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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 한국의집이 겪어온 역사의 뒤안길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8-12-14 조회수 : 3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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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

조선 시대 남촌은 ‘딸깍발이 산림처사’들의 주거지

조선 시대에 한국의집과 그 일대는 과연 어떤 곳이었을까?조선 시대의 지도를 보면 한양은 도성이 사방을 둘러싸고있는 완연한 성곽도시였으며, 남산 일대는 그 가운데 남쪽맨 끝자락에 자리 잡은 변두리에 불과했다는 것을 확인할수 있다. 그만큼 조선 시대 한양은 현재의 서울과는 비교할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작았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된다.지금의 서울이 한강을 중심으로 강북과 강남이라는 매우이질적인 지구로 나뉘듯, 조선 시대에도 한양은 청계천을중심으로 그 북쪽을 북촌, 남쪽을 남촌이라 불렀으며 두 지역은 정치적·경제적·문화적으로 사뭇 다른 분위기를 자아냈다.
   북촌은 현재 가회동 일대를 중심으로 경복궁과 창덕궁사이, 그리고 남촌은 한국의집이 자리 잡고 있는 필동에서남산터널 위쪽으로 올라가는 주자동 언저리를 포괄하는 남산의 북쪽 기슭을 가리킨다. 이 가운데 북촌은 궁궐이 있는것에서 짐작 가능하듯 그 시대의 권력 실세와 지체 높은 양반 명문가가 모여 살던 곳이다. 반면 남촌은 ‘딸깍발이 산림처사’라는 말이 암시하듯 가난한 선비와 일반 백성들이모여 사는, 서민적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지역이었다.
   조선 시대 행정구역은 여러 차례 개정되었지만 대략한성부를 동서남북중 5부(部)로 나누고, 각 부에는 하위 행정 단위로 방(坊)과 계(契)·동(洞)을 두었다. 이 가운데남촌은 훈도방(薰陶坊)에 속하는 주자동과 필동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해당한다. 한국의집을 주축으로 한 이 일대의모습은 권희가 편찬한 『훈도방 주자동지』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이 지역은 대체로 한양 남쪽에 치우쳐 있기에 도로 사정이 좋지 않고 시장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어 “시류를 좇아 자신의 이름과 권세를 떨치고자 하는야심찬 선비나 속세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는 이 근처에 살지 않는다”라고 적혀 있다. 그러면 이 부근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었을까. 광해군 때 영의정에 오른 박승종의 기록에 따르면 “서적을 인쇄하는 자, 독서에만 빠져 사는 선비, 그저 조용히 산속에서 요양하고자 하는 사람들만 살고있다”. 이처럼 이 일대는 다소 적막하고 따분한 곳이기는했지만, 신분제 사회였음에도 신분의 고하나 남녀노소를불문하고 서로 돕고 친애하는 따듯한 마음을 나누는 곳으로 인식되었으며, 예부터 효인과 명현을 배출한 곳으로도잘 알려져 있다.
   이러한 마을 분위기는 조선 개국 초로 거슬러 올라가세조 때 성현이 편찬한 『용재총화』 등의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이에 따르면 한국의집과 한옥마을 일대는 예부터 ‘청학동’이라고 불렀는데, ‘골 깊고 푸른 내’가 있어 삼청동‧인왕동・쌍계동・백운동과 더불어 한양에서도 손꼽히는승경지로서 자연을 만끽하려는 자들이 정자를 세우고 시를 짓기를 즐겼다고 한다. 실제로 이 부근에는 유명한 정자가 많이 들어섰다. 가령 한양에 수도를 건설하는 과정에서있다”. 이처럼 이 일대는 다소 적막하고 따분한 곳이기는했지만, 신분제 사회였음에도 신분의 고하나 남녀노소를불문하고 서로 돕고 친애하는 따듯한 마음을 나누는 곳으로 인식되었으며, 예부터 효인과 명현을 배출한 곳으로도잘 알려져 있다.
   이러한 마을 분위기는 조선 개국 초로 거슬러 올라가세조 때 성현이 편찬한 『용재총화』 등의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이에 따르면 한국의집과 한옥마을 일대는 예부터 ‘청학동’이라고 불렀는데, ‘골 깊고 푸른 내’가 있어 삼청동‧인왕동・쌍계동・백운동과 더불어 한양에서도 손꼽히는승경지로서 자연을 만끽하려는 자들이 정자를 세우고 시를 짓기를 즐겼다고 한다. 실제로 이 부근에는 유명한 정자가 많이 들어섰다. 가령 한양에 수도를 건설하는 과정에서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무학대사는 현재 남산 서울유스호스텔(일제강점기 통감 및 총독 관저 터) 부근 언덕에 ‘녹천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한양을 굽어보았다고 한다.



