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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 상업과 대중문화 그리고 유행의 중심지 명동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07-31 조회수 : 3294
하단 내용 참조 해당 번호 2


명동 변화의 시작, 임오군란과 청나라 군대의 진주
 
명동은 1882년 임오군란 때 청나라 군대가 한양에 진주하면서 변 화가 시작됐다. 군사 3,000명을 이끌고 들어온 오장경(吳長慶)과 그를 이은 진수당(陳樹棠)·원세개(遠世凱)는 현 중국대사관 자리 에 중화회관과 상무공서(商務公署)를 건립하는 한편 청나라 상 인의 세력 확장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리하여 청나라 상인들이 명동을 비롯해 을지로·소공동·남대문로 일대에 상점을 마련하 고 한양 상권을 잠식해 나갔다. 중국대사관을 중심으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서울 화교의 근거지는 이때 마련된 것이다.


명동 변화의 시작, 임오군란과 청나라 군대의 진주
 
명동은 1882년 임오군란 때 청나라 군대가 한양에 진주하면서 변 화가 시작됐다. 군사 3,000명을 이끌고 들어온 오장경(吳長慶)과 그를 이은 진수당(陳樹棠)·원세개(遠世凱)는 현 중국대사관 자리 에 중화회관과 상무공서(商務公署)를 건립하는 한편 청나라 상 인의 세력 확장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리하여 청나라 상인들이 명동을 비롯해 을지로·소공동·남대문로 일대에 상점을 마련하 고 한양 상권을 잠식해 나갔다. 중국대사관을 중심으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서울 화교의 근거지는 이때 마련된 것이다.


식민지 시기, 유흥과 금융의 거리 명동
 
1885년경 왜성대 근처에 자리 잡은 일본인들은 진고개(충무로) 를 중심으로 상업 기반을 마련하고 점차 남대문 쪽으로 세력을 확대하고자 했지만 청나라 상인에게 밀리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청일전쟁(1894)과 러일전쟁(1904)에서 승리하면서 한반도에서 일본의 패권이 확실해졌다.

이에 일본인들은 충무로 입구에 일본영사관·일본우편국·일본 경찰서·거류민역소(居留民役所)를 건립해 남대문로와 명동으로 향하는 진지를 구축하는 동시에 종고개(鐘峴)와 남대문로 주변 토지도 대거 매입하며 세력을 넓혀 갔다. 영사관은 병탄 후 경성 부청으로 사용되다가 미쓰코시(三越)백화점이 들어섰고, 1915년 우편국 자리에 새로 세워진 경성우편국은 조선은행(1912)·경성 부청(미쓰코시백화점)과 더불어 선은전(鮮銀前) 광장의 한 축을 형성했다. 남대문로와 을지로에는 조선상업은행(1911)·조선식산 은행(1918)과 경성전기주식회사(1928), 동양척식주식회사(1910) 등 경제 침탈의 선봉에 선 은행·회사들이 세워졌다.

1920년대 중반부터 본정(충무로)과 남대문로에 대규모 백화점도 들어섰다. 본정의 히라타(平田) 상점이 1926년 히라타백화점으 로 확대됐고, 조지아(丁子屋)도 1929년 현 롯데 영플라자 자리에 본점을 증축하고 백화점을 개업했다. 미나카이(三中井) 오복점도 1929년 점포를 증축해 미나카이백화점이 됐고, 미쓰코시는 1930 년 점포를 옛 경성부청 자리로 옮겨 미쓰코시백화점을 건립했다. 이들 백화점은 종로에 자리한 박흥식의 화신백화점과 더불어 경 성의 5대 백화점이 됐다.

