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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 서울의 최고거주지, 관광지가 되다 북촌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04-02 조회수 : 3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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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북촌은 대체로 동으로는 창덕궁, 서로는 경복궁, 남으로는 종로, 북으로는 북악산과 응봉을 잇는 능선 안쪽 지역을 가리킨다. 조선왕조가 한양으로 천도한 이듬해인 1395년에 경복궁이 세워지고, 개성으로 옮겨 갔던 조정이 다시 한양으로 돌아온 1405년에 창덕궁이 건립되며, 1410 년대 전반 종로에 시전 행랑이 조성되면서 북촌은 그 지역적 범위가 확정됐다. 현재의 북촌한옥마을은 동서의 경계는 북촌과 같지만 남쪽은 율곡로를 경계로 하기 때문에 조선시대 북촌보다 그 지역적 범위가 좁은 편이다.

조선시대 북촌의 집터와 인구 규모

조선시대 북촌에 자리한 양반들의 집터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규모가 컸다. 1394년 10월 한양으로 천도하고 그해 12월부터 관청터와 더불어 집터를 분급하기 시작했다. 1품 35부(負)를 시작으로 5부씩 줄여서 2·3·4·5·6품은 각각 30·25·20·15·10부를 분급하고, 7·8·9품과 일반 서인(庶人)은 2부씩 줄여 각각 8·6·4·2부를 분급하게 했다.
1부를 대략 40평으로 본다면 1품은 1,400평을, 6품은 400평을, 일반 서인은 80평을 집터로 분급 받은 셈이다. 그런데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분급할 집터가 부족해졌다. 이에 분급할 집터 면적을 줄이는 조치를 취했고, 이는 『경국대전』에 반영됐다. 『경국대전』에서는 대군·공주에게는 35부(1,400평)를, 왕자군·옹주에게는 30부(1,200평)를, 1·2품에게는 15부(600평)를, 3·4품에게는 10부(400평)를, 5·6품에게는 8부(320평)를, 7~9품과 유음자손(有蔭子孫, 조상의 덕택으로 음직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는 4부(160평)를, 일반 서인에게는 2부(80평)를 주게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한양에는 1,000평이 넘는 대저택부터 수백·수십 평의 주택들이 들어서게 됐다. 
1789년(정조 13)에 발간된 『호구총수』에는 한양의 부(部)와 방(坊) 단위로 호수와 인구수를 기재하고 있다. 이 중 현재의 북촌한옥마을에 해당하는 6개 방의 호수와 인구수는 광화방 202호 692명, 양덕방 124호 908명, 가회방 252호 1,765명, 안국방 229호 1,275명, 관광방 652호 2,297명, 진장방 346호 1,578명으로 합계가 1,805호 8,515명이었다.

한편 1906년의 『한성부호적』에 기재된 동일한 6개 방의 호수와 인구수는 광화방 248호 1,243명, 양덕방 143호 982명, 가회방 355호 1,993명, 안국방 172호 845명, 관광방 612호 3,231명, 진장방 401호 1,947명으로 합계가 1,931호 1만 241명이었다.
양자를 비교하면 100여 년 사이에 호는 7%, 인구는 20% 정도 늘었는데, 큰 차이는 아니므로 대체로 조선 후기 이래 북촌한옥마을에 해당하는 지역은 1,800~1,900호에 8,000~1만 명 정도가 거주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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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이 노론 주거지가 된 과정

조선 말 우국지사 황현은 그의 저서 『매천야록』에서 “종각(鐘閣) 이북을 북촌(北村)이라 하는데 노론이 살고, 종각 이남을 남촌이라 하는데 소론 이하 삼색 당파가 섞여서 산다”라고 하여, 북촌 거주자의 당색이 노론임을 밝혔다. 그런데 조선 초부터 권력 핵심층이 북촌에 거주했는지는 의문이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정도전 집은 종로구청 자리에 있었고, 조준 집은 향교동, 즉 종묘 서쪽에 있었다. 김종서 집은 돈의문 밖에, 맹사성 집은 삼청동 꼭대기인 맹현(孟峴)에, 성삼문 집은 정독도서관 자리에, 박팽년 집은 남산골 한옥마을 초입에 있는 한국의집 근처에 있었다.
16세기 후반 선조 때 출현한 서인(西人)과 동인(東人)이란 붕당은 그 중심인물이던 심의겸과 김효원 집이 각각 한양 서쪽인 정동(貞洞)과 동쪽인 낙산(駱山) 아래 있었기 때문에 생긴 명칭이다. 즉 조선전기에 관원을 비롯한 양반들은 한양 안에 각자의 형편에 따라 집을 마련하고 살았고, 18세기 이후처럼 붕당에 따라 모여 살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어떤 이유로 권력 핵심층(노론)이 북촌에 집중적으로 모여 살기 시작했을까? 이 점은 조선후기의 붕당 간 대립 격화와 궁궐 경영 방식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잘 알다시피 선조 때 등장한 붕당은 17세기 후반 숙종 때부터 격렬하게 대립하기 시작했다. 동인에서 갈려 나온 북인은 일찍이 1623년의 인조반정으로, 남인은 1694년의 갑술환국으로, 그리고 서인에서 갈려 나온 소론은 1755년의 을해옥사를 통해 중심인물들이 대거 처벌을 받게 돼 18세기 후반부터 중앙정계는 노론이 완전히 장악하게 됐다.
또한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궐이 소실된 뒤 경복궁은 중건되지 못하고 창덕궁·창경궁만 중건되면서 국왕이 주로 창덕궁에 머물게 되자 핵심 권력층은 창덕궁과 가까운 북촌에 거주지를 마련하게 됐고, 이런 현상이 노론 득세와 맞물리면서 자연스레 북촌은 노론 거주지가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상태가 100여 년 지속되면서 황현 같은 북촌 인식이 나오게 된 것이다.
한편 19세기의 북촌에는 운현궁(흥선대원군) 감고당(인현왕후) 안동별궁(명성황후) 계동궁(대원군 조카 이재원) 사동궁(의친왕) 누동궁(철종 친형 영평군) 경우궁(순조 생모 수빈 박씨) 등과 같이 왕실 관련 인물들의 건축물도 매우 큰 규모로 자리하고 있었다.  



