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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 국가행사로 떠나는 조선의 궁궐 여행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04-02 조회수 : 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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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궁궐에서 펼쳐진 170가지 국가행사들


조선의 국가경영은 다섯 가지 의례인 길례(吉禮), 가례(嘉禮), 빈례(賓禮), 군례(軍禮), 흉례(凶禮)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길례는 국가 제사에 관한 내용으로 조상신과 땅신을 모신 종묘제례와 사직제례, 공자와 우리나라 안향 등 성현을 모신 성균관 문묘제례, 역대 왕들이 잠든 능행 관련 배릉의(拜陵儀) 등 56가지에 달한다. 가례는 국가적으로 즐겁고 축하할 일을 다룬 행사로 왕실혼인을 비롯해 조참의(朝參儀, 대조회), 양로연의(養老宴儀), 왕세자책봉의식(冊王世子儀), 진연(進宴), 조하(朝賀), 문무과전시의(文武科殿試儀) 등 50가지다. 손님을 맞이하는 행사인 빈례는 이웃나라 국서를 받는 의식(受隣國書弊儀) 등 6가지이며, 군례는 대열의(大閱儀, 군사점검), 사우사단의(射于射壇儀, 활쏘기), 나례 등 7가지다. 국장에 관한 의례를 다룬 흉례는 성복의(成服儀)와 발인의(發引儀) 등 55가지다.
위의 예시를 종합하면 조선시대 궁궐을 중심으로 행해진 국가행사는 170가지에 달한다. 이처럼 수많은 인원이 참여한 대규모 행사부터 소규모 궁궐 일상의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흥미진진한 의례행사 재현은 궁궐 관광의 핵심이다. 
국가행사는 궁궐 내 각 단위 건축물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현재의 경복궁을 기준으로 보면 흥례문 앞 광장은 군사를 조련하는 장소로 사용됐다. 현재도 수문장 교대의식, 수문장 임명식, 첩종(疊鐘)이 열리고 있다. 본전인 근정전은 국왕의 탄일이나 정초에 백관들이 올리는 진하(陳賀)를 비롯해 조정의 대조회, 즉위의식, 왕실 혼인의례, 왕실의 각종 축하 잔치인 진연, 과거시험 등이 거행된 대표적 행사 공간이다. 뒤편의 사정전은 편전으로 불리던 공간으로 일일 조회인 상참의(常參儀) 장소였다. 경회루도 외국 사신이나 관료들을 위한 연회공간으로 활용됐다. 특히 동편에 위치한 자경전은 신정왕후 조대비(1808~1890) 관련 진작례(進爵禮) 등이 거행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파괴되고 의미를 왜곡당한 궁궐은 1980년대 중반부터 순차적으로 복원됐고, 2000년 이후에는 궁중행사도 20여 건 재현됐다. 대표행사로는 종묘대제(宗廟大祭), 사직대제(社稷大祭), 문묘제례(文廟祭禮), 세종대왕즉위의, 고종대 진찬연, 경회루 연향, 대조회인 조참의(朝參儀), 일일조회인 상참의, 숙종인현왕후가례의, 영조 대 오순어연례(五旬御宴禮), 왕비간택의(王妃揀擇儀), 왕세자회강(王世子會講), 외국공사 접견의례, 조선시대 궁성문 개폐 및 수문장 교대의식, 영조 대 대사례의, 수문장 임명의식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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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세자 교육과 관련한 기록화들

