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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 제다(製茶)의 세계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06-04 조회수 : 2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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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의 성지 ‘일지암’과 차의 성인 ‘초의 선사’

지금 차를 공부하고 차생활을 즐기는 차인들은 땅끝마을 대흥사 산내 암자인 일지암을 차의 성지로 생각하고 참배한다. 일지암이 우리나라 차문화의 명맥을 잇고 중흥시킨 도량이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 초의 선사(1786~1866)가 있다.
그는 당대의 불교 사상가이고 선사이자 차인이다. 『초의시고』와 『일지암문집』 등의 문학작품들은 차와 선의 향기가 깊고 그윽하다. 『선문사변만어』라는 논문을 저술해 당시 선운사의 백파 선사와 치열한 논쟁을 일으켜 사상사에 활력을 심었다. 또한 초의 선사는 당시 강진에서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한 다산 정약용, 평생의 지기 완당 김정희, 그리고 24년 연하인 남도 남종화의 시조인 소치 허유 등 당대의 인문지성들과 교유하면서 학문과 문화를 꽃피우기도 했다. 조선 후기 실사구시의 풍토에서 다양한 분야에 뛰어난 초의 선사이지만, 무엇보다도 선사의 업적은 차문화의 중흥에 있다.



문헌 속 기록과 차의 종류

차는 외관상 식물에서 추출한 음료에 속하지만 그 맛과 효능이 특별하고 특출하다. 최초의 차서적인 당나라 육우의 『다경(茶經)』에 의하면 차는 고대 염제신농씨 때부터 마셨다고 한다. 『신농본초경』에는 ‘신농이 100가지 초목을 맛보다가 하루는 72가지 독초를 먹었는데 차를 얻어 해독했다’라고 기록돼 있다. 차가 몸을 보호하는 약용의 효능도 있음을 말하는 대목이다. 또 차를 마시면 사람이 힘을 얻고 마음을 정결하게 한다고 여러 차문헌에서 말하고 있다. 대략 기원전 2700년 전부터 애용된 차는 지금도 다양한 진화를 하면서 일상에 스며들었다.
그럼 무엇을 차라고 할까. 커피·모과차·유자차 등을 통틀어 차라고 하지만, 이는 편의상 하는 말이다. 정확하게 정의하자면 차나무에서 딴 잎으로 만든 것을 차라고 한다. 만드는 방법과 발효도에 따라 대개 여섯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녹차·백차·황차·홍차·청차·흑차를 말한다. 우리가 말하는 보이차는 흑차 계열에 속하고 오룡차는 청차 계열에 속한다. 차의 명칭은 지역에 따른 이름, 찻잎을 따고 만드는 시기에 따른 이름, 형태에 따른 이름 등 다양하게 부르고 있다.



‘차와 선은 하나의 맛’ 다선일미(茶禪一味)의 경지

차가 특별하고 특출한 음료인 것은 우선 그 맛과 효능이 훌륭하기 때문이다. 초의 선사가 “중국의 육안차는 맛이 뛰어나고 몽산차는 약효가 뛰어나다고 말하는데 우리나라 차는 이 둘을 겸하고 있다”고 말했듯이 우선 차는 맛이 있고 해독 작용을 하면서 치료에도 유익하다. 그러나 차가 특출한 점은 바로 정신세계에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불교적으로 차와 정신의 관계를 짚어 보면, 부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존재의 성립과 작용은 ‘연기하여 만들어진다’고 하셨다. 연기(緣起)란 여러 가지 원인과 조건이 서로 모여 만들어진다는 뜻이다. 가령 한 채의 집은 땅과 주춧돌, 기둥, 벽, 지붕 등이 서로 결합해 만들어진다. 한 톨의 곡식도 땅과 물과 바람과 햇볕과 미생물과 사람의 노동이 결합해 우리의 입으로 들어온다.
그럼 마음과 정신의 영역인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불교에서는 감각기관과 그 대상의 만남으로 정신의 영역이 탄생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감각기관 중 하나인 미각 기능은 어떨까? 오염된 음식을 먹으면 신체도 무너지지만 정신도 상쾌하지 못한다. 술을 과도하게 마시면 판단력을 상실하고 감정과 언행이 거칠어진다. 이렇게 우리의 마음과 정신, 감정과 언행 등은 그 무엇과의 만남에서 형성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차를 자주 마시면 어떤 감정이 만들어질까? 먼저 당나라 시대 노동(盧仝)이 노래한 칠완다가를 본다.


