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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 고대인의 거울 동경(銅鏡)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07-31 조회수 :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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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동경(銅鏡)’의 종교적·주술적 기능
 
동경(銅鏡)은 청동기시대 후기, 청동주물 제작기술이 발달하면서 등장한다. 동판의 면을 다듬고 마연(磨硏)해 얼굴을 비추는 경면(鏡面)을 만들었다. 뒷면에는 끈을 매달 수 있는 뉴( )를 만들고, 뉴 주변으로 부귀와 평안을 바라는 길상문(吉祥文)이나 길 상구(吉祥句)를 장식했다.

고대인들에게 거울은 용모를 비추기 위한 실용적 기능의 도구라 기보다는 신과의 소통을 위한 상징적 도구였다. 일찍이 중국 고 대 상나라(商, 기원전 1600~1046년경)의 여장군이자 제사장으 로 기록된 은허(殷墟) 부호(婦好)의 무덤에서 동경 5점이 출토된 예가 있다. 일본에서는 3세기 대 소국을 통일한 야마타이국(耶 馬台國)의 히미코(卑 呼)가 아버지에게 태양을 상징하는 거울을 받았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 이러한 기록들은 거울이 고대 제 사 의례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말해 준다.

동경의 형태는 원형으로, 태양과 달을 상징한다. 또 세밀하게 베 풀어진 집선문(集線文) 거치문(鋸齒文) 번개문(雷文) 등의 무늬 는 빛의 방사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일부 유물에서 경면 이 닳아 있거나 타격흔이 관찰되는 것에 대해서는 거울을 문지 르고 두드려 청아한 소리를 내는 행위를 통해 신과 교감하려 했 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거울의 주술적 기능은 오늘날까지 무속신앙을 통해 이어져 내려 오기도 하는데, 제주도에 ‘울쇠’라고 전해지는 무속악기(巫俗樂 器)가 바로 그 예이다.



한반도의 ‘동경(銅鏡)’
 
한반도에서 동경은 기원전 4~5세기를 전후한 시기부터 확인된 다. 가장 빠른 형태는 거울에 두 개 이상의 고리나 꼭지(뉴)가 달 린 다뉴경(多 鏡)이다. 그중 거울의 문양면에 선문과 원문 등을 세밀하게 장식한 다뉴세문경(多 細文鏡)은 기원전 3세기경부 터 1세기까지 한반도와 일본 일부 지역에서만 확인돼 세형동검 (細形銅劍)과 함께 한국식 청동기로 불린다.

다뉴경이 부장된 무덤은 부장유물의 양이 일반묘와 확연히 구분 되는데, 이는 차별화된 부와 권위를 가진 개인이 등장했음을 의미 한다. 기원전 4세기경 고조선의 왕을 칭하는 기록이 있으나, 한반 도에서도 삼국시대 성립 이전까지는 제사장과 무리의 수장이 그 권력의 일정 부분을 공유한 형태가 지속됐을 것으로 보는 데는 이 견이 없다. 적어도 청동방울과 청동거울 등의 의기와 비파형동검, 세형동검 등의 무기류가 함께 부장되는 시기에는 제사를 주관하 는 자와 무리의 지배자가 동일한 존재일 가능성이 높다.

이전의 동경이 제의를 위한 기물로서 종교와 정치권력 일치의 상징물이었다면, 기원전후한 시기에 한반도 남부, 특히 영남지 방에서 출현하고 있는 한경은 한발 더 나아가, 축적된 경제력과 권력을 바탕으로 한 ‘신진 문물 유입과 교역’의 상징물이었다. 기원전 108년, 한무제에 의해 위만조선이 멸망하고 고조선 지역 에 한사군(漢四郡)이 설치되면서, 한반도 남부에도 한(漢) 대 문 물이 대량으로 유입된다. 대표적 유물 중 하나가 바로 ‘한경(漢 鏡)’이다. 한대는 중국에서 가장 많은 동경이 제작되는 시기로, 중국 동경의 전성기로 불린다.

한반도에서 출토되는 한경은 크게 전한경(前漢鏡), 후한경(後漢 鏡)으로 나뉜다. 전한경은 성운문경(星雲文鏡 : 별자리 모양과 유사한 문양이 있는 거울), 이체자명대경(異體字銘帶鏡 : 명문이 주문양대(主紋樣帶)를 이루는 거울), 훼룡문경( 龍文鏡 : 문양 대에 역S자형의 간략화된 용문이 있는 거울) 등이 알려져 있다. 영남지방에서 출토된 한경은 이체자명대경의 하나인 일광경(日 光鏡)이 대다수를 차지하는데, 낙랑을 통해 유입된 한대 화폐와 청동종·청동단추 등과 함께 출토된다.

일광경은 뉴를 중심으로 8엽의 호선문(弧線文)을 연속적으로 돌 리고, 가장자리에 명문을 배치한 거울이다. 명문은 ‘見日之光 天 下大明-해의 빛이 드러나면 천하가 크게 밝아질 것이다’ ‘見日 之光 長不相忘-해의 빛이 드러나면 길이 서로 잊지 않을 것이다’ 등이다. 이 문구의 각 글자 사이에는 나 ‘◇’ 등의 기호가 배 치돼 있다. 이러한 문구들은 군주에 대한 충성을 기리는 내용으 로 해석되는데, 당시 태동한 권력자들의 힘과 당위성을 은유적 으로 과시하기에 적절한 위세품(威勢品)인 셈이다.