한국의집 자리는 사육신 박팽년의 사저

그러면 바로 옆 동네인 한국의집 부근에는 어떤 정자가 들어섰고, 그 주인공은 누구일까. 기록에 따르면 어린 임금단종을 몰아내고 수양대군을 옹립한 계유정난의 주요 인물인 권람이 한명회와 함께 쿠데타를 모의하던 후조당이라는정자와 그의 집이 이 부근에 있었다고 전해지며, 한국의집자리에는 이들과 대극에 선 사육신 박팽년(1417~1456년)이 살았다고 알려져 있다. 성해응의 『쌍절금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현재 박팽년이 그린 것으로 알려진 ‘설죽도’를 보면 차디찬 눈 속에서도 푸르름을 잃지 않은 그의 정치적 신념과절개가 오롯이 전해져오는 듯하다. 현재 한국의집 자리에그가 살았고, 또 바로 그 옆에 쿠데타의 핵심 인물인 권람의 집과 정자가 있었다고 하니 이 고요한 산림처사들의 공간 청학동이 당시 얼마나 시끄러웠을지 자못 궁금하다.
   박팽년은 평소 안평대군과 교분이 두터웠는데, 안평대군의 꿈에까지 등장할 정도였다. 그 꿈을 잊지 못해 안평대군이 안견에게 그리게 한 것이 바로 ‘몽유도원도’다. 형인 수양대군과의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안평대군의 운명만큼이나 박팽년의 운명 또한 어쩌면 이미 예견된 것인지 모르겠다. 풍류와 절개의 두 주인공은 남산골 소나무 밑에서도 무릉도원을 거니는 꿈을 함께 꾸었을 것이다. 오늘날 박팽년의 집터였던 한국의집에서는 가무악극 ‘몽유도원도’를이따금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안평대군은 물론이고 박팽년의 넋이나마 위안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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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한양에서 ‘게이조’로 전락한 서울

아마도 역사학 전공자가 아니라면 ‘한성부(漢城府)’라는 조선 시대 서울의 공식 명칭에 익숙한 이는 드물 것이다. 이것은 주로 공공 기록물에서 사용하던 용어로, 사람들은 서울을 통상 별칭인 ‘한양(漢陽)’이라고 불러왔기 때문이다.이 한양이란 명칭은 ‘북으로는 북한산, 남으로는 한강에 이르는 양지 바른 명당’이란 뜻으로, 세상의 밝은 빛과 기운이 새 왕조의 수도를 오래도록 아늑하게 감싸주기를 바란건국 세력의 간절한 염원과 풍수사상이 녹아 있다. 그러나일제강점기로 접어들며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은 훈시를통해 ‘한성·한양’이란 기존 명칭 대신 ‘게이조(京城)’라는생경한 지명을 공식적으로 사용하도록 했다. 그는 서울이더 이상 조선 왕조의 수도가 아니라 일본 제국의 일개 지방, 즉 식민 도시라는 사실을 애써 각인시키려 한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 제국의 식민 도시로 전락한 서울에서일본인들은 주로 어디에 모여 살았을까. 그곳은 현재 지하철 4호선 충무로역-명동역-회현역이 지나가는 남산 북쪽기슭과 명동 일대를 일컫는 ‘남촌 지역’이었다. 그런데 주목할 사실은 현재 한국의 전통문화를 국내외에 널리 알리고 다각도로 재현하고 있는 한국의집 자리가 바로 그 남촌의 한복판 노른자위에 해당한다는 점이다. 역사에는 이처럼 알다가도 모를 아이러니컬한 일들이 반복되곤 한다.
   식민 통치가 장기화되자 일본인 집단 거류지는 남산일대를 기점으로 점차 사방으로 확대되었다. 특히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된 후에는 러일전쟁 시기를 전후해 주로 군인과 그 가족들이 소규모로 모여 살던 용산·원효로·한강로·이촌동 일대가 새로 유입된 일본인들 사이에서 ‘핫’하고 ‘힙’한 일본인 거주지로 각광받기 시작했다.또 3·1운동을 계기로 식민 지배 시스템을 대대적으로 정비한 1920년대에는 서울역 뒤편과 서소문 일대에 철도 관계자와 식민 기구 공무원들의 대규모 관사·사택이 들어섰고, 그 후에는 종로와 5대 궁궐 주변 등 전통적인 조선인들의 공간에 거주하는 일본인도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식민 도시 서울의 민족 간 경계, 청계천

