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소식

월간문화재

[2021.2.] 기획특집 1. 연등회의 역사와 전승현황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1-03-15 조회수 : 1628

기획특집 1. 연등회의 역사와 전승현황_자세한 내용 하단참조

기획특집 1. 연등회의 역사와 전승현황_자세한 내용 하단참조


연등회, 경계를 허물고 

세계인의 축제가 되다


한국의 대표 불교행사인 연등회가 지난해 12월 16일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이로써 연등회는 우리나라 스물한 번째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라는 영광을 안게 됐다. 천 년의 역사를 뛰어넘는 축제로 자리한 연등회 등재 소식은 국적과 인종, 장애의 경계를 넘어 문화적 다양성을 보여주는 인류 유산의 가치로 인정받아 더욱 의미 있게 다가왔다.


인류무형문화유산에 이름을 올리다


연등회가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다는 것은 연등회의 문화적 가치를 세계가 인정한다는 의의가 있다. 이로써 한국 전통문화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는 국위 선양의 기회가 되고, 연등회에 대해 재인식하고 보존·전승하는 태도에도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연등회가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 여러 효과가 있다. 우선 무형문화유산 목록에 등재되면 협약에 따라 전문 기구를 통해 유산보호에 필요한 재정 및 기술지원을 받을 수 있다. 대표목록에 등재되면 국제적인 지명도와 관심이 높아지면서 이와 관련된 다양한 산업에도 영향을 주고 외국인 관광객을 유치하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

한 것은 그 유산을 보유한 국가와 국민, 관련 공동체의 자긍심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끝없는 재창조로 발전해온 연등회


국가에서 국가무형문화재를 지정할 때 중요하게 관찰하는 요소는 역사성, 학술성, 예술성이다. 역사성은 전통성을 말하며 원형을 어떻게 잘 보존하고 있는가를 관찰한다. 여기서 전통이 곧, 원형이라는 개념은 자칫 오해를 가져오게 된다. 전통은 과거의 것을 한 치의 틀림도 없이 그대로 재현하는 원형 고수가 아니라, 시대상을 반영하면서 창의적으로 발전하는 진화의 모색이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문화는 박제된 화석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화의 생명력은 창조적 전승력에서 나온다고 말할 수 있다. 연등회가 1300년이 넘도록 명맥이 끊어지지 않고 살아남은 바탕에는 시대마다 요구하는 내용을 창의적으로 수용하여 변용하는 능력을 갖췄기 때문이다. 유네스코에서도 무형유산을 정의하는 협약 제2조 1항에서 ‘세대와 세대를 거쳐 전승하면서 역사 변천과정에서 공동체 및 집단을 통해 끊임없이 재창조’ 되는 특징을 강조하고 있다. 


연등회가 우리 역사에서 처음 보이는 것은 866년(경문왕 6년)이다. 『삼국사기』에 보면 “왕이 황룡사에 행차하여 연등을 보고 백관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는 내용이 있고, 890년(진성왕 4년)에도 비슷한 내용이 전해진다. 황룡사는 553년(진흥왕14)에 지었으므로 경문왕이 황룡사에 간 때는 300년이나 지난 뒤의 일이다. 그러므로 경문왕 때 연등을 처음 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그 이전부터 연등풍속은 있었을 것이다. 

고려는 불교국가였다. 고려 태조 왕건은 ‘훈요십조’에서 연등회와 팔관회를 빠짐없이 하라는 유훈을 남겼다. 그러나 얼마 뒤 연등과 팔관회에 징발과 부역의 폐해가 크다는 이유로 중단된 적이 있었다. 다시 현종 때 연등회를 복원하고 ‘소회일’과 ‘대회일’로 나누어 진행했다. 오늘날 연등회에서 ‘소연등회’와 ‘대연등회’로 나누어 진행하는 것은 이러한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고려 문종 때(1073) 기록을 보면, “가두에 이틀 밤 동안 3만 개나 되는 등불을 밝히고, 여러 관아에서는 저마다 채단으로 장식한 다락을 설치하고 풍악을 잡혔다”고 하여, 그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여기서 채단으로 장식한 채붕은 산처럼 높다랗게 만들어서 산붕이라고도 하는데, 단을 만들고 오색 비단으로 화려하게 꾸민 무대를 가리킨다. 이 무대에서 솟대타기, 탈춤, 가무희 등 백희잡기를 열었다.

조선왕조는 억불숭유를 정책으로 삼았으므로 불교를 탄압하여 연등회와 팔관회 같은 불교 관련 행사는 축소되거나 철폐됐다. 그러나 신라부터 고려를 거쳐 오면서 연등회는 이미 세시풍속으로 자리 잡아 쉽게 단절시킬 수는 없었다. 척불은 신흥 유학자들의 주장일 뿐, 현실적으로 궁궐에도 내불당을 두었고 비빈들의 예불은 이어졌다. 문인들이 번화가인 종로에서 관등놀이하는 모습을 보고 쓴 시문이 많은 것도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 홍석모의 『동국세시기』에는 종로에 인파가 몰려다니고 등을 파는 집이 많은데 집마다 긴 장대를 세우고 가족 수만큼 수박등, 거북등처럼 온갖 형태의 등을 내걸었다고 한다.


