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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 현장에서 얻은지혜, 1인극 예술로 승화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02-11 조회수 :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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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체험과 전통의 실제 탐구
필자는 젊은 교수 시절 을지로에 있던 남천의 사무실에서 화가 주무지와 셋이 어울려 자주 담론을 즐겼과 20()1 년에는『심우성과의 대담록』(우리시대의 연극인,연극과 인간)을 간행하기도 했다.‘남천’ 하면 가장 먼저 기억되는 것이 공연예술에 대한 열정적인현장체험과 전통 탐구 활동이다. 어디든지 주변에서 벌어지는 전통예술의 현장에 가면 으레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전통예술에 관한그의 풍부한이해와 실력은온전히 현장에서 얻은 것이라해도지나친 말이 아니다. 서울에서 휘문중학교를 다니던 그는 16세에6-25전쟁을 만났다. 고향인 공주 의당면 청룡리로 피란한그는 집에서 숨어 지냈는데,그때 집에는 늙은 머슴 정광진(75세 정도)이가사를 도와주고 있었다. 정광진은 지난날 남사당패의 일원이었다. 그를 통해서 남천은 후일 일제 말기에 홑어진 남사당의 원로들을 다시 규합할 수 있었다. 정광진이 야말로 그에게 전통예술에눈을 뜨게 해 준 은인이다.
남천은 그후 정광진이 들려 준 이야기에 따라 틈틈이 오래전에 뿔뿔이 홑어진 남사당패를 찾는 일을 진행했다. 제일 먼저 양도일응을 대덕군 회덕면에서 만났다. 그 동네에서 송순갑 옹도 만날수 있었다. 두 사람의 안내로 당진에 가서 정일파 응을 만났다. 다시 안성 일죽에 가서 남운용 씨를 만났다. 당시 남운용은 5 6명의예능인들과 함께 일대의 여러 마을로 걸립을 다니고 있었다. 평택에서는 최은창 씨를 만났다. 이 예능인들은 지난날 여러 개의 남사당패 가운데서 생존한 명인들이다. 기록에 의하면 1920년대에는 20개 이상의 남사당패가 전국에서 활동했다고 한다. 남천은이들을 여러 차례 설득해 공연단을 결성하기로 약속했다.
1959년 8월 16일 남산 야외마당,지금 안중근 의사 동상이 있는 자리에서 첫 번째로 남사당 복원공연이 이루어졌다. 이 공연에는 꼭두각시인형,탈,의상 등을 미처 준비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이들의 공연은 광복 이후 새로 결집된 남사당으로서 많은 시민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1964년 12월 꼭두각시놀음이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고,다시 1988년 8월에「남사당놀이」로 통합됐으며,2009년 9월에는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이러한일련의 과정에서 남천의 헌신적 기여는 역사적인 업적이라할수있다.
남천은 정병호 교수와 함께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과 문화재위원을 장기간 지냈는데,1980년 11월 밀양백중놀이(하보경의춤),1983년 6월 이동안의 발탈,1990년 10월 김숙자의 살풀이춤등을 국가무형문화재로 발굴한 것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업적이다. 남천은 이러한 문화재들의 발굴만이 아니라 예능인들에게 직접 춤을 배워 추기도 했고,이들의 예능을 이론적으로 분석해 책을 서술하기도 했다.『남사당패연구』(동화출판공사 1974, 동문선1989),『한국의 민속극』(창작과비평사,1975),『소중한 민속예술인들과의 만남』(우리마당,2011),봉일 아리랑』(민속원,2013) 등은모두 남천이 현장체험을 통해 집대성한 저서들이다.


민속학자 •번역가 •사회운동가
일제 말기에 소학교를 다녔을 뿐만 아니라 풍부한 인문학에 관한 소양으로 남천은 일본인들과의 소통에서 거의 자유로운 일본어를 구사했다. 서양의 전문서적을 구하기 어려운20세기 후반의환경에서 그는 일본으로부터 적지 않은 전문서와 정보를 구해 자신의 활동에 참고했다. 그가 남긴 저서들과 번역서를 통해 이러한전후의 사정을 파악할 수 있다.그는 베티 (Bety)의『인형극의 역사』(사사연,1987)와 페데토브(Fedetov)의『인형극의 기술』(동문선,1989)을 번역했는데,이 두권의 책은 그의 꼭두각시 인형극 연구에 참고가 됐다. 후지 이 도모아키 ■井知BS)의『아시아 민족음악 순례』(동문선,1990),아카마쓰 지조(赤松智城)의『조선무속의 연구』(상•하,동문선,1991),미야오 지료(宮尾慈良)의 F아시아무용의 인류학』(동문선,1991),아키바 다카시 (秋葉陰)의『조선민속지』(동문선,1993) 등 그의 번역서는 민속예술을 연구하는 데 일종의 지표를 제공해 준 책들이라할 수 있다.
