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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 한양-경성-서울, 그리고 남산의 아리랑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8-12-14 조회수 : 27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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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역사를 고도로 압축해놓은 남산

필자는 30여 년 동안 서울시사편찬위원회(현 역사편찬원)에서 서울의 역사를 연구하고 시민들을 위해 책을 발간해오면서 남산 지역에 관한 연구가 시급히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서울의 역사 연구와그에 관한 출간은 궁궐이 모여 있는 서울 북쪽의 유산이나경제 개발 후 새롭게 각광받은 강남 지역과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듯하다. 그에 비해 남산 지역에 대한 체계적 연구나 출간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 이유는 각종 정책이나 이벤트를 통해 ‘남산’에 관한 논의는 많이 있어왔지만,대부분 일회성을 띠거나 정권이 바뀌면 언제 그랬냐는 듯정책이 폐기되는 바람에 정작 이 지역에 관련한 치밀한 역사 연구와 출간은 제한적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북촌은 북촌대로, 서촌은 서촌대로 고유의 멋과 풍취가 있듯이 남촌 지역 또한 그 나름의묘한 매력을 지녔다. 조선 시대에는 권좌에서 멀어진 몰락한 양반이나 속세에 미련 없는 사람들이 초연히 생활하던지역으로만 치부했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조선 최대 규모의일본인촌이 형성되어 왜곡된 형태로나마 우리 역사에 ‘근대’라는 화두를 던진 곳이 바로 남촌이다. 그뿐 아니라 해방 후에는 두 번에 걸친 군사 쿠데타 과정에서 청와대로 진격한 부대가 바로 현재 한국의집과 한옥마을 부지에 있던수도방위사령부였고, 그 뒤편의 중앙정보부 건물에서는 민주화 인사와 무고한 시민들이 부조리한 이유로 고초를 겪기도 했다. 어찌 보면 근대 이래로 남산은 우리의 어두운역사를 압축해놓은 세트장 같은 느낌이 든다. 하지만 최근들어 이른바 ‘다크 투어(dark tour)’가 시민들 사이에서 새롭게 주목받기 시작하는 것을 보면 자랑스러운 역사든 가슴 아픈 역사든 그것은 그 나름의 의미가 있으며, 오늘날우리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유의미한 메시지를 전달한다는점에서 열린 마음으로 과거를 마주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과연 남산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한양-경성-서울의 역사는 어떤 새로운 모습을 드러낼 것인가. 지금부터함께 살펴보기로 하자.



조선 시대 한양과 남산

서울이 수도가 된 것은 엄밀히 따지면 시기적으로 고대 한성백제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현재 올림픽공원을 중심으로 그 부근의 몽촌토성과 풍납토성, 그리고 고분군을비롯한 각종 유적이 이를 뒷받침한다. 하지만 이것은 현재의 한반도를 모두 포괄하는 국가의 수도가 아니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명실상부한 수도로서의 의미는 역시 조선왕조의 개창과 더불어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당시의 서울, 즉 한성부는 조선의 수도이자 서울 도성안팎을 관할하는 행정구역으로서 그 성격은 현재의 서울특별시와 같았다. 한성부의 관할 지역은 도성 안과 이른바‘성저십리(城底十里)’라 불리는 공간이었다. 오늘날 서울시가 25개 구로 구성되었듯이 한성부는 크게 5개 부(部)로이루어졌고, 그 아래에 52개 방(坊)을 두었으며 1751년에는 방을 일부 축소하면서 방 아래에 계(契)를 두었다.

   이 가운데 도성 안에 해당하는 남산의 북쪽 기슭은 남부 훈도방에 해당한다. 청계천을 경계로 북쪽의 궁궐들과주변 공간은 북촌, 이남은 남촌이라고 불렀다. 이 가운데북촌에는 지체 높은 왕족과 관료·권세가들이 살았던 반면, 남촌에는 주로 권력이나 세속적인 욕심과는 거리가 먼강직한 선비와 몰락한 양반, 서민들이 모여 살았다. 물론남촌에도 일부 권세가와 부유한 자가 있었지만, 이는 시대에 따라 유동적이었고 북촌에 비해 상대적으로 서민적 정서가 지배하던 곳이다. 남촌은 산자락을 따라 서울 도성이지나가는 지리적 특성상 농민보다는 관청의 하급 관리나잡역부, 상점 직원, 과거시험에서 번번이 낙방한 유생들, 그리고 한때 세상을 호령했지만 권좌에서 밀려난 자가 대부분이었다. 여기에 소수의 권세가가 좋은 풍광을 이유로 남산 계곡에 호젓한 정자를 짓고 풍류를 즐기곤 했다. 이처럼남산 일대 남촌에는 다양한 직업군이 존재했는데, 그야말로 거적을 걸치고 생활하던 사람부터 중간층이라 자부하는사람들까지 경제적 수준도 각양각색이었다.