조선에서 일본인들은 교통이 편리하고 학교·병원·백화점 등 각종 편의 시설과 더불어 경찰·군부대·행정관서등의 식민 통치 기구가 집중된 부(府)와 지정면(指定面)에 모여 살았다. 즉 이들은 조선 주요 지역에 거점을 마련할때 그 안에서 ‘가장 편리하고 안전한’ 도회지에서 자신들만의 공간을 구축하며 마치 섬처럼 독립된 집단 거주 양상을보였다. 당시로서는 조선 각 지역의 일본인촌이 역세권이자 곧 명문 학군이었으며, 동시에 성공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특급 거주지였던 셈이다.
   서울의 경우 조선인과 일본인 집주 지역의 민족 간 경계는 바로 ‘청계천’이었다. 일본인들은 대한제국기 이래로한동안 남산 기슭 언저리에만 소심하게 웅크리고 있었다.그러나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된 이후 서서히 기지개를 켜기 시작하더니, 만주사변 이후 중국 대륙으로 제국의 판도를 크게 확대해나간 1930년대로 접어들자 일본인들의 거주지는 두 민족의 심리적·물리적·상징적 경계이던 청계천을 넘어서기 시작한다. 그 결과 전통적인 조선인의 공간으로 인식되던 북촌이나 서촌으로 이사하는 일본인도 자연스레 늘어났다. 이것은 이 시점을 전후해 일본인들이 더 이상 주변의 조선인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조선 통치에 대한 자신감이 일본인의 거주 공간 및 일상적인 동선(動線)의 확대로 나타난 것이다.



근대와 문명의 상징, 일본인촌

우리에게는 이러한 ‘동선과 생활공간의 민족별 분리’라는일제강점기 식민 도시가 지닌 공간 구조의 특성을 자연스레 학습할 수 있는 좋은 역사 부교재가 있다. 엉뚱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영화 『장군의 아들』이나 드라마 『야인시대』가 그것이다. 물론 이 작품들은 픽션(fiction)과 팩트(fact)를 대중의 구미에 맞게 재구성한 것이므로 등장인물에 대한 평가나 묘사, 갈등의 극적인 전개 방식, 그리고 개별 에피소드의 세부적인 내용이 과연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지는 별도의 논의가 필요할 듯하다. 다만 필자가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대목은 조선의 ‘주먹’과 일본의 ‘야쿠자’가 물리적으로 충돌하는 장면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공간적 배경과 그것이 지닌 장소성(locality) 또는 역사성에 관한 것이다.
   시청자나 관객은 대개의 경우 무협지를 방불케 하는배우들의 화려한 액션이나 클라이맥스 장면에서 주요 등장인물이 나직이 읊조리던 짧고 굵직한, 카리스마 넘치는 감각적인 대사에 시선을 고정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한 걸
음 더 나아가 두 집단이 맞붙거나 복수를 위해 이동하는 세부 동선에 주목해보면, 같은 서울에서 살았음에도 실제로는 조선인과 일본인의 공간이 분리되어 있었다는 사실을쉽게 발견할 수 있다. 가령 조선의 주먹들이 일상적으로 등장하는 공간은 주로 우미관・YMCA・보신각・종로경찰서등 현재 종로를 중심으로 한 청계천 북쪽 일대이며, 이 장면에서 등장하는 소품은 대개 설렁탕이나 소박한 막걸리등이다.
   반면 이들이 비장한 표정으로 일본인들을 응징하러 가는 장면을 보면 일단 종로 일대의 허름한 다방에서 모여 일본인촌에 사는 ‘아무개’의 손을 봐주자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들은 집단으로 수표교, 즉 청계천을 건너는데 영상을 보면 십중팔구 개천을 건너자마자 명동·소공동(메이지초)·충무로(혼마치) 일대의 카페와 백화점 등 근대적 이미지의 서양식 건물들이 등장한다. 그곳은 카레라이스와애플파이라는 새로운 먹거리를 맛볼 수 있었고, 벨벳 드레스나 실크 정장으로 한껏 멋을 낸 모던 보이와 모던 걸들이 가배(咖啡)를 마시며 여가를 즐기던 공간이었다. 여전히 전기가 보급되지 않아 해만 떨어지면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마는 청계천 이북의 조선인 마을과 달리, 남촌의 일본인 마을은 한밤중에도 가스등이 거리를 환히 비추는가 하면 ‘목 넘김(노도고시, のど越し)’이라는 새로운 근대의 음료 문화를 선도한 청량음료(라무네,ラムネ)와 맥주(비루,ビール)를 광고하는 네온사인이 곳곳에서 번쩍이는 신세계였다. 그곳은 더 이상 엿기름에서 우러난 텁텁한 단맛이 아니라 혀끝을 직접 자극하는 가공된 설탕의 노골적인 단맛이 지배하는 세상이었고, 전깃불 덕분에 밤 시간까지 늘어난 하루를 카페인과 탄산의 도움을 받으며 즐길 수 있게 된문명의 공간이었다.
   비록 ‘주먹들’이라는 특수한 집단을 통해 극단적으로표상화되기는 했지만 이를 통해 우리는 공간적으로 청계천 이북에서는 여전히 전근대 ‘한양’의 역사가 지속된 반면, 이남에서는 근대 식민 도시로서 ‘게이조’의 새로운 역사가 동시에 펼쳐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바꾸어말하면 서울은 청계천을 경계로 식민지 근대화와 개발로부터 소외된 조선인촌과 문명이 지배하는 일본인만의 공간으로 뚜렷하게 양분된 것이다. 일제강점기 서울이 지닌 이러한 특성, 즉 같은 시공간일지라도 지리적 공간에 따라 전근대와 근대라는 2개의 시간과 코드가 듀얼 시스템으로 공존하는, 한일 두 민족의 분거(分居)와 차별적 ‘삶의 질’을 전제로 한 이러한 경향은 1930년대 중반 ‘대경성 계획’이 발표된 뒤에도 여전히 변형된 형태로 지속되었다.



