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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 소규모 유적에서 확인한 신라의 황금문화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07-31 조회수 : 1782
하단 내용 참조 해당 번호 1.


신라 귀금속 장신구의 흐름
 
우리 역사에서 귀금속 장신구로 대표되는 황금 문화가 성행한 기간은 삼국시대 약 200년(기원후 4~6세기) 동안이다. 신라 황 금에 대한 이방인들의 기록은 삼국시대 신라 귀금속 장신구에 대한 기억을 옮긴 셈이다. 삼국시대 사람들은 장신구를 망자(亡 者)와 무덤에 안치한 부장품(副葬品)으로도 선호했다.
장신구를 고분(古墳)에 부장하는 장례 풍습은 고구려·백제·신 라·가야 모두 유행했다. 그중 가장 많은 금관(金冠) 5점(황남대 총 북분, 금관총, 금령총, 서봉총, 천마총 금관)이 신라 왕경 경 주(慶州)에서 발굴된 사실은 신라에서 귀금속제 장신구 문화가 강하게 발현됐음을 알려준다. 희귀성 높은 귀금속으로 만든 장 신구는 소유자의 신분과 지위를 과시하는 위세품(威勢品) 역할 을 했다.
동4~6세기 신라는 마립간(麻立干)의 시대였다. 금관과 순금 허리 띠는 마립간 집단 중 최상위층만을 위한 전유물이었다. 그 아래 지배층에는 순금보다 격이 낮은 금동과 은으로 만든 장신구가 허용됐다.
신라 귀금속 장신구 문화는 5세기 후반~6세기 전반 질적·양적 절정기에 도달한다. 경주 황남대총 북분 금관(국보 제191호), 금 관총 금관(국보 제87호), 금령총 금관(보물 제338호), 서봉총 금관(보물 제339호), 천마총 금관(국보 제188호)이 연달아 사용된 신라 금관의 대성행기다. 6세기 신라는 마립간에서 왕(王)의 시대(503년)로 변모한다. 마 립간 시대가 저물며 그들의 상징물인 귀금속 장신구도 종언을 맞이한다. 이후 신라 황금문화는 새 사상인 불교 공예품으로 탈 바꿈해 사찰, 금동불상과 사리 제작으로 이어진다.



소규모 유적지에서 발견된 귀금속 귀걸이와 허리띠
 
귀걸이(耳飾)는 인류가 오랫동안 애용한 장신구로 우리 역사에 는 신석기 시대부터 옥(玉) 귀걸이가 등장한다. 삼국시대로 접 어들면서 귀금속 귀걸이가 유행한다. 포항 마산리 유적에서 4 세기 중반 사용한 순금 귀걸이가 발견됐다. 신라 초기 단계 귀 걸이로 가느다란 금 봉(棒)을 동그랗게 말아 만들었으며 겉면 에 장식이 없는 소박한 모양이다. 그러다 5~6세기를 거치며 신 라 귀걸이는 점차 화려해진다. 경주 황남동 231·232번지와 인 왕동 815-1번지 유적, 황남동 95-4번지와 탑동 20·20-6번지 유 적에서 발견된 귀걸이는 절정기에 도달한 6세기 신라 귀걸이의 세련미를 가감 없이 뽐낸다.
5세기 전후 등장한 초기 신라 귀금속 허리띠는 장식판에 식물 이파리(葉文), 용과 봉황 무늬(龍鳳文)를 새겼다. 5세기 중반 허 리띠 장식 무늬는 세 잎 무늬(三葉文)로 변화해 이웃한 고구려· 백제·가야와 차별되는 신라 고유 양식으로 자리매김한다. 금 허리띠 장식을 만들기 위해서는 금관보다 많은 금이 필요하다. 금관과 금 허리띠는 신라 지배층 중 최상층만이 소유할 수 있는 전유물임을 짐작하게 한다. 그 아래 계층에는 은제 허리띠 장식 이 허용됐다.
경주 대릉원(慶州 大陵苑)은 거대한 신라 고총(高塚)이 옹기종 기 들어선 곳이다. 대릉원 한편에 자리한 황남동 231·232번지 와 95-4번지 유적에서 은제 허리띠가 발견됐다. 허리띠는 네모 모양 은장식판 30여 점이 망자(亡者) 허리를 감싼 모습이었다. 6세기 중반 신라 허리띠 장식은 일대 변화를 맞이한다. 귀금속 보다 구하기 쉽고 주조(鑄造)에 적합한 동제 허리띠가 등장한 다. 이후 신라는 선진 문물인 중국 당(唐)의 허리띠 장식을 받아 들인다.



2. 신라 굵은 고리 귀걸이(순금, 6세기 전반).경주 탑동 20·20-6번지와 황남동 95-4번지에서 발굴된 굵은 귀걸이는 신라 장신구 중 가장 화려한 유물로 평가된다.

신라 귀금속 장신구의 재회(再會)
 
오늘 우리는 신라 귀금속 장신구와 신라 황금을 다시 만난다. 재회는 유적지 발굴에서 시작된다. 경주 대릉원의 거대한 신라 고분에서 국보와 보물로 지정될 만큼 수려한 장신구가 발견된 다. ‘좁은 면적의 매장문화재 발굴 유적지’란 뜻의 소규모 유적 (小規模 遺蹟) 발굴에서도 국보와 보물 못지않은 신라 장신구 가 종종 발견된다.
땅 속 유물을 현실로 소환한 책임은 고고학자 몫이다. 현재 고 고학계에서는 삼국시대 귀금속 장신구를 당대 사회 구성원의 신분과 지위를 표상하는 위세품, 그들의 정체성을 공유한 물품 등으로 설명한다. 세상 사람들이 전시된 신라 황금 유물을 볼 수 있기까지 많은 이들의 노고가 필요하다.
영원히 땅 속에 묻혀 있을 뻔한 신라 장신구와 문화재의 가치를 세상에 알리는 과정은 소규모 유적지 발굴조사에서 시작된다. 작은 면적의 소규모 발굴이지만 그 가치와 중요성은 결코 작다 고 할 수 없다.



- 글. 사진.김재열. 한국문화재재단 문화재조사연구단,조사연구1팀 부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