첫째 잔은 목과 입술을 적셔주고
둘째 잔은 번뇌를 달래주고
셋째 잔은 마른 창자를 헤쳐주니
오직 뱃속에는 문다 오천 권이 있을 뿐이다.
넷째 잔은 가벼운 땀을 내니 평생에 불평스러운 일
모두 땀구멍 향해 흩어지게 하네.
다섯째 잔은 살과 뼈대를 깨끗하게 하고
여섯째 잔은 신령스러운 기운을 통하게 하고
일곱째 잔은 마실 것도 없이 겨드랑이에 날개 돋아
시원한 청풍이 일어난다.



차는 이렇게 몸의 기운을 쇄신시킨다. 그리고 몸에 스며든 차는 정신의 세계를 청량하게 만들어낸다. 그래서 중국의 차인들은 정행검덕(精行儉德)을, 초의 선사는 중정(中正)을, 일본의 다도가들은 화경청적(和敬淸寂)을 말하며 차와 정신세계의 조화를 추구했다. 차가 본디 가지고 있는 성품이 맑고, 고요하고, 검소하고, 덕스럽고, 조화로운 정신세계와 조화되기 때문이다. 이런 경지가 바로 차와 선의 일치인 ‘다선일미’의 경지이고 다도(茶道)라고 말한다. 초의 선사의 차생활은 단지 목마름을 해소하고 졸음을 깨우는 단계를 넘어 맑고 깊고 조화로운 정신세계와 합일을 이룬 다도의 경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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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지암과 초의 선사, 인문지성·예술인과 교류하다

일지암과 초의 선사가 의미 있는 것은 단순히 차에 관한 책을 저술하고 차를 만들어 차생활을 했다는 외형에만 있지 않다. 다양한 교류에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다산을 비롯한 유학자들은 스님들에게 주역과 문장을 강의했고, 스님들에게 불경의 뜻을 물었다. 그리고 차를 매개로 시를 짓고 마음을 나누었다. 인문지성과 예술인들이 강진 백련사와 해남 대흥사, 일지암을 근거로 차를 나누면서 아름다운 정신의 향기를 나누었다. 특히 초의 선사와 완당 김정희의 평생 우정 또한 차를 매개로 이루어졌다. 완당이 초의에게 보낸 편지 중에 백미는 차를 보내 달라고 간청하는 내용이다.

“편지를 보냈건만 한 번의 답장도 받지 못했구려. 생각건대 산 속에 바쁜 일이 필시 없을 터인데 세상 인연과 어울리지 않으려 하여, 내가 간절한데도 먼저 금강으로 내려가 버리시는 겐가? 다만 생각해 보니 늙어 머리가 다 흰 나이에 갑작스레 이와 같이 하니 참 우습구려. 기꺼이 양단간에 사람을 딱 끊기라도 하겠다는 겐가. 이것이 과연 선(禪)에 맞는 일이오? 나는 대사는 보고 싶지도 않고, 대사의 편지 또한 보고 싶지 않소. 다만 차에 얽힌 인연만은 차마 끊어 없애지 못하고 능히 깨뜨릴 수 없구려. 이번에 또 차를 재촉하니 보낼 때 편지도 필요 없고, 단지 두 해 동안 쌓인 빚을 함께 보내되 다시 지체하거나 어긋남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마조의 고함소리와 덕산의 몽둥이를 받게 될 터이니, 이 한 번의 고함소리와 몽둥이는 수백천 겁이 지나도록 달아날 도리가 없을게요. 다 미루고 줄이오.”

격조와 애틋한 정이 넘치는 글이다. 이렇게 초의와 완당, 다산과 혜장 스님은 차를 앞에 놓고 사상을 논하고 풍류를 즐겼다. 혼자서는 무심과 무위의 적정삼매에 젖어들고, 여럿이는 정담을 즐기는 풍류가 다도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정신과 향기가 깃든 곳이 해남의 대흥사와 일지암, 강진의 사의재와 다산 초당, 백련사다.



- 글. 사진. 법인 스님. 일지암 주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