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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 크메르사원건축의 성립과발전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06-04 조회수 : 17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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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메르 사원건축의 태동, 푸난과 첸라

앙코르 왕조가 시작되기 이전에도 크메르인들이 세운 고대국가가 두 곳 있었다. 먼저 기원 전후에 인도차이나반도 남부 메콩삼각주 지대에 성립된 푸난(Funan; 扶南) 왕국이다. 푸난은 인도와 중국 사이에 위치하여 ‘바다의 실크로드’라고 불리는 해상무역로의 가운데에서 해상 중계무역을 통해 성장한 나라이다.
푸난 왕국의 수도였던 앙코르 보레이 지역과 중계무역항인 옥에오(Oc-Eo)를 연결한 68㎞의 대규모 운하와 당시의 토층에서 출토된 로마의 황금동전 등 유구 및 유물을 통해서 교역이 융성했던 푸난의 사회상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푸난 왕국의 주된 교역 대상국 중 하나인 인도를 통해 크메르 사원건축의 바탕이 되는 인도의 종교 힌두교와 불교가 이 시기에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 국가는 푸난의 뒤를 이은 첸라(Chenla; 眞臘)이다. 장거리 항해 기술의 발전으로 중계무역항의 중요성이 떨어지자 푸난의 힘은 약해졌고, 내륙지방에서 부상한 첸라가 패권을 장악하였다. 첸라의 ‘수도 유적’으로 추정되는 삼보 프레이 쿡은 300기가 넘는 단일 사원이 밀집하여 구성된 복합사원유적이다. 사원은 주로 소성벽돌을 쌓아 건축하였으며, 큰 사원의 경우 높이연구원가 최대 20~30m에 이른다. 사원 내부에는 석재대좌와 힌두교 신상을 봉안하였고, 사원 외벽에는 회반죽으로 신들의 세상을 묘사하였다. 크메르 사원건축사에서 초기 건축에 해당하는 삼보 프레이 쿡에는 아직 인도의 영향이 많이 남아 있다. 묘사된 신의 얼굴이나 양식이 인도의 사원과 비슷한데, 특히 인도의 촐라(Chola) 왕조 초기에 건립된 마하발리프람(Mahabalipram)의 사원들과 매우 유사하다.



앙코르의 건국, 그리고 데바라자

802년 자야바르만 2세는 현재의 시엠립 지역을 중심으로 인도차이나반도 내륙부를 통일하고 기존의 두 왕국에 비해 훨씬 강력한 중앙집권왕국을 세웠다. 이것이 앙코르 왕조의 시작이다. 왕은 통치에 대한 당위성을 확보하기 위해 데바라자(Deva-Raja, 신왕사상) 의식을 거행하였다. 데바라자 신앙에 따르면 왕은 곧 신의 화신이다. 사원을 건설하는 것은 신을 위하는 동시에 자신과 자신의 조상을 위한 행동이 되었다.
이는 종교를 통한 통치의 당위성을 강화하는 정치적 행위였다. 신전의 건설은 신이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으로, 불멸의 재료(사암·벽돌 등)를 사용하고 조각을 통해서 천상의 아름다움을 담고자 하였다. 후대의 왕들도 데바라자 의식을 계승하고, 신전 건설 또한 대를 이어 계속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크메르 사원건축이 형성되었고, 앙코르 왕조의 번영과 더불어 더욱 장엄하고 정교해졌다.



신의 가호가 깃든 왕도 앙코르, 발전하는 크메르 사원건축

앙코르를 중심으로 한 앙코르 왕조는 점차 확장해 나갔다. 건국 이후 300년간 왕도 앙코르는 한 차례도 외세의 침략을 받지 않았고, 뛰어난 관개 기술을 적용한 농업으로 식량도 풍족하였다. 나라의 풍요와 더불어 신에 대한 크메르인들의 믿음은 굳건해져 갔다. 그만큼 왕도 앙코르에는 신을 위한 사원건축이 융성하였다.
크메르 사원건축은 다방면에서 깊이를 더해 갔다. 재료, 구조, 시공, 공간확보 등의 기술적 발전과 함께 당시 종교 사회상의 변화가 반영되었다. 벽돌보다 구하기 힘든 사암을 다량 이용하기 시작하였고, 개구부의 구조 개량으로 붕괴를 방지하였다. 또 사원 내부공간을 점점 확장해 나갔다.
종교 사회상의 변화는 사원의 공간구성에 반영되었다. 초기에는 신을 봉안한 주신전이 중심이 된 단순 밀폐형 구조였던 것과 달리 후대로 갈수록 점차 사원을 이용하는 승려와 참배객을 위한 공간(답도, 전실, 테라스, 회랑 등)이 발전하여 복합적인 건축형태로 변화하였다. 더불어 조각기술의 발전으로, 크메르 사원건축의 특징인 장식 린텔이나 부조 벽화가 등장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앙코르 왕국의 복합적인 발전 끝에 12세기 초, 크메르 사원건축의 완성형인 앙코르 와트가 탄생하였다.



왕도의 함락과 극복, 혁신

신의 가호가 깃든 앙코르도 영원하지는 못했다. 1177년 현재의 베트남에 기반을 둔 참파(Champa) 왕국의 군대에 의해 왕도가 함락되었다. 왕도 함락 후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자야바르만 7세가 등장하여 참파의 군대를 축출하였지만, 이때부터 크메르인의 신에 대한 신뢰가 금이 가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자야바르만 7세는 이러한 분위기를 극복하고자 사회 전반에서 혁신을 시도하였다. 우선 국교를 불교로 전환하였다. 이것은 기득권 세력의 축출을 의미한다. 이어 왕국의 외곽으로 뻗어가는 도로를 정비하고 전국에 의료시설을 확충하였다. 이렇게 내실을 다지는 것뿐만 아니라 국력을 되찾은 이후에는 영토를 확장하여 크메르 사상 최대의 영토를 확보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혁신은 크메르 사원건축에도 반영되었다. 앙코르 와트 건립으로부터 불과 반세기 차이밖에 나지 않지만, 사원건축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화하였다.
우선 불교가 국교가 되었기에 주신(主神) 또한 부처로 바뀌었다. 그리고 탑의 사면을 신의 얼굴로 장식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기존과 달리 단일 사원 안에 다양한 종교와 종파의 신들을 함께 모셨다. 이러한 크메르 사원건축의 변화상을 통해서 자야바르만 7세가 시도한 전후 사회의 재구성과 통합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자야바르만 7세가 죽은 후 크메르 사원건축은 급감하였다. 무리한 건축사업으로 국력이 쇠하였다는 의견도 있지만, 진랍풍토기 같은 당시 기록에 나타난 것처럼 앙코르 왕국이 자야바르만 7세 사후에도 약 200년 동안 건재하였던 것으로 볼 때, 크메르 사원건축이 더 이상 지어지지 않게 된 배경으로는 다른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당시 동남아시아 전역에 유행하던 상좌부불교가 앙코르에 유입되면서 기존의 신왕 사상이 약해지고, 영원불멸의 신전 건축 대신에 나무나 벽돌을 이용한 상좌부불교 사원건축으로 종교건축의 흐름이 바뀌었다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할 듯하다. 즉 종교 사회상의 변화로 크메르 사원건축이 막을 내렸다고 유추할 수 있다.


- 글. 사진. 박동희. 한국문화재재단 국제교류팀 연구원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