빛 좋은 개살구, ‘대경성 계획’

박정희 정권 시절 서울 도시개발 계획의 역사적 기원을 추적해보면 그것은 1930년대 조선총독부와 경성부 관료, 그리고 오랫동안 경성에서 생활 기반을 일궈온 일본인 유지들의 ‘향후 30년 대경성’에 대한 구상과 맞닿아 있다. 1934년에 처음 대두한 ‘대경성 계획’은 경성부의 ‘조선시가지계획령’과 총독부령 제78호를 통해 논의되기 시작했는데, 주된 내용은 남촌과 북촌의 도시 인프라 격차 해소, 중・장기적 도시계획에 입각한 서울 및 4대문 밖 인접 지역의 가로망 정비, 체계적 토지 구획 정리를 기반으로 한 지역 간 균형 개발과 특성화에 관한 것이었다.
   서울과 인근 지역의 균형 개발과 광역 도시화에 관한이 같은 논의는 조선인의 전통적 공간으로 이주하는 일본인이 증가함으로써 두 민족이 뒤섞여 생활하는 혼거지(混居地)의 확대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것은 한일 두 민족의불평등과 실질적 삶의 격차 해소를 전제로 한 것이 아니었다. 반대로 그곳에 살고 있던 조선의 서민들을 도시 변두리로 밀어내면서 그들의 삶을 극단으로 내모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문제가 되었다. 즉 조선인이 생활하던지역을 대상으로 한 가로망 확대 정비나 토지 구획 정리 등새로운 개발 정보는 땅값·집값·집세를 단기간에 폭등시켰다. 그 결과 일부 양반가와 그곳에 땅을 소유하고 있던지주, 그리고 개발을 주도하던 일본인 관리 및 유지들과 친분이 있던 조선인은 단기간에 부를 증식할 절호의 기회를맞이했다. 하지만 이를 감당할 수 없었던 대다수의 서민은개발이 진행될수록 거꾸로 도시 변두리나 산간벽지로 밀려나 개발에서 철저히 소외되었다. 일제강점기 신문 사회면이나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서울 주변의 광범위한 토막(土幕)이라든가, 날로 늘어가던 토굴(土窟)의 존재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살던 곳에서 쫓겨난 도시 빈민의 서글픈 초상을 상징한다. 이것은 마치 오늘날 자나 깨나 부동산 시세에 전전긍긍하며 서울에서 인근 신도시로, 신도시에서 또다시 더 외진 곳으로 거듭 밀려나가는 우리네 서민들의 모습과 매우 닮아 있다. 즉 1930년대 식민 기구와 일 본인 민간 유지들이 주도한 ‘대경성 계획’에 대한 개발 담론은 결과적으로 남촌과 북촌의 민족별 공간 분리 현상을완화하기는 했다. 하지만 이것은 대다수의 조선인 서민에게 민족적 차별과 더불어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흔히 볼수 있는 부(富)에 따른 불평등, 그것의 세습과 확대라는 계급적 차별이 덧씌워진 형태로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문제의심각성이 존재한다. 이로써 서울 서민들의 머릿속에 일본인은 막연히 나라를 빼앗은 ‘이민족’이 아니라, 실제로 내삶터와 일자리를 빼앗아 삶 그 자체를 나락으로 내몬 ‘가진자’라는 실존적 의미의 ‘구적(仇敵)’, 즉 원수 같은 집단으로 각인되기 시작했다.