   이렇듯 북촌에 비해 변두리 취급을 받던 남산 일대는역사적 기록 역시 비교적 적은 편이다. 남아 있는 기록물의종류도 속세를 등지고 자연과 우주를 논하거나 개인적 감성을 담담하게 적은 개인 문집이나 서화 등이 대종을 이룬다.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기록을 통해 조선 시대 남산자락의 모습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남산 일대는 한양에 도성을 정할 때 중요한 역할을 한무학대사가 처음으로 ‘녹천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남산의풍광을 즐겼다고 한다. 이곳은 현재 구 서울교통방송에서서울유스호스텔로 향하는 언덕 부근으로 추정되며, 일제강점기에는 통감 관저와 총독 관저가 들어선 곳이다. 그 오른편, 즉 현재 한국의집과 한옥마을이 들어선 일대는 ‘청학동’이라고 불렀다. 영생불멸을 상징하는 지명에서도 알 수있듯, 이 일대는 압도적 풍광으로 북악이나 백운동 등 한양의 다른 절경지와 견줄 만한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을 간직한 곳이었다. 다만 세조 때 성현은 『용재총화』에서 “물도맑고 깊은 내가 흘러 좋기는 하지만 나무가 없어 아쉽다”라고 적고 있다. 하지만 이곳에 집을 짓고 살았던 중종 때 좌의정과 대제학을 지낸 이행의 시를 살펴보면 이곳을 수목이 그윽하게 우거진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또 “남산에 집을 지으매 작은 동네 그윽한데, 일이 바빠 경치 구경은 엄두도 못 내었네. (…) 그윽한 꽃 제각기 수도 없이 피었구나. 오솔길 따라 산을 오르며 짐짓 배회하노라”라며 집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에 감탄을 금하지 못했다.



일제강점기 경성의 노른자위 남산

이렇게 아름다운 풍광에 고즈넉하고 서민적인 정취가 물씬풍기던 남산 일대는 일제강점기로 접어들어 대규모 일본인촌이 들어서면서 식민 도시의 권력과 부가 한데 집중된 최고의 주거지로 탈바꿈한다. 말하자면 조선 시대와 달리 북촌과 남촌의 처지가 완전히 뒤바뀐 셈이다.

   먼저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이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한양도 경성으로 바뀌게 된다. 일제강점기 서울 변화의 가장 큰 특징은 전통적 조선의 모습을 철저히 해체하거나 파괴하고, 일본과 서양의 건축양식을 결합한, 식민지 근대성을 보여주는 새로운 형태의 건물과 거리가 조성된 것이다. 그 결과 종래의 북촌은 대대적 해체와 파괴를 경험한다. 대표적인 예가 조선 궁궐의 파괴다. 경복궁의 해체된전각은 유명 인사의 개인 사저를 신축하는 데 쓰였고, 근정전 자리에는 1925년 대리석으로 신축한 조선총독부 청사가 들어섰다. 현재의 광화문광장 거리는 광화문을 해체해건춘문 옆으로 옮기고 총독부광장을 조성했으며, 창경궁은동물원이 되었다. 그리고 국가 상징로에 해당하는 태평로를 따라 현재 서울시청 자리에는 경성부청이, 서울시의회자리에는 경성부민관이 들어섰으며, 남대문로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은행 등 식민지 경제 수탈 기구가 자리를 잡았다.
   한편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자 일본 본토에서 서울로 이주하는 일본인들이 늘어갔다. 그들은 상대적으로 조선인이 적고 빈터도 많던 남산 북쪽 기슭에 자리를잡고 점차 자신들의 집주 지역을 확대해나갔다. 그 결과 4호선 명동역에서 남산으로 올라가는 언덕길에는 조선통감및 총독 관저, 목조 조선총독부 청사, 경성신사, 노기신사,한양공원, 조선신궁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한편 지하철 4호선 충무로역 부근 한국의집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관저로한옥마을 자리는 조선헌병대사령부로 사용했다. 즉 일본인들은 과거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주둔하던 남산 산기슭에터를 잡고 고지대에서 평지인 서울의 중앙과 종로 방향을굽어보며 자신들의 영역을 서서히 확장해나갔다.