특히 o}카•마쓰와 아키바의 식민지시대 ‘조선에 대한’ 조사 및 연구는 남천이 재야 민속학자로 기반을 다지는 데 기초를 제공한 문서다. 그는 체계적인 학습이 아니라 독학으로 민속학에 접근한노력가였다. 그가남긴『민속문화론서설』(동문선,1998),『한국전통예술 개론』(동문선,2001),『민속문화 길잡이』(동문선,2008) 등에는 민속학자로서 그의 연구방법과 이론이 집약돼 있다.
남천은 언제나 동시대의 정치체제를 비판하고 체제에 내적으로저항하는 ‘들사람정신’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현실에서 도피하지않고,오히려 더욱 현실에 몸을 담으며 서민과 민중들의 편에 서서 민속과 예술을 방법론으로 삼아 맹렬히 사회운동을 펼친,찾아보기 어려운 실천가였다. 인형극회 남사당(1965) 이사장,한국민속극연구소(1971) 대표^ 극단 서낭당(19刀) 창단,최초의 사물놀이奸11회 공간 전통음악의 밤,1978) 명명,계룡산 산신제(1987) 주관,아시아 1인극제(1988) 주관,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1988) 지도위원,공주민속극박물관(1996) 설립,공주 아시아 1인극제(1996) 주최,장기간 전국 민속예술경 연대회의 방송해설자를 맡는 등 그의사회활동은 세인의 주목을 받았다. 그야말로 한 시대를 이끌어 온시민 지도자였다.


공연예술의 창작 및 연출
남천이 일생 동안 가장 공을 들인 영역의 하나는 자신이 공연예술가가 되려는 노력이었다. 남사당 덧뵈기를 현대화한 <말뚝이세상>(1979, 서울 문리대공연)을 시작으로 1980년부터 ‘서울 앙상블’이라는 명칭으로 인형 제작과 인형극 개발에 주력했다. 1981년부터 1988년까지 공연한 작품은 <쌍두아>(일명 삼팔선),<문>(1인극),<무등산조>(일명 장안산조,남도 들노래),신경림의 시를바탕으로 만든 <능무>(연출작),김명수의 무용을 응용해 만든 <홍동지의 나들이>등이다. 당국의 검열을 피해 가며 지역순회를주로 했다.
1989년부터 1996년까지 공연한 작품은 <판문점 별신굿> <남도들노래><쌍두아><문>과 거창학살사건을 소재로 한 <거창 별신굿> ,동학 100주년을 기념한 <새야 새야>그리고 <결혼굿> 등이다. 또 김재철이『조선연극사』에 남겨 놓은 만석승놀이 기록을근거로 만든 것이 그림자극 <만석승놀이>(1983)다. 고선사 경봉의 증언을 토대로 했다. 연극계와 끈끈한 유대관계를 지 녔던 남천은 윤대성 대본의 <너도 먹고 물러나라>(1973, 실험극장)를 만들게 한주역이다. 창녀들이 불가피하게 자신의 낙태아를 공중변소에 버리는 행위와 무당의 푸닥거리를 이용해 전국의 사산아들을위령하는 굿판을 벌이는 연극이다.
남천은 필자에게 자신이 가장 힘들여 만든 작품은 <결혼굿> (1996)이라 밝혔다. 앞서 밝힌 아시아 1인극제는 1988년 대학로의 바탕골소극장을 시작으로 여러 나라에서 순차적으로 열렸다. 1996년부터는 공주 민속극박물관의 주최로 매년 펼쳐졌다. 그간의 모노드라마 체험을토대로 ‘공주 아시아 1인극제’에서 새로 선보인 것이 그의 <결혼굿>이다.
이 작품은 남북한 양쪽의 입장을 모두 조명한 점에서 발상의 신선함을 찾을 수 있다. 통일을 염원하며 통일전선에서 희생된 남북젊은이들의 사령(死靈)을 서로 만나게 해 부부로 만들자는 의도를 보여 주었다. 그의 공연은 인형을 오브제로 하과 1인 또는 소수가출연하는 극이며,무언극이 대부분이다. 시사적인 내용에 연기는 즉흥성을 위주로 한 신체극들을 주로 했다. 그가 시작한 만석승놀이와 아시아 1인극제는 2007년부터 거창에 거주하는 제자한대수에 의해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 글. 서연호,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