왜 남산 기슭인가

그러면 일본인들은 왜 처음부터 조선의 심장부이자 전통적번화가인 광화문과 종로 일대가 아닌 그토록 외진 남산 기슭에 자신들의 집단 거주지를 건설했을까. 현재 서울을 기준으로 보자면 남산은 서울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일제강점기 이래로 해방 후 서울이 확장을 거듭한 결과일 뿐, 조선 시대 한성부는 청계천 이북을 중심으로한 4대문 안 지역을 의미했다. 따라서 당시 남산은 한성부의 남쪽 끝자락에 위치한 변두리에 불과했는데, 이것은 서울 성곽이 왜 남산을 가로질러 지나가는지를 생각해보면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 다시 일본인들은 왜 서울의 남쪽 끝자락을 집단 거류지로 선택했을까. 무언가 복잡한 배경이 있을 듯하지만 해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곳에 빈터가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왜 그곳에 빈터가 많이 남아 있었는가’, 그리고 ‘그곳에 일본인촌이 들어선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가’이다.
   풍수에 입각해서 보자면 남산은 조선 왕조의 안산(案山)이었다. 안산이란 명당의 필수 조건으로 집터나 묏자리정면에 위치한 산을 말하는데, 예부터 불길한 기운이나 재앙을 막아주는 신령한 공간으로 여겼다. 이러한 원리를 한나라의 수도에 적용해보면 남산은 조선 왕조의 번영을 지켜주는 이데올로기적 공간으로 기능했다. 실제로 서울의 5대 궁궐 가운데 정궁인 경복궁에서 바라보면 남산은 정남향에 자리 잡고 있다. 이것은 과거 임금님이 아침에 일어나궐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면 제일 먼저 마주하는 산이 곧 남산이었고, 정무를 시작하기 전에 그날의 밝은 기운을 받는신성한 공간이었음을 뜻한다. 이런 이유로 남산 지역에는함부로 여염집을 짓지 못하게 했다. 게다가 이곳은 고지대이므로 산 정상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면 조선의 5대 궁궐가운데 정궁인 경복궁이 한눈에 들어온다. 유교 사회에서는 감히 임금님보다 높은 곳에 집을 짓고 그를 내려다보는일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남산 기슭 북쪽에 빈터가 많은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었다. 조선 왕조는 이 신성한 산자락에 왕조를 개창한 태조 이성계와 산신을 모시는 국사당을 설치해 왕조의 안녕을 기원하는 한편, 일반 민가나 풍속을 해하는 시설을 일체 금지함으로써 이 산을 고이 모신 것이다.
   또 지질학적 관점에서 볼 때 남산 일대에 빈터가 많은 이유는 근본적으로 택지로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1920년대 중반부터 조선총독부와 경성부는 도시 정비를명목으로 서울 일대 주요 지역의 지질조사를 대대적으로실시했다. 조사 결과 궁궐들이 자리 잡은 청계천 이북 지역에는 화강암이 발달해 배수가 용이한 반면, 남산 지역에는퇴적암이 발달해 큰 비만 오면 점토층이 배수를 막아 도처에 물난리가 나고 그 물이 다 빠질 때까지 땅이 질퍽질퍽해사람들이 이동조차 하기 어려웠다. 현재 남산터널에서 충무로로 이어지는 일대를 ‘진고개’로 부르는 데는 이러한 자연환경이 작용했다. 따라서 이곳에 집터를 마련하려면 두가지가 반드시 필요했다. 하나는 배수를 인공적으로 강화하기 위해 근대적 하수구, 즉 암거를 설치하는 것이었고,다른 하나는 현재 을지로와 종로 방면으로 이동할 수 있는포장도로를 설치하는 것이었다. 한국의집 앞을 지나 회현동·서울역 방면으로 이어진 도로가 경성 최초의 콘크리트포장도로가 된 데에는 이러한 사정이 있었다.
   아울러 이것을 역사적으로 보자면 남산의 북쪽 기슭은 임진왜란 이전까지 조선에 온 일본 사신이 묵던 동평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또 임진왜란 때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부하로 벽제관전투와 행주대첩에 참전한 마시타 나가모리(増田長盛) 부대가 남산 일대에 주둔하면서 그곳을 ‘왜성대’라고 부른 바 있다. 현재 왜관동·예장동·회현동 일대는 선조들의 ‘자랑스러운 조선 정벌 유적지’로서 조선총독부가 대대적으로 선전한 곳이기도 하다. 그 결과 청일전쟁에서 승전한 후 본격적으로 서울로 유입된 일본인이 하나둘 남산 일대로 모여들자 4대문 밖에 있던 일본공사관도남산 중턱으로 이전했으며,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직후인 1906년에는 이곳에 통감부,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된 후에는 총독부가 연이어 들어섰다. 우리가 흔히기억하고 있는 경복궁 자리의 웅장한 조선총독부는 1925년에 궁궐을 해체하고 대리석 건물로 신축해 남산에서 이전한 것이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병합 후 15년 동안조선총독부는 바로 일본인촌의 본산지이던 남산에 자리 잡고 있었다.