   조선 안에서도 대표적인 일본인 집주지로 탈바꿈한 남산 일대는 그들만을 위한 시설이 하나 둘 늘어갔다. 즉 비만 오면 질퍽대던 진고개 일대는 포장도로를 건설해 이동이 용이해졌고, 도로 아래에는 하수구를 매설했으며, 가스등과 전화선을 가설해 청계천 이북의 조선인 마을과는 전혀 다른 시가가 형성되었다. 그뿐 아니라 일본인들이 진고개를 지나 명동 쪽으로 세를 확장하면서 각종 백화점을 비롯해 카페・극장・병원 등의 편의시설이 들어섰고, 전차노선도 일본인촌을 중심으로 부설 및 증설함으로써 청계천이남의 현재 을지로와 충무로 퇴계로 일대는 종로와는 완전히 판이한 시가가 조성되었다.



서울의 명소로 거듭 태어난 남산

오늘날 남산은 서울을 방문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둘러보는 명소로 자리 잡았다. 서울의 동서남북 지역을 골고루조망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도심에서 트레킹을 즐길 수 있는몇 안 되는 입지 조건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산이지금의 모습을 지니기까지는 적잖은 어려움이 있었다.
남산 북쪽 기슭에 고급 일본인 주택가가 형성된 결과,이들이 패망 후 본토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매물로 나온 이른바 ‘적산가옥’ 등을 둘러싼 암투가 치열하게 벌어졌다.특히 1945년 11월 미 군정이 일본인의 조선 잔류를 금지하자 환금을 위해 그들이 투매한 각종 동산과 부동산은 일확천금을 노리던 조선인들의 표적이 되었다. 반면 해외에서 돌아온 귀환동포와 북에서 내려온 초기 월남민은 마땅히 거처할 곳이 없어 남산 기슭에 가주택을 짓고 생활했다.그런데 이들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자 동절기만 되면 이들이 땔감으로 나무를 베는 바람에 순식간에 민둥산으로변해버리는 등 남산 일대는 대혼란에 빠졌다. 이러한 상황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더욱 악화되었다. 전쟁이 끝나고전후 부흥과 개발 독재 시기를 거치며 남산은 다시 한번 홍역을 치른다. 즉 무분별한 도시화 과정에서 공원 계획 용지가 크게 축소되면서 외국인 주택 지구와 공영주택 지구가예정지를 잠식했고 여기에 군부대, 공공 기관, 방송국, 학교, 종교 시설들이 무분별하게 들어섰다. 게다가 한국전쟁월남민들이 판잣집을 짓고 기거하는 바람에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남산의 원형이 크게 훼손되었다. 그럼에도 해방후 남산 일대는 경제성장과 더불어 장기적 역사 복원 프로젝트 시행으로 서서히 원형을 회복해갔다. 조선신궁이 들어선 자리에는 안중근의사기념관이, 참배로에는 독립운동가의 동상이 세워졌고, 식민 지배와 압축 성장 과정에서 파괴된 서울 도성의 복원이 추진되었다. 또 1990년대에는 자연환경 복원 외에도 전통과 역사 복원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진행되어 독재와 인권 탄압의 상징이던 구 중앙정보부와 군부 쿠데타 선봉에 선 수도방위 부대 이전을 통한 한옥마을 조성과 한국의집 정비 등이 이루어졌다.

   600여 년의 세월 동안 남산 아래 한양은 역사를 낳았고, 경성은 근대를 탄생시켰으며, 서울은 다시 태어나고 있다. 청학동과 진고개를 지나 필동 언저리에서 들려오는 아리랑 가락과 전통의 맥은 오늘도 남산골에 진한 여운을 풍기고 있다



 
- 기획특집 1 글. 사진 나각순. 서울역사편찬원 자문위원, 문학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