근세에 이르러 일본이 침략하여 식민통치를 할 때도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꺼려 총독부 주관으로 통제해 연등회를 열었다. 광복 후 연등회는 다시 활성화되어 1966년부터 ‘연등축제’라는 명칭으로 행사가 다채롭게 열렸다. 1968년부터 사월초파일은 ‘부처님오신날’을 공식 명칭으로 쓰기 시작했고, 1975년부터 국가 공휴일로 지정됐다.


희망의 불빛 연등회, 설행(設行)의 현장


연등회는 지난 2012년 국가무형문화재 제121호로 지정됐다. 한 가지 유념해야 할 것은 문화재로 지정한 연등회가 서울에서 열리는 연등회만을 지정한 것이 아니다. 전국적으로 지방에서 열리는 모든 연등회도 포괄하여 문화재로 지정했다는 사실이다. 지방 사암연합회에서 개최하는 연등회를 보면 저마다 자기 고장의 특징을 내세운 개성적인 연등회로 구성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유네스코에서 연등회를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한 것도 한국 전역에서 열리는 연등회를 대상으로 했음은 말할 나위 없다. 현재 연등회는 1988년부터 초파일 한 주 앞선 주간을 봉축기간으로 정하여 토·일요일에 여러 가지 축제를 벌인다. 연등회는 소연등회와 대연등회로 구분해 진행한다.


소연등회는 전야제 성격으로 연등장엄과 연등놀이로 구성된다. 연등장엄은 대연등회가 열리는 동국대 운동장에 관불의식을 행할 탄생불인 아기부처를 봉안하고 무대를 장엄한다. 연등놀이는 사물놀이패를 앞세우고 대형 장엄등을 선두로 인사동을 돌아 조계사로 돌아온다. 이어서 우정국로에 설치된 무대에서 각종 공연과 놀이를 벌인다. 북청사자놀음, 마당극, 외국 연희단의 공연 등 해마다 상황에 따라서 내용을 조금씩 변화시키며 진행한다. 고려시대 소연회에서 벌인 줄타기, 솟대놀음, 산대희 같은 전통을 계승한다는 의미가 있다. 대연등회는 연등법회, 문화마당, 연등행렬, 회향마당으로 구성된다. 문화마당은 우정국로에 부스를 설치하고 등 만들기, 선화 그리기, 염주 만들기, 선 체조, 지화 만들기 등 주로 직접 참여해 체험하는 형태로 구성된다. 


연등회 주간에는 소연등회와 대연등회 말고도 광화문에 초파일을 알리고 경축하는 장엄 등을 세우고 사부대중이 다 함께 모여 점등식을 갖는다. 청계천과 봉은사에도 여러 형태의 등을 장식하여 경축 분위기를 돋운다. 


미래를 지향하는 연등회의 발걸음


세계가 주목하는 문화유산이 된 만큼 이제 무엇보다 연등회 계승발전을 위한 제도적 보호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다행스러운 것은 ‘연등회보존회’가 있어서 문화재 지정 이전부터 체계적으로 잘 관리해온 점이다. 다만, 국제화·세계화를 위해서 지금보다 더 적극적으로 외국에 홍보자료를 배포하고 관광객을 유치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외국인 등 만들기 대회를 비롯해 스리랑카, 네팔, 티베트, 몽골, 일본 등 동남아시아 불교국가들이 각국의 불교를 소개하는 등 세계화 마당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연등회는 고려시대에도 국제적 축제로 관심을 받아왔다. 『고려사』에 보면 의종(1147~1170년)때 왕이 연등을 꾸미고 행차하는데, 서역의 안국기(우즈백) 40명, 고창기(투루판) 16명, 천축기(인도) 18명이 참가해 가두행렬을 벌이며 다채로운 공연을 펼쳤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연등회는 역사적으로나 규모 면에서, 또 볼거리에서도 외국의 축제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연등회는 벌써 1300년이 넘는 축제로 자리 잡았는데, 수많은 세계 축제 중에서 1000년이 넘는 축제는 없으니 가장 유래가 오래된 축제로 볼 수 있다. 

축제에는 축제를 상징하는 캐릭터나 문화상품, 스토리텔링 등 관련 콘텐츠 개발도 중요한 만큼, 연등회와 관련된 다양한 산업의 활성화와 국내외 관광자원을 개발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글. 김용덕(한양대학교 명예교수, 성보문화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