진고개로 몰려든 ‘혼부라(本ブラ)’

위험을 무릅쓰고 서울의 식민 도시화 과정을 지극히 단순화하자면 1910년대까지는 남산 일대와 용산 일대의 일본인촌 건설기, 1920년대 중반까지의 조선 궁궐 등 전통적공간 파괴 및 해체기, 1930년대 이후 일본인촌과 조선인촌의 동화기 또는 폭력적인 균질화 프로젝트로 요약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비만 오면 질퍽거리던 한국의집 앞 진고개 일대는 도쿄, 오사카, 고베 등 일본 제국 내 5대 도시의중심가에 필적하는 멋쟁이들의 거리로 탈바꿈한다. 일본에서 ‘혼마치(本町)’는 여러 지역에서 등장하는 일반적 지명이다. 우리의 ‘어디 어디 본동’ 정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혼마치는 대개 그 마을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중핵지 역할을 했거나 가장 번화한 곳을 일컫는다. 이것은 식민 도시 서울에서도 그대로 재현되었다. 현재 충무로 일대가 일제강점기 혼마치로 불린 데에는 그곳이 일본인촌의 핵심적기능을 담당한 데다 그에 필적하는 면모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과거 일본인들이 건설한 식민 도시로서 해방 후에도주요 도시로 발전한 지역의 ‘중구청’ 자리를 일제강점기 지도 위에 포개어 보면 대개 그 지명은 혼마치와 그대로 일치하거나 적어도 그 언저리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해방후 국내 유수 도시들의 역사적 연속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서울에서는 충무로와 명동 일대가 대표적 사례다.
   그렇다면 과거 혼마치로 불리던 진고개 일대는 과연어떤 모습이었을지, 1925년 경성에서 태어난 한 여성의 기억을 따라 함께 잠시 엿보기로 하자. 
   요시오카 마리코(吉岡マリコ)는 현재 서대문역 부근서울적십자병원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총독부에서근무하던 공무원이었고, 관사촌이 바로 현재 순화동 JTBC사옥 부근에 있었기 때문이다. 맞벌이 부모님 덕분에 그녀는 남대문공립심상소학교와 경성제일고등여학교를 거쳐엘리트 현모양처를 양성한다는 청화여숙을 졸업한 신여성으로 성장했다. 1945년 일본의 패망과 더불어 경성을 떠난그녀는 노년이 되어 딸과 함께 서울을 방문해 유년기의 추억을 되새겼다. 그녀는 경성 최고의 번화가이던 명동과 충무로 일대를 거닐며 당시에는 ‘혼부라’가 넘쳐나던 거리라고 회상했다. ‘부라부라’는 일본어로 ‘두리번거리다’ 혹은‘기웃거리다’라는 뜻이다. 한때 일본에서는 최고의 번화가이기도 했던 긴자를 거닐며 다방・카페・댄스홀 등에서 유행을 즐기던 멋쟁이들을 ‘긴부라’라고 불렀는데, 그에 견주는 의미로 진고개 혼마치의 화려한 거리를 거닐던 모던 보이와 모던 걸을 당시 경성에서는 ‘혼부라’라고 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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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충무로에는 ‘삿포로 비-루’라는 간판을 크게 내건 ‘긴자’라는 이름의 카페가 1930년에 개업하자 내로라하는 멋쟁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에게 이 일대는 이렇듯 화려한 소비와 유흥의 거리이자 동시에 ‘문화와 교육’의 메카로도 기억되었다. 경성에서 명문 학교에 진학하려면 과외 수업과 선행 학습은 필수였고, 제대로 된 과외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혼마치사교육촌 일대를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혼마치는 경성 일본인촌 안에서도 주로 의사, 변호사, 고위직 공무원,일본 대기업의 경성지사 간부들이 모여 사는 최고급 주택지로, 이들의 교육열은 현재 서울의 강남 학원가를 방불케했다. 또 열성적인 부모는 일본 최고학부를 졸업한 과외 선생을 웃돈까지 얹어주며 도쿄에서 모셔왔다. 청계천 이북이나 4대문 밖에 사는 대부분의 조선인 청소년이 공교육에서 소외받고 있던 사이 진고개에서는 일본 제국 내 명문학교 진학을 위한 사교육 열기가 들불처럼 번지고 있었다. 한편 이곳은 문화 공간이기도 했다. 가령 1920년대 주로 조선인들이 이용하던 단성사・우미관・조선극장은 종로 변에 위치한 반면, 일본인들이 드나들던 영화관은 대개 충무로와 을지로 일대에 자리 잡았으며 그 가운데 중앙관・희락관・대정관・황금관 등은 매점과 냉난방 신설까지 갖추어 관객을 끌어 모았다. 이처럼 경성 일본인들의 기억은 주로 남촌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는데, 그것은 무언가 새롭고활기찬 근대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반면 그들의 기억 속에 조선인의 전통적 공간은 매우 왜곡된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가령 요시오카의 유년기 기억 속에 경복궁 경회루는겨울철에 학교 대표 선수를 선발하던 스케이트장, 창경궁은 동물원, 국사당 자리 부근은 스모 경기장으로 남아 있었다. 이것은 식민 도시 게이조의 건설이 현재 명동과 충무로일대를 중심으로 한 근대적 도시 인프라의 확충과 더불어전통적 한양·한성이라는 공간의 해체와 파괴라는 대조적과정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역대 정무총감 관저, 한국의집

