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소식

월간문화재

[2021.2.] 기획특집 4. 연등회 전승 활성화와 향후 과제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1-03-15 조회수 : 1288

기획특집 4. 연등회 전승 활성화와 향후 과제_자세한 내용 하단참조

기획특집 4. 연등회 전승 활성화와 향후 과제_자세한 내용 하단참조


해마다 지천으로 피는 

들꽃이어라 


연등회가 유네스코 문화재로 등재된 2020년은 한국 문화계에 더없이 경사스러운 해였으며 세계 인류문화에 기여할 수 있는 의미 있는 해였다. 우리는 얼마 전 일본의 군함도에 대한 문화재 지정을 둘러싼 많은 논쟁과 어지러움을 보았다. 이와 달리 한국의 연등회가 유네스코 문화재로 등재되기까지 타종교나 타국가의 방해가 전혀 없었던 것은 연등회의 아름다움을 더욱 빛나게 해 준 것으로 우리 문화의 자긍심을 드높였다.


아이덴티티의 뿌리를 깊여라


유네스코에 연등회가 등재되는 경사스러운 일을 맞아 연등회와 비슷하거나 관련이 있는 다른 나라의 축제가 얼마나 있는지 궁금해진다. ‘랜턴 페스티벌(lenten festival)’을 검색해 보면 우선 중국과 대만의 종추지에(仲秋節), 시우이에(十五夜)를 비롯해 갖가지 축제들이 줄을 잇는다. 티베트에도 정월 보름의 다양한 등불축제가 있는가 하면 일본은 초친(提?), 오봉(お盆), 토로(燈龍)에서 히로사키의 눈축제에 이르기까지 많은 등축제가 있다. 베트남을 비롯한 동남아의 불교국가들은 부처님오신날, 성도일 등, 주요 불교기념일이 모두 음력 보름이므로 그로 인한 등축제가 수없이 많다. 뿐만 아니라 인도·유럽·미주·아프리카까지 불빛을 향한 축제를 보면 마치 불을 향해 날아드는 나방과도 같다. 


정보가 발달한 시대이다 보니 서로 남의 것을 베끼는 일도 허다하다. 한국의 연등에 자신들 색깔의 액세서리를 덧붙여 원조보다 더 현란한 결과물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그렇다면 많고도 많은 온 세계의 랜턴페스티벌 가운데 이것은 ‘한국 연등회’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이를 위해서 우선 역사성과 전통의 뿌리를 튼튼히 해야 한다. 이미 보존회 학술회의를 통하여 사료들이 축적돼 있지만 거의 비슷한 내용이 중첩되는 경우도 있다. 앞으로는 선행연구에서 더 깊고 더 넓게 폭을 넓히는 차별화된 연구가 이뤄져야 한다. 이로써 우리네 연등회만의 고유성과 역사성에 대한 탄탄한 자료들을 전 세계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세계 언어로 알리는 작업이 필요하다. 또한 연등회의 제반 설행들이 이러한 자료들에 충실하도록 끊임없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평가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흐르는 강물에 봄마다 새잎을 틔우는 나무와 같이


유구한 역사를 지닌 연등회는 반복 지속되는 역사성과 전통의 무게가 있다. 지속과 변화의 해답을 한 그루의 나무에 견주어 보자. 동네 어귀에 천년을 넘게 자라며 마을 사람들의 쉼터가 되는 나무의 뿌리는 땅속에서 끊임없어 뻗어 나가고 있고, 그의 그루터기에서 자라는 기둥은 늘 그 자리에 있다. 기둥은 해가 갈수록 차근차근 나이테를 더하며 튼실해지지만, 가지의 나뭇잎은 해마다 봄이 되면 새잎을 틔운다.


연등회도 그간 이러한 역할을 부지런히 수행해 왔다. 매년 맞이하는 연등회는 모두가 야외에서 행해지다 보니 비가 오면 비를 맞아야 하고, 태풍이 불면 바람을 견뎌내야 했다. 특히 연등회가 행해지는 시기는 겨울에서 봄이 오는 시기이므로 날씨의 변화와 불안정함은 언제나 있는 항수다. 다행히 그간의 여정을 보면, 바람이 불다 가도 잦아들고, 비가 오다가도 햇살이 비추는 등 이변과 기적이라 할 정도로 날씨의 은덕을 많이 입었지만, 황사와 비와 바람을 피하지 못했던 때도 더러 있었다. 그럴 때면 비에 젖지 않도록 깃발에 비닐을 씌우고, 연등 잎에 기름칠하는 등 갖는 묘수들이 발휘됐다.


