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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 노란 영양 덩어리, 은행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8-10-05 조회수 :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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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을 더 운치 있게, 역사를 더 굳건하게

만약 은행나무가 없었다면 이 가을의 풍경은얼마나 단조로웠을까 싶다. 거의 모든 나뭇잎이엽록소의 생성이 활발한 여름까지는 초록색을띈다. 그러다 엽록소의 생성이 더뎌지고분해되는 가을이 되면 비로소 본색을 드러낸다.
   강렬한 가을볕을 품으면 더욱 밝게빛나 황금색을 띈다. 볕이 좋은 날 나무는물론이거니와 바닥까지 황금빛으로 물든 가을은행나무의 진정한 클라이맥스다. 게다가은행나무는 수명이 길다. 생명을 가진 모든것들은 언젠가는 수명을 다하기 마련이다.21세기 최첨단 의료기술의 도움을 받고도인간의 수명이 기껏해야 100년이다. 하지만은행나무는 풍찬노숙을 하면서도 1000년을당당히 버틴다. 시간이 켜켜이 쌓인 품격은 존재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더러는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어 주었고더러는 사찰이나 서원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국가가 법률로서 지정하고 보호하는 천연기념물가운데서도 은행나무는 월등히 많은 숫자를차지한다. 무려 스물세 그루나 천연기념물로지정되어 있다. 첫 번째로 지정된 경기도 양평군용문사의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30호)는독보적이다. 높이가 42m에 가슴둘레는 14m에이른다. 수령은 무려 1100년을 헤아린다.그러니까 이 은행나무는 삼국이 저물고 고려와조선이 건국되고 숨 가쁘게 흘러온 대한민국의근현대사를 고스란히 지켜본 역사의 산증인인셈이다. 개별 나무의 수명만 긴 것이 아니다.은행나무는 각종 육식 공룡과 초식 공룡이지구의 주인이던 중생대부터 존재했다. 무려 2억7000만 년 전부터 지구에서 살아왔다. 인간은감히 명함도 내밀 수 없는 위엄이다. 지축이흔들리는 대혼돈의 시기와 가혹한 빙하기에도어떠한 변종이나 분화 없이 꿋꿋하게 버텼다.그래서 1문 1강 1목 1과 1속 1종만 존재하는식물이다.



은행나무의 가슴 아픈 현대 치욕사

그런 은행나무가 요즘은 한국에서 말할 수없는 치욕적인 대접을 받고 있다. 은행나무는그 질긴 생명력에서 검증됐듯이 병충해에강하고 공기정화 효과가 뛰어나다. 무엇보다미세먼지와 차량이 내뿜는 오염물질인아황산가스를 흡수하는 데 탁월한 기능을가졌다. 도시마다 거리 곳곳에 가로수로은행나무를 심었다. 애당초 은행나무의의지와는 상관없는 인간의 일방적인결정이었다. 서울시에만 무려 11만 4000여그루의 은행나무가 있다.
   은행나무는 암수가 구별된 나무며암나무에만 열매가 열린다. 문제는 나무를심은 지 최소 15년이 지나 열매가 열릴 때가돼야 비로소 암수를 구분할 수 있다는 점이다.은행나무 열매의 겉껍질에는 ‘빌로볼(Bilobol)’과‘은행산(Ginkgoic acid)’이라는 성분이 포함돼있다. 빌로볼과 은행산은 고약한 냄새를 내고접촉성 피부염을 일으킨다.
   이러한 독성물질은 종자를 보호하고번식시키기 위한 은행나무의 당연한결정이었다. 공룡과 각종 곤충의 공격으로부터수억 년을 버티자면 이 정도의 자위 수단은반드시 필요했다. 그런데 공룡보다 더 무서운도시인을 만나게 됐다. 해마다 가을이 되면지방자치단체마다 주민들의 민원이 폭주한다.‘제발 좀 냄새나는 은행나무 열매를 치워 달라’는것이다. 초기에는 환경미화원들이 열매를수거했지만 역부족이었다.
   2013년부터는 한여름부터 채 익지 않은녹색의 열매를 미리 수거하는 작업을 시작했다.멀쩡한 암나무를 뽑아내고 수나무를 심는 일도벌어진다. 급기야 은행잎으로 암수를 감별하는DNA 분석법까지 개발됐다. 거대한 초식 공룡의틈바구니와 빙하기에도 건재했던 은행나무가고작 인간들의 불편함 때문에 속절없이 꺾이고있다. 치욕도 이런 치욕이 없다.



은행, 가을 식재료를 대표하다

이렇게 몹쓸 짓을 하면서도 인간은 은행(씨앗)자체는 매우 좋아한다. ‘견과(nut)’는 딱딱한껍데기에 둘러싸인 식용 씨앗을 의미한다.곡물과 콩 역시 식용 씨앗이지만 견과류와는몇 가지 점에서 차이가 난다. 대체로 크기가크고, 기름이 풍부하며, 먹어서 영양분을 얻기위해 굳이 조리할 필요가 거의 없다. 이러한성질 덕분에 견과는 선사시대부터 지금까지중요한 영양 공급원으로 역할하고 있다.호두·헤이즐넛(개암)·아몬드·땅콩·캐슈너트·밤·잣 등이 대표적이며, 은행 역시견과에 속한다. 모든 견과가 그렇듯이 생명을품은 씨앗이라는 속성상 단단한 껍데기라는보호장치를 갖고 있다. 오랜 세월 지구에서 버텨온 은행은 그 보호장치가 특히 견고하다. 고약한냄새와 독성을 가진 외과피를 벗기면, 흰색의단단한 중과피를 만난다. 이것을 은행이라고한다. 단단한 중과피를 벗기면 다시 갈색 피막의내종피를 만나는데, 이것을 벗겨야 비로소 한알의 은행을 먹을 수 있다. 무려 3중의 보호막을가진 셈이다.
   이처럼 견고하게 보호되는 씨앗은 그만큼풍부한 영양분을 갖고 있다. 풍부한 칼로리와베타카로틴, 비타민B와 C, 신경조직 성분인레시틴 그리고 아연, 철, 칼륨, 칼슘, 인 등의다양한 미네랄을 함유하고 있다. 덕분에 혈액순환을 촉진하고 노화를 예방하며 레시틴이콜레스테롤 조절을 돕는다. 치매 예방, 숙취제거, 피로 해소, 뼈 조직 강화 등에 효과가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을의 대표적식재료인 은행은 살짝 볶아 소금을 뿌리는것만으로 고소하고 농축된 향을 고스란히 느낄수 있다. 신선로나 찜 등의 단골 고명으로도사용되고 은행주악이나 은행단자 등 품격 있는한국음식의 재료로 활용돼 왔다. 특히 올가을‘한국의집’에서는 불린 은행과 햅쌀을 곱게갈아서 정성껏 끓여 낸 은행죽을 만날 수 있다.색도 곱고 맛도 순한 은행죽은 이 가을의 햇살과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는 음식이다.



- 글. 박상현. 맛칼럼니스트. 사진. 안호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