역대 정무총감이 관저로 사용한 한국의집은 바로 옆에 조선군사령부(현 남산골한옥마을)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더 없이 든든한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배치는 과연 우연의 산물일까. 당시 식민 기구의 운용체제를이해한다면 이것은 고도로 계산된 것임을 쉬이 짐작할 수있다. 우리가 학창 시절 역사 선생님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내용 가운데 하나가 1919년 3・1운동 이전까지 조선총독부는 헌병경찰제를 통해 ‘무단 통치’를 실시했고, 그이후에는 보다 교묘한 방식의 ‘문화 통치’가 이루어졌다는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배운 기억은 없을 듯하다.
   헌병경찰제는 헌병제와 경찰제를 결합한 제도로 헌병대사령부가 곧 경무총감부이고, 헌병대사령관이 경무총감을 겸했다. 따라서 헌병대사령부가 자리한 한옥마을 바로옆 한국의집이 정무총감 관저로 활용되었다는 사실은 당시식민 통치의 양상을 공간 배치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좋은 역사 학습 소재다. 주지하듯이 경찰은 내밀한 치안을 주관하고, 헌병대사령부는 전쟁 등 비상 상황에서 군대를 지휘하는 식민 통치의 핵심적 기제다. 그리고 정무총감은 총독의 뒤에서 식민 기구 내 업무 분장을 비롯해 일본중앙정부와의 의견 조율, 그리고 일본 거류민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과 다양한 채널을 통해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민관을 연계하는 사실상 통치의 핵심 브레인 역할을 수행하던 자리다. 따라서 역대 정무총감들은 조선과 일본에서 다양한 시정 경험을 쌓았고, 정·관·재계에 넓은 인맥을 자랑하는 노련한 인사들이 중용되었다. 외견상 식민 통치는총독의 훈시를 통해 이루어지는 듯하지만 그 과정에서 중요한 막후 작업은 사실상 정무총감 선에서 이루어지게 마련이었다. 결국 식민 통치의 뇌수를 담당하는 정무총감과물리력을 담당하는 헌병대사령관 겸 경무총감이 서로 지근거리에 배치되어 근무했다는 것은 식민 통치 초기 문무관 의 공조가 얼마나 긴밀하게 이루어졌는지 미루어 짐작케하는 대목이다. 그러한 점에서 정무총감 관저로 사용된 한국의집에서는 과연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살펴볼 필요가있다. 당시 사료들을 보면 이곳에 국내외 각계 인사를 초청해 각종 연회를 개최했다. 그 연회에는 어떤 사람들이 참여했고, 그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당시 연회는 일본에서 경성을 방문한 유명 인사의 환영과 응접도 있었지만, 식민 통치를 위해 포섭해야 할 조선인들과의 일상적 친목 도모를 위한 모임도 자주 열렸다. 사료에 따르면 대화정(大和町)의문향각(聞香閣)이라 불리던 정무총감 관저에서는 이문회(以文會) 멤버들이 주기적으로 모여 친목을 도모하곤했다. 본래 이문회는 1912년 일본인 고위 관료와 구 대한제국 관료 및 귀족 등 조선인 유지들이 모여 경학과 시문을나누기 위해 결성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모임의 명단에는잘 알려진 인물인 박제순・이완용・박영효 등이 올라 있었다. 이 모임은 사실상 조선총독부가 결성을 주도했고, 일본으로부터 작위를 받거나 중추원에 이름을 올린 구 대한제국 관료가 대거 참여했다.
   그 밖에도 일본인의 경우는 총독 이하의 문무 고등관,조선인의 경우는 일본에서 유학한 뒤 고등문관 시험에 합격한 총독부 지방관들로 구성되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이 모임은 비록 학술과 문예를 표방했지만 사실상 ‘내선일체’를 위한 인사들의 친목 도모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때문에 이들이 발표한 작품도 대개는 일본 제국의 식민 통치를 칭송하거나 조선을 방문한 일본인 귀빈들에 대한 환영사나 환송사가 대종을 이뤘다. 그러한 점에서 일제강점기 한국의집은 초대 정무총감 야마가타 이사부로(山縣伊三郎)를 비롯해 마지막을 장식한 엔도 류사쿠(遠藤柳作)의관저로서 고위 식민 관료들의 긴밀한 정책공조 외에도 내선일체를 위한 친목 도모가 이루어진 식민 통치의 또 다른현장으로 기능했다고 볼 수 있다.



