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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 2020년 새해는 경자년 쥐띠해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12-02 조회수 : 16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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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 속 쥐 이야기
 
집 모양 토기가 신라와 가야 지역에서 여러 차례 출토됐는데, 그중 가야 지역에서 출토된 창고형 고상 가옥에 쥐와 고양이가 장식돼 있다. 곡식 창고에 올라오는 쥐 두 마리를 노려보고 있는 고양이의 모습으로 보아, 예나 지금이나 곡식 창고와 뒤주의 주인은 쥐였나 보다. 그리고 그 쥐를 잡는 것 역시 고양이였던 같다.
통일신라 이후 쥐는 십이지의 하나로 능묘, 탑상, 불구(佛具), 생활용품 등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신라 진덕왕릉 주위에 부조된 십이지는 엄숙한 의례용 갑옷에 천의를 입고 있는데, 그 중 정북방을 담당하는 자상(子像)은 다른 십이지에 비해 단아 한 형태의 갑옷과 부드러운 천의를 입고 있다. 또 흥덕왕릉의 십이지에서는 자상만이 유일하게 천의를 입고 있다. 고려시대 이후에는 무덤 현실 내부에 벽화로 그려진다. 개풍군 수락암동의 석실 고분벽화에 그려진 십이지 신상은 문관의 복색을 하고 있고, 그 관모 위에 쥐가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또 파주 석곡리 고려 벽화묘에도 십이지 신상을 네 벽에 그려 넣어 무덤을 수호하게 했다. 고분 문으로 들어가자마자 맞은편(북벽)에 인물상이 있고, 그 인물상 관모 위에 쥐의 머리 부분이 그려져 있다.


쥐를 화폭에 담다
 
조선시대 그림 중에는 쥐의 생태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그림이 제법 있다. 쥐그림은 들에서 수박이나 홍당무를 갉아 먹고 있는 모습 등 재미있는 주제의 포착과 서정 넘치는 표현, 아름다운 색채감각이 돋보이도록 그렸다. 신사임당(申師任堂)의 ‘수박과 쥐그림’이 대표적이다. 수박의 빨간 속살과 그 앞에서 씨앗을 먹고 있는 쥐 한 쌍, 나비 등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또 겸재 정선(謙霽 鄭敾)의 서투서과(鼠偸西瓜)에서는 쥐가 수박을 갉아 먹고 있고, 심사정(沈師正)의 초충도첩(草蟲圖帖)에서는 쥐가 당근을 먹고 있다. 최북(崔北, 1720년경)의 그림도 심사정의 그림과 유사하게, 쥐의 생태와 습성을 사실적으로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수박은 씨가 많다. 씨가 많다는 것은 다산과 풍요를 의미한다. 여기에 더해 ‘다산 왕’인 한 쌍의 쥐는 부부 사랑과 다산, 풍요를 나타낸다. 무와 당근은 《시경 詩經》 제1편 국풍 곡풍(國風 谷風)에 보면 부부의 백년해로를 상징한다. 무는 아래와 위를 다 먹을 수 있다. 쥐가 수박이나 무와 함께 그려진 그림은 부부애와 다산의 상징으로 읽어야 한다.


쥐는 미래를 예언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권제9 혜공왕 5년조에 보면 “치악현에서 8,000여 마리나 됨직한 쥐 떼가 이동하는 이변이 있고 그해 눈이 내리지 않았다”라는 글이 있다. 쥐는 자연의 이변이나 닥쳐올 위험을 예감하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다. ‘쥐가 배에서 내리면 폭풍우가 온다’는 속담이나 ‘쥐가 없는 배는 타지 않는다’는 속담들도 쥐의 이런 신통한 능력을 얘기하고 있다. 17세기에 대서양을 횡단하던 배에서 수천 마리의 쥐 떼가 부두로 내려왔다고 한다. 선장은 배에서 쥐에게 시달리지 않아도 돼 좋아했지만, 그 배는 이틀 뒤에 바다에서 폭풍을 만나 가라앉았다. 폭풍우를 미리 알고 쥐가 배에서 빠져나온 것이다.
폭풍우 외에 집의 붕괴를 예견한 설화도 있다. 옛날 어느 부잣집에 쥐가 아주 많았다. 하인들은 쥐를 잡으려고 사방에 덫을 놓았다. 주인은 살려고 태어난 짐승을 함부로 죽일 수 없다며 쥐덫을 모두 치우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수백 마리의 쥐가 서로 꼬리를 물고 집 밖으로 나갔고, 사람들도 그것을 보기 위해 집 밖으로 나왔다. 그 순간 갑자기 집이 폭삭 무너졌다, 결국 쥐가 사람을 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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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는 다산왕
 