오늘날까지 이러한 국가행사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자료는 『조선왕조실록』과 『의궤』, 병풍 그림이 대표적이다. 이 중 가장 많은 기록은 가례와 관련된 것으로, 금년도 궁중문화축전에 즈음해 소개하고자 한다. 
중묘조서연관사연도(中廟朝書筵官賜宴圖)는 현재 전하는 궁중행사 기록화 중 가장 앞선 시기의 작품이다. 이 작품은 1534년 10월 6일 경복궁 근정전에서 중종이 왕세자의 『춘추』 수업 마무리를 기념해 교육을 담당한 서연관, 세자시강원 경연관, 춘추관원(春秋館員) 등 39명에게 내린 잔치 기록이다.
조선시대 왕세자 교육은 원자의 탄생과 더불어 강학청(講學廳) 설치, 서연(書筵), 성균관 입학의례, 관례(冠禮), 회강(會講) 등의 절차를 거쳐 군왕으로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소양과 전문성을 갖추는데 중점을 두었다. 중종은 군왕으로서 왕세자 교육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교육을 담당해 온 우의정 김근사(1466~1539) 등에게 잔치를 열어준 것이다. 이날 행사는 왕세자 교육을 담당한 관원들에 대한 예우 등을 고려해 국왕이 참여하지 않았음에도 정전인 근정전에서 행한 예이다.
행사장에는 서연관들이 흰 차일을 배경으로 무릎을 꿇고 국왕이 내린 어사주를 받고 있으며, 노란 배자를 입은 무희 둘이 춤을 추고 있다. 잔치가 한창 무르익은 모습이다. 특히 일부 서연관들은 이미 거나하게 술에 취해 부축을 받으며 행사장을 나서는 자연스러운 모습은 18세기 이후 도식화되기 이전 기록화의 특징이다. 
뒷산 백악마루를 배경으로 근정전 주변에 휘둘러진 회랑은 훌륭한 행사공간이자 공연장으로, 임란으로 불타기 전의 풍경이다. 왕세자입학도(王世子入學圖)는 1817년(순조 17) 3월 17일 순조의 맏아들인 효명세자①가 여덟 살 되던 해의 성균관 입학의례 행사기록이다. 왕세자는 궁궐 내의 세자시강원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인 성균관에 입학하는 의식을 하나의 의례형식으로 행한 것이다. 
그림 구성은 효명세자가 거처인 창경궁을 나서는 출궁의(出宮儀)부터 작헌의(酌獻儀-문묘의 대성전에서 공자의 신위에 술잔을 올리는 의식), 왕복의(往復儀-문묘의 명륜당 문 밖에 이른 왕세자가 당 안의 박사에게 수업을 청하는 과정), 수폐의[脩幣儀-박사의 입학 수락을 받은 왕세자가 저포(紵布), 술, 술안주를 든 집사자를 앞세워 당 안으로 들어가 박사에게 올리는 모습], 입학의(入學儀-명륜당 실내에서 박사가 왕세자에게 『소학』을 강학하는 장면), 수하의[受賀儀-입학례 이튿날 창덕궁 성정각(誠正閣)에서 왕세자가 신하들로부터 하례받는 의식] 등 여섯 장면이다. 그림 뒤에는 세자시강원 관원들이 왕세자의 성균관 입학을 축하하며 지은 찬시가 실려 있고, 마지막 면에는 그림첩을 제작한 경위도 기록돼 있다. 이 중 첫 면인 출궁의도(出宮儀圖)는 왕세자가 무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창경궁을 나서는 모습으로 질서정연하면서도 생동감이 있다. 관원들과 시위의장의 화려한 복식은 품격을 더해 주고 오른쪽 위의 활짝 핀 꽃들은 떠오르는 태양인 왕세자를 상징하고 있다. 



국왕과 조정 신하가 참여한 기사(騎射)와 제술(製述) 행사 기록화

명묘조서총대시예도(明廟朝瑞蔥臺試藝圖)는 1541년경으로 추정되는 시기의 행사 기록이다. 이날 행사는 명종이 창경궁 서총대에서 조정의 신하들을 모아 놓고 기사(騎射-말 타고서 활을 쏘는 것)와 제술(製述-문장을 짓는 것)을 행한 것이다. 조선은 문치주의를 표방했지만 군왕과 사대부들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덕목에 문장을 짓고 활쏘기를 포함하는 등 문무를 바탕으로 태평성대를 지향했음을 보여주는 좋은 기록이다. 한편 서총대는 본래 성종 대에 후원에서 한 줄기에 잎이 아홉이나 달린 마늘이 나온 것을 서총이라 이름하여 돌로 쌓아 기른 데서 연유한 것이다. 와룡산을 배경으로 설치된 행사장은 차일 아래 놓인 어좌로 국왕의 존재를 암시하고 있다. 좌우로는 문관으로서 이날 행사에 참여해 문무과를 석권한 남응운(1509~1587)을 비롯한 관료들이 좌우로 줄지어 앉아 있다. 뜰에는 이날 상으로 내린 어마 두 필과 하단 좌우에 국왕을 상징하는 붉은색 뚝과 교룡기도 펄럭인다. 화면 전체를 좌우에서 감싼 소나무는 상서로운 기운으로 국왕이 참여한 행사의 품격과 위엄을 더해 주고 있다. 이 그림은 18세기 이후 일반적인 궁중행사의 규격화된 형식을 벗어나 비교적 화면이 자연스럽고 규모도 그리 크지 않아 오늘날 관객들이 참여하는 방식의 행사로 재현해 보아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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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연회(宴會)와 관련한 기록화들

