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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 왕실에 바친 술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04-04 조회수 : 2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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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에서의 술 제조와 관리
 
왕실에서는 진상용 어주(御酒)와 별도로, 제례용 술을 담아 특별 관리했다. 술은 오늘날의 위스키나 코냑처럼 보관 및 유통을 장담할 수 있는 안정적인 물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평소 쓰는 보통 술들은 궁중의 제반 음식을 만들어 내던 사옹원(司饔院)에서 담당했는데, 국가 행사용 제주(祭酒)와 임금이 평소 마시는 어주는 특별히 내의원(內醫院) 양온서(良醞署)에서 어의(御醫)들의 감독 아래 엄격하게 제조됐다. 조선 초기 양온서에서 제조한 대표적인 제주로 ‘법주(法酒)’가 꼽힌다. 법주는 술 빚는 날과 방법을 고도의 비법으로 특정해 두고 ‘법대로 빚은 술’이라 해서 얻은 이름이다. 그러다가 숙종 때 사옹원에서 일하던 참봉(參奉·종9품) 최국준이 경주로 내려가 법주를 빚어 인기를 누렸는데, 훗날 일제강점기와 군사독재 시절을 거치면서 멸절된 것을 후대에 되살린 것이 오늘날 ‘경주법주(慶州法酒)’로 유명한 ‘경주 교동법주(校洞法酒)’다(국가무형문화재 제86-다호). 알코올 도수는 16~18도로, 투명한 담황색 빛깔이 은은한 청주다.
1450년 문종 때에는 대놓고 ‘진상주(進上酒)’ 라 이름 붙인 술이 탄생한다. ‘진상주’는 당시 어의 전순의(全循義)가 집필한 요리전문서 『산가요록(山家要錄)』에 비방이 수록돼 전해지다가 지난 2013년 농업진흥청의 주도 아래 복원에 성공했다. 도수는 16~17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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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이 약한 왕족들의 웰빙 술
 
‘향온주(香醞酒)’도 양온서가 남긴 궁중주의 명품 가운데 하나다. 향온주는 누룩부터가 여느 술과 달랐다. 특별히 녹두를 재료로 만든 ‘향온곡(香醞麯)’이란 누룩으로 발효를 했다. 녹두는 누룩 반죽 및 발효 온도 등에서 상할 위험이 높고, 완성한 뒤에도 유지·관리가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그럼에도 양온서가 향온주를 놓지 못한 까닭은 녹두가 ‘스스로 독을 절감하는 제독(制毒) 능력’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술이 약한 왕족들을 위한 ‘웰빙주’ 였다고나 할까. 이후 향온주는 숙종 때 장희빈의 라이벌로 피눈물을 흘려야 했던 인현왕후 민씨의 외가를 통해서 전수되다가 1993년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9호로 지정돼 명주로 뿌리를 내리게 된다. 
그러나 양온서의 술만으로는 임금들의 다양한 술 취향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특히 태종과 세조, 연산군, 영조와 정조 등은 술고래로 꼽히는 임금들이다. 태종·세조·연산군은 피폐한 내면을 술로 달랬는데, 실록에 애음(愛飮)한 술 이름이 특정하게 전하지는 않는다. 
반면 세종은 술에 몹시 약했다. 술을 약의 일종으로 인식한 당시의 충신들이 걱정 끝에 세종에게 술을 권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여러 차례 보인다. “전하! 종묘와 사직을 위해 억지로라도 한 잔 드시고 성체(聖體)를 보전하시옵소서.” “아니야. 술은 내 체질이 아니야.” 그럼에도 마지못해 마신 술이 간신히 법주 반 잔이었다.[「세종실록」 4년(1422년)]  
 
 
 
우즈베키스탄 대통령을 감동시킨 솔송주
 
성종도 술에 약한 편이었다. 성종이 애용한 술은 경남 함양의 송순주(松荀酒/ 13도)였다. 소나무의 어린 순을 찹쌀 곡주와 함께 발효시켜 만든 송순주는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선비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가문의 가양주(家釀酒/ 민가에서 빚은 술)로, 정경부인 이씨가 직접 빚어 성종에게 진상했다. 지금은 이름이 ‘솔송주’로 바뀌었는데, 2017년 우즈베키스탄 대통령 방한 때 만찬에 등장해 인기를 끌었다. 영조도 술을 매우 즐긴 임금이었다. 영화 <사도>에서 보듯 영조는 우유부단하면서 이율배반적인 성품의 소유자였다. 이복사촌형인 선왕 경종의 독살 루머와 얽힌 스트레스를 술로 푼 것으로 보이는데, 그러면서 조선 역대 임금 가운데 ‘금주령’을 가장 강력하게 밀어붙인 모순을 보였다. 음주를 지적하는 신하들의 간언(諫言)이 반복되자 이를 물리치는 영조의 능청이 절창이다. “내가 목이 마를 때 간혹 오미자차를 마시는데, 사람들이 이를 소주로 오해한 것이다”[『영조실록』 12년(1736년)]. 영조가 즐겨 마신 술은 한양의 ‘송절주(松節酒)’였다. 삶은 물로 찹쌀·진득찰(국화과)·진달래·당귀·솔잎 등을 발효시킨 송절주(16도)는 1989년 서울시무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됐다. 
정조도 내로라하는 두주불사(斗酒不辭)로 강화 칠선주(七仙酒)를 애음했다. 감초·구기자· 당귀·사삼·산수유·인삼·칡뿌리 등 일곱 가지 약재를 섞어 발효시킨 칠선주는 16도와 42도, 두 종류가 있었다. 특히 정조는 ‘애정’하는 규장각 학사들에게 옥필통 가득 독주를 따라 돌리는 놀이를 즐겼다고 한다. 정조의 수석 장학생 다산 정약용은 이때의 충격으로 훗날 유배지에서 자식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그때 죽는구나 생각했다”라며 절대 금주를 당부했다. 이 밖에도 순조 때 진상된 용인 옥로주(玉露酒/ 구기자·송화·율무, 40도,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12호), 고종 때 진상된 홍천 옥선주(玉鮮酎/ 옥수수, 40도, 전통식품명인 제24호)와 1882년 제물포의 조미수호통상조약 때 외교 테이블에 올랐던 전주 이강주(梨薑酒/ 배· 생강, 25도, 전북 무형문화재 제6호) 등이 전설 같은 스토리를 남기고 있다.
또한 고종 때 명성왕후의 집안에서 빚어 진상했던 어주(御酒)는 ‘가야곡 왕주’(13도, 40도)라는 새 이름으로, ‘종묘대제’가 2001년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될 때 ‘지정 제주(祭酒)’ 로 함께 선정돼 새로운 전설을 써 가고 있다.
 
 
 
- 글. 송 준. 저널리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