고구려에 추남이라는 용한 점쟁이가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왕비가 음양의 도를 거슬러 그 징후가 나타날 거라는 점괘를 냈다. 왕과 왕비가 크게 노했고, 상자 속에 들어 있는 쥐의 수를 정확히 맞히면 살 것이나 그렇지 못하면 죽음을 면치 못할 거라고 했다. 추남은 여덟 마리가 들어 있다고 답했지만 상자 속에는 한 마리만 있었다.
그는 죽으면서 반드시 신라의 장군으로 태어나 고구려를 멸하겠다고 맹세했다. 왕은 기이한 생각이 들어 쥐의 배를 갈라보게 했는데, 그 안에는 일곱 마리의 새끼가 있었다. 그제야 점괘가 맞는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추남은 이미 죽은 후였다. 추남이 죽던 밤 고구려 왕은 신라 서현공(김유신의 아버지) 부인의 품속으로 들어가는 꿈을 꾸었다. 왕은 후환을 없애기 위해 백석을 보내 김유신을 고구려로 유인해 죽이려 했지만 실패했다. 이런 이야기가 가능한 것은 왕성한 쥐의 번식력 때문이다. 쥐는 생태적으로 언제나 임신이 가능해 새끼를 배고 있다. 즉 언제나 임신이 가능해 실제 수를 맞히기가 어렵고, 그것은 결국 다산의 상징으로 통했다.


쥐 잡고 풍년 들었네
 
쥐는 생태학적으로 번식력이 왕성하다. 12지의 자(子)는 동음인 자(玆, 滋)와 연결돼 ‘무성하다’에서 ‘싹이 트기 시작한다’는 뜻으로, 싹트려고 하는 ‘만물의 종자’라는 다산(多産)의 상징이 된다. 그리고 이 다산은 풍요기원으로 확장됐다. 농경 사회에서는 매해 풍년을 기원하는데, 쥐 관련 풍속을 통해 풍년을 기원하던 선조들의 마음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다산의 상징으로서 쥐에게 빌었다기보다는 쥐의 구제를 통해 풍년을 기원했다.
정월대보름 전날 밤에 농가에서는 쥐불놀이를 한다. 쥐불에는 논둑·밭둑의 잔디와 잡초를 태우는 쥐불놓기와 이웃 마을의 사람들과 어울려서 불싸움하는 쥐불싸움이 있다. 이날 마을의 아이들은 미리 횃불을 만들어 두었다가 저녁 때 달이 떠오르면 논둑·밭둑·냇둑에 불을 놓았다. 또 정월의 첫 번째 쥐날을 ‘상자일(上子日)이라 한다. 이날은 농부들이 논과 밭두렁에 쥐불을 놓는데, 이렇게 하면 해충을 제거할 수 있고, 불에 탄 재가 거름이 돼 땅을 기름지게 한다. 게다가 잡토를 깨끗이 태우듯이 쥐도 불과 함께 없어지라는 의도가 담겨 있다.
쥐를 쫓는 풍속으로 유월 유두 농신제 때 쥐에게 지내는 고사가 있다. 영호남에서 다소 한가한 때인 6월 유두에 밀떡이나 송편을 만들의 농신제를 지낸다. 그때 논둑에 꽂았다가 아이들에게 나눠 주기도 하지만, 그냥 뚝뚝 떼어서 논에 버리기도 한다. 떡을 논 가운데 던져 놓아 여러 해충들이 모이면 그것을 주워 태웠다. 구충을 통한 풍년의 염원이 담긴 것이다.
강강술래 놀이의 한 대목에 쥔쥐새끼놀이는 들쥐들의 모의 행렬이다. 들쥐들이 논두렁을 기어갈 때 반드시 어미가 앞에 서고 새끼들은 그 뒤에 꼬리를 문 듯 일렬로 뒤따른다. 그 모습을 본뜬 쥔쥐새끼놀이는 앞사람의 허리를 껴안고 일렬로 늘어선 대열의 맨 앞사람이 맨 끝의 어린이를 잡아 떼어내는 놀이다. 끝 사람을 잡았을 경우 “잡았네, 잡았네 쥔쥐새끼를 잡았네, 콩 하나, 팥 하나 땡겼드니 콩차두 팥차두 됐네”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돌아다닌다. 들쥐를 잡았더니 콩 하나가 콩 한 되 되고, 팥 하나가 팥 한 되 됐다는 내용의 풍년기원이다.


부자가 되고 싶다면
 
옛날 어느 마을에 한 부부가 살았다. 도둑질을 생업으로 하는 남편이 낮잠을 잘 때 코에서 팥알만한 생쥐 한 마리가 기어 나왔다. 이를 바느질하던 그의 처가 보고 다리미, 잣대, 다림질판 등으로 길을 터 주었다. 그러자 생쥐는 황금더미 속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그래서 나중에 잘 살았다. 이것은 혼쥐 설화의 내용으로 부를 상징하는 쥐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보통 쥐는 훔친다는 이미지가 강해 지탄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반대로 근면과 저축으로 칭찬을 받기도 한다. 쥐는 아무리 딱딱한 물건이라도 앞니 하나면 어떻게든 구멍을 만들어 낸다. 고도의 인내심과 근면성을 떠오르게 한다. 또 쥐는 부지런히 먹이를 모으는 습성 때문에 재물을 지키는 존재로 여겼다. 그래서 ‘쥐띠가 밤에 태어나면 부자로 산다’는 말이 생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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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천진기. 국립전주박물관 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