명동 외곽을 지나는 도로도 확장 개통됐다. 1912년에 대한문과 광희문을 연결하는 현 을지로가 개수·확장돼 남촌의 대표 가로가 됐으며, 명동 동쪽에 을지로와 연결된 현 삼일대로 일부도 개통 됐다. 1899년 처음 등장한 전차도 도로를 따라 명동 일대로 연결 됐다. 1912년에는 현 을지로에 황금정 노선이 신설됐고, 1915년에 는 창경원~황금정 4정목 사이의 전차 노선이 본정까지 연장됐 다. 도로의 확장과 개통, 전차 노선의 신설이 일본인 거주지 위주 로 단행된 것이다.

1930년대 명동은 문화와 유흥의 거리이자 먹자골목이기도 했다. 1923년 명동에 후타미(二見)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다방 이 출현한 후 명동과 본정 일대에 다방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기면 서 다방 문화가 형성됐다. 러시아식 다방 트로이카, 독일풍 다방 윈, 고갱의 작품 이름에서 연유한 노아노아, 음악다방 에리사·휘 가로, 배우 강석연이 운영한 모나리자 등이 명치정과 본정의 유 명한 다방들이었다.

당시 다방은 단순히 차만 마시는 곳이 아니라 차를 마시며 음악 을 감상하고 때로는 전시회와 콘서트가 열리는 문화공간이기 도 했다. 영화를 상영하는 낭화관(浪花館), 연극을 공연하는 명 치좌(明治座, 현 명동예술극장)도 명동에 자리했다. 특히 1935년 1,000명 이상을 수용하는 대규모의 명치좌가 들어서면서 명동은 본정을 제치고 경성 문화예술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재즈를 틀어주고 양주와 맥주가 나오며 여급(웨이트리스)들이 시중들던 카페와 바(bar)도 명동에서 다수 영업을 했다. 여급이 50명에 달한 마루비루(丸びる)와 경성 제일이라는 평을 받던 기꾸미즈(菊水)가 명동에 자리한 유명 카페였으며, 리라·마이홈 등 의 바도 영업하고 있었다.

명동에는 각종 음식점도 즐비했다. 봉래각·중화점 등의 중국 요 리점, 에도가와(江戶川) 등의 일본 요리점, 치요다 그릴과 하나츠 키(花月) 같은 서양 요리점 등이 대표적 음식점이었다. 다리야 과 자점, 명치제과, 구옥(龜屋)과자, 백목단(白牧丹) 등의 과자점이 명동 아래쪽의 본정 일대에 자리했고 오뎅가게도 성황을 이뤘다. 또 명치좌 북쪽(현 명동아르누보센텀오피스텔 자리)에 경성주식 현물취인시장(京城株式現物取引市場, 1922)이 들어서고, 그 주변 에 증권회사와 전당포·무진회사(금융회사의 하나)들이 생겨나 자 그 일대에는 늘 주주 매매꾼들이 북적였다. 이들을 대상으로 한 음식점과 여관, 카페와 바 등의 영업도 활성화됐다.


1950~1980년대, 문화와 예술, 패션과 금융의 거리 명동
 
화려하던 명동 거리는 6·25전쟁으로 초토화됐지만, 1958년 마무리된 토지구획정리사업을 통해 명동의 가로가 현재의 모습을 갖 추게 됐다. 1960년대에는 건물 규모가 대형화됐는데, 이때 지어 진 사보이호텔(1957) 메트로호텔(1959) 세종호텔(1966) 유네스코 회관(1967) 한국전력사옥 별관(1968) 대연각호텔(1968) 등은 지 금까지도 남아 있다. 또한 명동아동공원 자리에 들어선 제일백 화점(1967, 유투존 → M플라자)과 명동 입구의 코스모스백화점 (1970, 아바타 → 눈스퀘어)도 개명과 리모델링을 거쳐 현재까지 명동의 랜드마크 구실을 하고 있다.

문화예술인들이 휴전 후 되돌아오면서 명동의 다방과 술집은 전 성기를 누렸는데, 박인환·오상순·변영로·조병화 그리고 ‘명동백 작’으로 불리던 이봉구 등이 대표적 인물이었다. 당시 모나리자와 동방살롱은 단순히 차를 파는 다방이라기보다는 종합예술공간이 라 할 정도로 그곳에서 문화예술인의 교류와 활동이 활발했다.