일제 식민지 시기 ‘도시형 한옥’의 확산과 학교 건립

1905년의 을사늑약과 1910년의 망국을 계기로 북촌에 거주하던 관료 출신들이 많이 떠났다. 나라가 실권을 상실하자 그들은 해직되고 일본인이 그 자리를 차지하면서, 봉급을 비롯한 관직과 연결된 많은 혜택이 사라지자 큰 집의 유지와 식솔들의 부양이 부담됐기 때문이다.  
1910년대 내내 25만 명을 유지하던 경성 인구는 1930년에 39만 명을 기록할 만큼 1920년대에 폭증했다. 3·1운동의 결과로 회사령이 철폐돼 회사·공장 설립이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뀜에 따라 회사·공장이 급증했고, 실력양성에 대한 인식이 높아져 북촌 인근에 각종 학교들이 건립되면서 지방 부유층을 중심으로 자녀 교육을 위해 상경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급증한 인구는 많은 도시문제를 야기했는데 그중 핵심은 주택 부족 현상이었다. 이때 정세권을 비롯한 건축업자들이 매물로 나온 대규모 필지를 소형(10 ~ 40평)으로 분할해 ‘도시형 한옥’ 을 서울 곳곳에 건립했다. 지금 우리가 보는 북촌의 삼청동·가회동·계동·익선동 등지의 한옥도 이때부터 등장해 1960년대까지 계속 지어진 것들이다.
한편 식민지 시기 북촌에는 각종 학교들이 건립됐다. 초등과정의 교동·재동·안동·계산보성·삼청·휘문 등 6개교, 중등과정의 경기고·중앙고·휘문고·경기여고·덕성여고·풍문여고·대동세무고· 창덕여고 등 8개교, 고등과정의 보성전문 1개교가 북촌에 자리하고 있어 통학시간이 되면 전차 정거장인 안국동 사거리로 학생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 학교 출신들은 3·1운동과 6·10만세운동 등의 독립운동과 사회단체에서 활발하게 참여했으며, 교육·언론·재계·학술·문화 분야에서 활동하며 근대화에 기여했다.   



1980년대 이후의 한옥 보존 노력과 관광지로의 변화

1968년에 발발한 1·21사태의 영향과 경복궁·창덕궁을 중심으로 한 문화재보호 정책으로 북촌 북쪽 일대의 개발이 억제된 것은 역설적으로 이 지역의 ‘전통’ 보존에 순기능으로 작용했다. 더욱이 1970년 말부터 본격화한 고도제한 및 한옥보존지구 지정 등의 정책은 이 지역 한옥이 1990년대 초반까지 그대로 유지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1987년 민주화운동 이후 주민들이 재산권 행사 의지를 강하게 표출하자 1991년 한옥보존지구 지정이 해제되고 고도제한 역시 16m로 높아졌다. 이에 2001년부터 난개발을 우려한 전문가, 시민단체, 서울시의 협력 아래 주민들의 합의를 바탕으로 해서 ‘북촌가꾸기사업’를 전개해 900여 채의 한옥을 보존하고 있다. 2010년 이후 젊은 세대와 한류 바람으로 외국 관광객이 급증하면서 북촌은 서울의 대표 관광지로 자리 잡았고, 지금은 오버투어리즘(Overtourism, 과잉관광)을 걱정할 정도로 국제적 관광지가 됐다. 

 

- 글. 김웅호. 서울역사편찬원 전임연구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