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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 우리 문화유산을 지켜낸 한국민속학의 아버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02-11 조회수 : 2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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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속학 개척에 평생을 바치다
임동권 교수는 1968년 한국민요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과 1954년 국학대에서 한국에서 처음으로 민속학 강의를 열었다. 1958년부터 1974년까지 서라벌예술대학에서 교수•학장을 역임하며 문화예술 분야에 기여했으며,민속학을 학술적으로 정립하고,종합대학의민속학과 설립 기초를 마련했다.
1962년 우리나라 문화재위원회가 발족되면서 전문위원을 거쳐1964년 최연소 문화재위원으로 임명됐다. 32년 동안 17차례나 문화재위원(1962 1999)을 지내며 무형문화재 지정과 인간문화재 발굴에 중요한 역할을 해냈다. 근대화의 격랑 속에서 사라져 가는 고유한민속문화를 지켜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치열한 삶을 살았다. ‘우리의 설날을 있게 한 사람이라는 평가처럼 음력설을 제자리 찾도록하여 1985년 민속의 날로 지정된 후 1990년 비로소 설날이 됐다.지난 1969년 창립한 한국민속학회 회장을 비롯해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심사위원 32년,1989년 창립한 한국민요학회 초대회장,국립민속박물관회 회장,문화재보호재단 이사 등을 지내며 ‘외솔상 ‘서울시문화상’ ‘5.16민족상 ‘아시아문화상 대상’등 많은 상도 받았다.또한 비교민속학회 명예회장으로 동아시아의 민속학 영역에서 중국은 물론 일본•몽골•대만까지 큰 연구 성과를 거뒀다. 50여 권의민속학 관련 저서를 남겼으며,2003년 월산민속학술상을 제정해 후학들을 격려했다.


32년간 20여 종목 국가무형문화재를 지정하다
무형문화재 지정 초창기인 1966년 국가무형문화재 제8호로 강강술래를 지정했는데,임동권 교수가발굴한 첫 성과였다. 당시 원로문화재위원들은 “시골 아낙네들이 모여 춤추는 것이 무슨 문화재냐5’ “달밤의 놀이까지 문화재라고 할 수 있느냐’ 등의 반론도 있었다고 한다. 임 교수는 “어느 민족이든 전기가 없던 시절에 밤을환히 밝혀 주는 달밤을 축하하는 의례가 있었습니다. 우리의 경우노래와 춤이 잘 어우러진 여성 주도의 강강술래가 그것이었지요.심지어 아프리카 원시 문명의 사람들도 달밤이 되면 모여서 축제를 벌여요. 기후나 환경이 좋고 먹을 것이 풍성할 때 자연스럽게축제가 열리는 거죠. 그런데 외국에서는 그 축제가 노래로 정리돼있지 않았지만 우리나라는 달랐어요. 노래로도 잘 만들어져 있었거든요. 그래서 우리만의 특색과 문화적 소산을 국가 지정 문화재로 남기고 싶었습니다. 반대하는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 6개월이나 걸렸어요. 결국 오랜 설득 끝에 강강술래는 국가무형문화재로승인을 받아냈고,2009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으로 등재됐죠”라고 회고했다.문화재위원으로 두 번째로 지정한 것은 충청남도 부여군 은산면은산리에서 전승되는 국가무형문화제 제9호인 은산별신제다. 무당굿에 지나지 않는다며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지만,임 교수는 또다시 그들을 설득했다.


임동권 교수가 조사와 지정에 참여한 국가무형문화재
국가무형문화재 (2종목)제8호 강강술래(김길임 •김금자, 1966), 제9호 은산별신제(대장 유상열, 화주 백남롱, 무녀 이언년, 1966), 제1◦호 나전장(김봉롱, 1966), 제13호 강릉단오제(제관 김신묵, 가면극 차형원•김동하, 무녀 장대연,1967), 제22호 매듭장(정연수, 1968), 제24호 안동차전놀이(김명한,1969), 제25호 영산쇠머리대기(허봉수, 1969), 제27호 승무(한영숙,1969), 제33호 광주칠석 고싸움놀이(이판동, 1970), 제38호 조선왕조궁중음식(황혜성, 1973), 제75호 기지시 줄다리기(이우영, 1982), 제76호 택견(송덕기•신한승, 1983), 제84시호 고성농요(이상수, 1985), 제84-2호 예천통명농요(이대봉, 1985), 제85호 석전대제(강정희, 1995),제86호 문배주(이경찬, 1986), 제89호 침선장(정정완, 1988), 제95호제주민요(조을선, 1989), 제106호 각자장(오옥진, 1996), 제108호 목조각장(박찬수, 1996)