기원 후 1세기 후반부터 낙랑(313년) 멸망까지는 후한경인 연호 문경(連弧文鏡)과 박국경(博局鏡) 등이 수입되고, 한반도에서는 중국의 한경을 모방해 제작한 방제경(倣制鏡)이 본격적으로 등 장한다. 그러나 후한경과 방제경이 무덤에서 출토된 예는 김해 양동리, 내덕리 일대 목곽묘(木槨墓)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확인 되지 않는다. 3세기에는 제철 및 제련 기술이 널리 보급되면서 한반도에서 본격적으로 철제 무기류(武器類)와 마구류(馬具類) 가 생산된다. 이 시기에는 각지에서 강력한 철제 무기를 바탕으로 주변 소국 들을 통합하는 세력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 철기가 무덤 주 인의 힘을 상징하는 주요 부장품으로 대체되면서, 청동거울을 비롯한 청동기류는 종교적 의기의 기능은 물론이고 권력 과시를 위한 위세품으로서의 성격도 점차 퇴색된다.

삼국시대 이후에도 청동거울과 철제거울이 무덤에서 출토되기 는 하나 이전의 거울과는 달리 화형·능형·방형 등으로 형태가 다양해지고, 아름답고 화려하게 제작됐다. 이로써 고대 거울이 가지던 종교적·주술적 기능은 일부 특수한 신분에게만 전래됐 을 뿐 대부분 사라지고, 생활용구인 화장구의 기능만 남게 된 것 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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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탑동의 ‘동경(銅鏡)’
 
한국문화재재단에서 국비지원 소규모 발굴 사업을 전담하면서, 비록 협소한 면적에 대한 발굴조사이지만 고고학적으로 중요하 게 평가받는 유적이 다수 조사됐다. 그 대표적 유적이 경주 탑동 21-3·4번지 유적이다. 이 유적은 경주 시내에서 처음으로 수장 급 무덤이 조사되면서 당시 신라 건국 세력의 존재가 확인됐다 는 점으로 크게 주목받았다.

이 유적을 시작으로 경주 탑동 일대에서는 천원마을의 진입로를 따라 모두 8개의 연속된 필지에 대해 소규모 발굴조사가 진행됐 다. 그 결과 삼한시대 목관묘(木棺墓), 삼국시대 목곽묘(木槨墓), 적석목곽묘(積石木槨墓), 석곽묘(石槨墓) 등의 분묘 80여 기가 조사됨으로써 대규모 고분군이 조성된 지역임이 밝혀졌다. 이들 분묘 중 1세기 대 분묘인 목관묘는 3기만이 조사됐고, 그중 2기 에서 동경 3점이 출토됐다. 일광경이나 방제경이 원형으로 무덤에서 출토된 예는 경주 조양 동 38호, 울산 창평동 2호, 밀양 교동 17호, 창원 다호리 119호, 경 산 양지리 목관묘 1호 정도로 매우 한정적이다.

1호와 2호 출토품 모두 손상이 심하나 주문대에 ‘見日之光 天下 大明’의 명문이 확인된다. 모두 일광경으로 전한경의 시기에 따 른 변화에 비춰 보면 2호의 일광경이 조금 빠른 형태로 보인다. 1호에서는 방제경 1점이 일광경과 뒷면이 겹쳐진 채로 출토됐 다. 방제경은 대구 평리동 출토품이나 영천 어은동 출토품과 함 께 방사선계 방제경으로 분류되며, 탑동 목관묘 출토품을 포함 해 총 3점만 확인됐다. 뉴 주변으로 ‘主’ 혹은 ‘王’ 자와 ‘井’자 등 의 단일 문자를 반복적으로 배치한 문양 구성이 매우 유사해 동 일한 시기에 유행한 거울로 보인다.

경주 탑동 목관묘는 종교와 정치권력이 동일한 사회에서 고대국 가로 태동하는 과도기에 만들어졌다. 1세기 대는 경주 동쪽의 조 양동·죽동리·구정동과 서쪽의 탑동·사라리, 멀게는 영천 어은 동이나 경산 양지리·임당, 울산 창평동 등에서 수장급의 묘가 확 인되는 시기다. 이들 유적은 각각 10~15㎞ 떨어져 위치해 각 세 력의 반경은 대략 20~30㎞일 것으로 추론하고 있다. 이 분포 지역은 현재 대구-경주-울산으로 이어지는 교통로 선상과 정확 하게 일치한다. 당시 무덤에 부장된 한경(漢鏡)과 청동 장신구 등의 외래수입품 은 정치적·종교적 권위, 대외관계를 과시하는 상징물이다. 이와 함께 부장된 철제 무기 및 마구류, 옻칠된 목기와 부채 등도 재료 와 제작기술의 한정성 때문에 이를 소유한 사람의 무력과 경제 력을 과시하는 중요한 공헌품이었다.

우리는 이들 유적의 존재를 통해 교역과 유통에 유리한 요지를 차지한 정치세력이 중국제 물품을 유통하고, 한편으로는 방제경 이나 철기를 생산했음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경주 탑동 의 1·2호 목관묘와 출토 유물들은 경주 중심지 내에서도 정치· 경제적 권력을 가진 존재가 성장하고 있었음을 확인시켜 준 계 기가 됐다. 결국 이 정치세력은 사로국과 신라로 성장하는 중심 세력이 됐을 가능성이 높아 그 의미가 크다.



- 글. 사진.최진녕. 한국문화재재단 문화재조사연구단,조사연구3팀 부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