데, 설날은 새해를 맞아 어른들께 세배를 드리고, 사당에 차례를 지내는 등다양한 풍속이 행해지는 큰 명절이므로 야간의 통행을 허용한 것으로 보인다.
   
   수세(守歲)하며 행한 다양한 풍속으로는 나례(儺禮),연종방포 등이 있다. 먼저 나례는 궁중과 관아 그리고 민가에서 널리 행해지던 세말에 잡귀를 쫓는 의식이다. 방상시(方相氏)를 중심으로 하여 가면을 쓴 자들이 주문을 외며묵은해의 나쁜 기운을 거둬 낸다.
   궁중에서 제야에 행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의식인 연종방포는 글자 그대로 한 해의 마지막 날에 포를 쏘는 것이며, 큰 소리를 내면 악귀를 몰아낼 수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실제로 세종 20년에는 경회루 앞에서 화포를 쏘았고, 세조 10년에는 후원(後苑)과 백악산 꼭대기에서 동시에 화포를 쏘자 그 소리에 천지가 진동하는 듯하여, 왕과함께 이를 구경하는 왜인(倭人)과 야인(野人)이 놀라고 두려워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시대 문집류에는 민가에서 행한 제야의 폭죽놀이 기사를 볼 수 있다. 노수신(1515~1590)의󰡔『소재집』에서는 제석을 해마다 폭죽놀이 하는 날이라고 표현하였다. 또한 박이장(1547~1622)의 『용담집』에서는정초에 집집마다 폭죽 소리로 귀신을 놀라게 하였다고 하였으며, 윤기(1741~1826)의 『무명자집』에서는 제야에 고을마다 역귀 쫓는 폭죽 소리가 울린다고 하였다.

   한 해가 끝나는 날부터 새해를 맞이할 때까지 폭죽을터뜨리는 풍속은 조선시대부터 오랫동안 전승되어 왔으며,묵은해의 나쁜 기운을 몰아내고 다가올 새해를 잘 맞이하고자 하는 송구영신의 의미가 담겨 있다.
 
용재총화』에 기록된 성현(成俔, 1439~1504년)이 경험한 관화(觀火)의 종류
거북형 불놀이
엎드린 거북이 형상을 만들어 입에서 불꽃과 연기가 쏟아지도록 한다 .
또 거북이의 등에 만수비(萬壽碑)를 세워 불빛을 밝히게 되면 비석에 적힌 글자가 보인다.
족 자형 불놀이
장대 위에 화족(畫簇)을 돌돌 말아 줄로 매어 두면, 불이 끈을 타고 위로 올라가서 줄을
끊어지게 하여 족자가 아래로 펴진다. 그러면 족자의 글씨를 변별할 수 있게 된다.
장림형(長林形) 불놀이
긴 숲(長林)을 만들어 화엽포도형(火葉葡萄形)을 새겨 놓고 불을 한 구석에서 붙이면 잠시
동안에 숲이 불에 활활 탄다. 불이 다 타고 연기가 없어지면, 붉은 꽃봉오리와 푸른 잎이
아래로 드리워져 있는 듯한 형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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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특집 2 글. 김유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