기사계첩(耆社契帖)은 숙종이 1719년(숙종 45) 4월 18일 기로신 11명을 초청해 경희궁에서 베푼 기로연의 기록으로 최근 보물 제929호로 지정됐다. 이 계첩은 기로신(耆老臣)인 문신 임방(任 , 1640~1724년)이 쓴 서문과 경희궁 경현당(景賢堂) 연회 때 숙종이 지은 글, 대제학 김유(金楺, 1653~1719년)의 발문, 각 의식에참여한 기로신 명단, 행사 장면을 그린 기록화, 기로신 11명의 명단과 이들의 반신(半身) 초상화, 기로신들이 쓴 축시(祝詩) 등 모두 50면으로 구성됐다. 기록화에는 어첩봉안도(御帖奉安圖), 경현당석연도(景賢堂錫宴圖), 봉배귀사도(奉盃歸社圖) 등이 포함됐다. 숙종이 내린 어첩에는 선왕(태조)의 뜻을 따라 기로소에 들어가 경연을 베풀고 참여한 기로신들에게 은잔을 하사한 기록이 있다. 
이 행사는 국왕이 경로효친을 몸소 실천함으로써 만백성의 귀감이 되게 하고자 국가통치의 일환으로 거행한 행사다. 어첩봉안도는 네 줄 횡으로 구성된 행렬반차도 형식이다. 맨 앞에 악공과 의장수를 앞세우고 어첩을 봉안한 중앙 가마 좌우와 뒤로 기로신하들이 말을 탄 채 따르고 있다. 행렬 주변에서 자연스럽게 구경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재미있다. 궁중기록화로는 보기 드물게 민초들의 모습을 그려 넣어 만민화친을 통한 대동사회의 구현이라는 당대의 사회 분위기를 잘 반영하고 있다. 
경현당석연도는 기로소에 도착한 기로신들이 숙종이 내린 잔치를 즐기는 모습으로, 차일과 덧마루 등으로 행사공간을 조성했다. 단상 아래 덧마루 좌우에는 기로신들이 숙종이 내린 잔칫상을 받고 있다. 화면 중앙에는 두 명의 무희가 향발로 추정되는 춤을 추고 있고 우측 하단에는 연이어 공연될 오방처용무를 위해 공연단이 입장하는 장면을 동시에 배치해 훨씬 생기 있게 행사장 모습을 전해 주고 있다. 이날의 행사는 국왕이 참여한 관계로 하단의 큰북을 비롯해 편종과 편경 등을 규모 있게 배치하고 있다.   기사년진찬도(己巳年進饌圖)는 1809년 순조가 자궁(慈宮-혜경궁)의 관례 60주년을 기념해 창경궁에서 옷감과 잔치를 올린 과정을 기록화한 것이다. 사도세자의 빈인 혜경궁은 1744년(영조20) 1월 가례를, 1749년 관례를 올린 것으로 기록돼 있다. 순조는 혜경궁의 관례 60주년이 돌아오기 전 수차례 존호가상(尊號加上)과 진하례(陳賀禮)를 올리고자 했으나 그즈음에 일어난 사직의 악기창고를 비롯해 창덕궁 선정전과 인정전의 화재, 신유박해와 을해박해, 홍경래 난 등으로 미루어졌다. 1808년 12월에 가서야 국왕이 하교를 내려 이듬해 1월 22일에 치사와 전문(箋文), 표리(表裏-옷감)를 올리고 2월 27일 경춘전에서 진찬례를 올리게 된다. 
이 그림은 오른쪽 위에서 내려다보는 관점이다. 중앙 상단의 교의에 앉아 있는 자궁을 상궁들이 둘러서 호위하고 있으며 우측 하단의 청선과 용문석으로 순조가 친히 참석했음을 알려준다. 이날 잔치는 비록 국왕이 참여했으나 내명부 여성들이 위주였다. 그러한 관계로 행사장 구성상 외부의 남성 악공들이 행사장 안을 들여다볼 수 없도록 발[염(簾)]과 천으로 구분지은 점이 국왕이나 왕세자 중심의 국가행사와 다르다. 경춘전 내부의 기둥과 발, 상궁들의 치마와 악공들의 붉은색 옷이 궁중 연향의 화려함을 한껏 돋보이게 한다. 이 행사 또한 조선이 지향한 유교덕목인 효를 국왕이 몸소 실천함으로써 만백성을 교화하고 더불어 어수선한 국내외 정세 안정을 기원하며 거행한 국가행사였다. 
지난 30년간의 복원 노력으로 경복궁을 비롯한 서울의 고궁들은 제모습을 찾았으며 내외국인의 문화관광, 체험의 장으로 발전했다. 궁궐은 매년 4~5월이면 궁중문화축전이 본격 진행돼 보고 즐길 행사들이 많아 활기가 넘친다. 다만 궁궐이 지속가능한 관광자원이나 역사 교육의 장으로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국가행사기록을 영상, 전시, 행사로 전환해 상시 지속적으로 관객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갈 필요가 있다.


 
 
- 글. 안태욱. 한국문화재재단 미래전략기획단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