서울시문화재 (9 종목)
서울 송절주, 송파다리밟기, 장안 편사놀이, 삼해주, 향온주, 침선장, 매듭장, 초고장, 민화장

국가민속문화재 (8 건)
나주 불회사 석장승, 남원 실상사 석장승, 예산 보부상 유품, 순창 충신리•남계리 석장승, 장기 모포줄, 여수 연등동 벅수, 태백 천제단“은산별신제는 백제 유민의 한을 풀어주과 특히 무주고혼(無主孤魂) 병사들의 넋을 달래는 진혼굿의 의미를 지니는데,그들의영혼을 달래줌으로써 마을이 편안하고 무병하게 된다고 믿었던것이죠. 그런데 무당이 나와 춤추고 노래를 부르니까 사람들은 굿을 하는 사람이 무슨 인간문화재냐 하며 반대 의견이 많았어요.하지만 ‘자고로 문화재란 그 민족이 가지고 있는 전통 속에서 유-무형의 원형을 찾아가는 게 아니냐?’고 주장해서 1966년 어렵게국가무형문화재 제9호로 지정됐습니다.”
1967년 국가무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된 강릉단오제는 임 박사의 각별한 노력 이 만든 결과였다. 1960년 7월 1차 조사,1964년 8월 2차 조사를 거쳐 1966년 8월에 강릉단오제조사보고서를 제출해 다음해인 1967년 1월 16일에 지정됐다.
“강릉단오제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축제예요. 강릉단오제는 그 기원이 1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조선시대매년 3.4.5월 중 무당들이 산신제를 지내고 3일 동안굿을 벌였다는 기록이 내려오고 있어요. 그래서 마침내 강릉단오제도 문화재지정을 받아냈죠. 단오제 행사에서 새로 발견한 것은 관노가면극이었어요. 유일하게 대사가 없는 무언극으로 우리나라 연극사를다시 써야 했죠. 김동하•차형원 등 관노였던 탈꾼도 찾아냈지요.결국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도 됐잖아요? 제가 민속학을 한 것이얼마나 다행인지 그리고 지금 돌아보면 잘했다는 생각도 듭니다.”임 교수는 1959년 제주도 학술조사를 시작으로 강릉단오제,전남 우수영 강강술래,여수 진남제,전북 익산 기세배,진도 소포 상쇠,전북 진안 매사냥,은산별신제,안동 놋다리밟기,차전놀이,부산 동래별신굿과 김석출,청도 지신밟기 상쇠 김오동,울산 처용제,김금화풍어굿,택견,통영 충무공 탄신기념제 승전무,경남마산 소싸움 등의 축제와 놀이 •민속신앙•민요의 현장을 찾아서 평생 동안 조사. 기록하고 녹음•사진 . 영상 등 많은 민속자료를 남겼으며,학술적으로도 큰 성과를 거뒀다.
그 결실로 임 교수는 32년간20여 종목의 국가무형문화재를 지정했다. 1964년 문화재위원 위촉을 받고 1996년까지 32년 동안 단독 또는 공동조사에 참가해 이룬 성과다.


무형문화재 보전과 진흥에 앞장서다
지난 2016년 3월 유네스코 무형유산 기준에 부합하는 ‘무형문화재 보전 및 진흥에 관한 법률’(이하 무형문화재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1962년 제정된 문화재보호법에서 54년 만에 독립해무형문화재의 범위가 대폭 넓어졌으며,무형문화재위원회가 출범했다. 무형문화재(無形文化財,Intangible Cultural Asset)는 ‘전형 유지’를 기본원칙으로 하여 ‘민족정체성 함양’ ‘전통문화의계승 및 발전’ ‘무형문화재의 가치구현과 향상을 기준으로 삼았으며,전형이란 ‘해당 무형문화재의 가치를 구성하는 본질적인 특징’으로 정의했다. 무형문화재법에서는 이를 7가지로 확대해 한의학•농경 • 어로등에 관한 전통지식,구전전통 및 표현,의식주 등 전통적 생활관습,민간신앙등사회적 의식(儀式),전통놀이•축제 및기예•무예가 추가됐다. 우리나라 국가무형문화재는 1964년 제1호로 종묘제례악이 지정된 이후 2017년 해녀奸ᅵ132호)와 김치담그기奸1133호),2018년 제염 •온돌문화(제134호),2019년 장담그기(제137호) 등 55년 동안 모두 137개 종목이 지정됐다. 또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은 20이년 종묘제례 및 제례악을 필두로 판소리,강릉단오제,아리랑,농악,줄다리기를 포함해 2018년 사상 최초로남북한에서 함께 등재된 씨름 등 모두 20개에 달하고 있다.
임동권 교수는 1964년부터 문화재위원으로 재임하면서 국가중요무형문화재 20여 종목을 지정하고 탁월한 인간문화재를 세상에선보이고 전통을 계승하도록 이끌었다.


정신문화의 가치를 나누고 헌신의 삶을 살다
임동권 박사는 평생 동안모은 민속 사진자료 3만여 점과 1만여 권의 도서를 국립민속박물관에 기증했고,중앙대에 1만 6000여 권의 도서를 기증했다. 또 고향인 충남 청양군 장평면 도서관에 서적 100여 권을 기증하는 등 민속학의 미래를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나누는데에 인색하지 않았다.
필자는 40년 전 민속학 공부를 위해 월산 선생님의 문하에 들어가 큰 가르침을 받았다. 이 글은 무형문화재에 끼치신 업적만을한정해 쓴 글로서 일정한 한계가 있다. 월산 임동권 교수는 우리나라 민속학의 1세대 학자로서 학문적 개척과 현장론적 문화탐색에 평생을 바쳤다. 고매한 인품을 지닌 학자로서 생각과몸가짐이나 행적에서도 누구보다 귀감이 됐으며,사라져 가는 민족의 얼을찾아낸 민속학자로 칭송받아 마땅하다.

 
- 글.장정룡. 강릉원주대학교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