해방 후 정권 이양의 역사적 현장, 한국의집

1945년 8월 15일 장안에는 여운형이 엔도 류사쿠 정무총감에게서 치안권을 이양받았다는 소식이 돌기 시작했다.그도 그럴 것이 항복을 선언한 일본 천황의 ‘옥음방송’ 이전에도 8월 6일과 9일에는 미군의 원폭 투하로 대도시가파괴되었고, 예기치 못한 소련의 참전 때문에 언제 경성이함락될지 장담할 수 없는 긴박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게다가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 총독은 협심증을 이유로 모든 정무 처리를 엔도 류사쿠 정무총감에게 떠맡긴 상황이었다. 이에 엔도는 조선인은 물론이고 소련 측에도 널리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사를 하루 빨리 선택해 조속히 행정권을 이양함으로써 일본 거류민의 안정을 도모하고 피해를 최소화해야 하는 중대한 기로에 서게 되었다. 엔도가 일본인 경무 관료를 비롯해 최하영·박석윤 등 동경제국대학출신의 조선인 관료 등 여러 채널을 통해 정보를 수집해 최종적으로 낙점한 자는 바로 좌우익 모두에게 널리 신망받는 여운형이었다.
   이에 엔도는 계동에 있던 여운형을 15일 이른 새벽에현재의 한국의집인 총감관저로 초빙해 일본인의 안전을 보장하는 대가로 치안 유지를 부탁했다. 당시 엔도가 여운형에게 치안권만 이양했는지 아니면 행정권 전반을 넘겼는지는 다양한 설이 존재하며, 당사자와 관계자들의 증언도 여러 차례 바뀌었기 때문에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다. 
   한편 여운형은 이때의 협상에서 수락 조건으로 조선인정치범과 경제 사범의 석방, 3개월 치의 식량 확보, 건국을위한 정치 활동 보장, 학생과 청년의 정치 훈련과 조직 활동 보장 등을 요구해 관철시켰다고 증언했다. 이를 계기로여운형은 구 건국동맹을 모체로 한 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하고 전국적으로 조직을 확대함으로써 과도적 국가 기구를지향했다. 물론 이 조직은 해방 후 공식 정부 조직으로 발전하지 못했고, 주요 간부들이 교체되는가 하면 계파 간 갈등으로 정치적 한계마저 드러냈다. 하지만 건국준비위원회가 엔도에게서 치안권을 이양받음으로써 미군이 진주하기전까지 그동안 억눌려온 조선인들의 정치 참여 열기를 발전적으로 담아내고 정치 공백을 메우며 전국적으로 민족의독자적 정치 세력화를 꾀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역할은결코 무시할 수 없다.
   조선총독부의 최고 실권자가 천황의 패전 선언일 새벽에 조선의 대표를 관저로 초치해 이후의 치안과 질서 유지협조에 관한 협상을 추진했고, 이에 정치범 석방 등의 큰성과를 올렸다는 점에서 한국의집은 일제강점기를 마감하고 해방의 역사를 내딛는 첫 번째 장소였다는 점에서 매우영광스러운 공간이라 할 수 있다.
   모쪼록 이 글을 통해 일본의 식민 통치를 마감한 이와같은 역사적 사건이 바로 한국의집에서 벌어졌다는 사실이더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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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특집 2 글. 사진 이연식. 일본소피아대학교(日本上智大学) 외국인초빙연구원, 문학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