그러나 1970년대 초반 시작된 강남 개발, 높은 땅값과 임대료, 경 제불황 등의 영향으로 명동의 다방과 술집들이 다동·무교동·강남 등으로 옮겨가면서 문화와 예술의 거리라는 명동의 이미지는 빛이 바래기 시작했다. 명동 문화예술의 상징이던 국립극장(시공 관)이 1973년 장충동으로, 남산의 KBS가 1976년 여의도로 옮겨간 것은 이런 경향을 가속화했다(명동 시공관은 2009년 명동예술 극장으로 재개관). 대신 1970년대 명동은 히피문화의 영향을 받 아 장발에 청바지를 입은 젊은이들이 심지다방, 오비스 캐빈, 금 수강산, 쉘부르 등의 라이브 음악다방과 비어홀에 모여 송창식· 이장희·김세환 등의 포크송 가수가 들려주는 통기타 음악을 듣 고 맥주를 마시는 젊은이의 거리로 변화했다.

1950년대 말부터 명동은 한·국제양장사·노라노·송옥·아리사 등 의 양장점·양복점·양화점 등이 자리하며 전국의 패션과 유행을 선도하는 지역이 됐으며, 1970년대 중반에는 ‘살롱화’라 불리던 고급 구두가 유행하기도 했다. 기성복 시장이 점차 세를 넓혀 갔 지만 1980년대 말까지도 사람들은 양복을 맞추기 위해 명동을 방문하곤 했다. 식민지 때와 마찬가지로 명동 일대는 은행과 증 권사 등이 포진한 금융가였고, ‘제3금융권’이라 불리는 사채업자 들도 왕성하게 활동했다. 1977년 남대문로 확장으로 사라진 ‘달 러골목’은 암거래상의 영업공간이었다. 1979년 증권거래소의 여 의도 이전 이후 명동 금융업은 주춤해졌지만 쇠퇴의 결정적 계기 는 1997년 불어닥친 외환위기였다.


하단 내용 참조
민주화 운동의 중심지, 명동
 
명동은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의 성지이기도 했다. 1972년 박정희 정부가 유신헌법을 선포하자 민주주의를 회복하려는 움직임도 본격화했는데, 그 중심에 명동성당과 YWCA회관이 있었다. 1973 년 정의구현사제단을 결성한 것을 시작으로, 1976년 3·1절 기념 미사에서 재야인사들이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했으며, 1979년 10·26사건 후 유신세력의 정권 재창출 시도에 맞서 YWCA회관 에서 결혼식으로 위장한 반대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1987년에 는 정의구현사제단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은폐 시도를 폭로해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에 불을 댕겼으며, 시민들의 참여 속에 명 동성당을 중심으로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는 시위가 지 속돼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명동성당은 학 생운동, 노동운동, 빈민운동 등 사회민주화 운동의 거점 역할을 수행했다.


1990년대 후반 이후, 대한민국 최고의 쇼핑거리로 성장
 
1990년대 중반 이후 명동은 자가용 승용차를 이용하지 않는 10 ~20대와 외국인 관광객을 타깃으로 삼으면서 중저가 상품을 판 매하는 매장이 주류를 이루게 됐다. 젊은 층이 주된 고객으로 떠 오르자 이들을 겨냥한 논노·유투존 등의 대형 멀티숍이나 눈스 퀘어·밀리오레·M플라자 등의 대형 복합 쇼핑몰도 들어섰고, 자 라·갭·H&M·유니클로 등의 해외 SPA 브랜드가 속속 입점하고 있다. 더욱이 2000년대부터 일본인과 중국인을 비롯한 외국 관 광객이 폭증하면서 명동은 하루 수백만 명이 보행하며 쇼핑하는 거리로 성장했다.


- 글. 김웅호. 서울역사편찬원 전임연구원. 문학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