비바람과 같은 외적인 요소와 더불어 사회 환경의 갖은 일들도 연등회와 함께했다. 일제가 떠나간 황량한 시절 조계사 주변을 돌았고, 여의도에서 조계사까지 걸으며 용맹정진을 하고, 지하철 공사로 사정이 어려워지자 동대문으로 출발지를 옮기며 시절마다 그에 맞는 행렬을 벌여왔다. 세월호 참사를 겪었을 때는 그 빛을 가리어 가족과 이웃을 잃은 사람들의 슬픔을 담아 위령의 회심곡과 재례를 열어 위로했다. 이러한 과정에 특정한 종교행사라는 저항과 불평을 듣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그에 맞서기보다 이 등불의 출발점이었던 불교라는 빛의 농도를 낮추며 그들을 향해 품을 열었다. 수십 년간 수많은 풍파를 만나도 멈추는 일이없었는데, 코로나를 맞은 2020년은 연등회 최초로 행렬을 멈추는 결단을 했다. 이러한 결단이 있기 하루 전날까지도 연등회에서는 전국을 돌며 행여나 하는 마음으로 연등을 만들고 있었다. 곳곳에서 만들어온 연등은 조용히 자신들의 거실로, 이웃의 등불로, 아이들의 책상 위로 옮겨 걸며 코로나로 인한 치유와 사회적 거리두기의 등불로 대신했다.


앞으로 연등회는 어떤 온고지신의 기획으로 운신의 폭을 넓힐 수 있을까? 연등회가 새로운 생명의 잎을 피우는 데는 인위적인 아이디어는 필요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세상은 언제나 변화무쌍하기에 그 변화무쌍한 세상에 대한 소통과 공감의 세포가 죽지 않도록 깨어 있으면 묘안은 샘솟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올해 연등회는 과연 가능할 것인가? 만약 올해도 못 하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두 가지 경우의 수를 모두 준비해야 할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부탁하자면 매년 그 시절의 어지러움이나 아픔에 대한 위로, 사회갈등과 혼탁에 대한 청량한 메시지들을 그해의 주제로 삼아 해마다 새로운 강물이자, 봄마다 새로 돋는 나무 잎사귀와 같은 주제가 있으면 좋겠다. 


온 세상이 내 친구, 어깨동무를 하자


일본의 군함도와 같이 타인의 아픔을 딛고 선 유적은 그 형세가 아무리 기암괴석이나 거대 찬란한 모양새라도 씁쓸한 뒷맛은 어찌할 수가 없고, 가슴 한 켠에 삐죽이는 부끄러움을 피할 수가 없다. 그러한 점에서 어떤 종교나 어떤 나라에서도 연등회의 문화적·인류애적 가치에 반기를 든 사람이 없었다는 것은 연등회의 가장 큰 자랑이다.


연등회가 문화재가 되기까지 수많은 사람이 흘린 땀이 있었지만, 그 땀방울이 단지 한국이라는 역사와 전통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 세계 누구라도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진선미의 결실이었음은 아무리 강조해도 과하지 않은 미덕이다. ‘연등회’라면 많은 사람이 TV에서 보여주는 화려한 연등 행렬을 떠올린다. 그러나 연등회가 진짜 축제라는 것은 연등 행렬이 있기까지 일 년 내내 등을 만들어온 사람들, 행렬 앞에 행해지는 연희 한마당, 그리고 행렬 뒤에 행해지는 갖가지 공연과 참여 마당에서 실감하게 된다. 조계사 일대에 차들이 멈추고, 전 세계 사람들이 맛나는 음식을 나누고, 함께 문화쇼핑을 하며 노래하고 춤추며 어울려 놀 수 있는 놀이마당은 모든 사람들이 세계 문화 유람의 주인공이 되게 한다. 


연등회의 행렬과 놀이마당, 연희율동을 참여해 보면 문화 위화감이나 배타성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이 그냥 저절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보존회 측에서 기울여온 여러 노력을 보면, 내국인들보다 외국인들의 참여 소감, 희망 사항에 대한 끊임없는 설문조사를 통해 그들의 목소리를 최대한 수용해왔다. 그만큼 세계화를 위한 많은 노력이 오늘의 유네스코 문화재가 된 밑거름이었다. 


그러나 앞으로의 연등회는 지금보다 업그레이드된 노력과 시도를 해야 한다. 그동안의 노력이 손님을 맞아들이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앞서 나가서 이끌어가는 세계적 문화 리더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우선 국내 이슈와 글로벌 이슈를 엮어내는 이원적 노력을 병행해 보면 좋겠다. 이를 위해 참여회원들의 기발한 아이디어를 거침없이 수용하되 그것이 언제나 인류애와 세계 보편성과 어깨동무가 돼야 한다.


인위적인 거대함이 아닌

소박한 들꽃의 위력을 발휘하자


연등회를 구성하는 수많은 메시지와 미덕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것은 ‘빈자일등’의 정신이다. 멋진 외양으로 화려하게 뽐내는 불빛이 아니라 ‘진심의 등불’이요, ‘지혜의 등불’이 되고자 했던 것이 연등회의 초심이었다. 이러한 의도가 구호로서만이 아니라 각자의 마음속 진심이 되도록 주최 측과 참여자들이 하나가 돼야 한다. 진심이 없는 모양새와 불빛은 어느 시점이 되면 그 빛을 잃고 허울이 사라진 초라한 본색을 지켜봐 왔다. 그런데도 그것이 나와는 상관없는 바깥의 일로 착각하는 데에 위험이 도사린다. 


『삼국유사』에는 옥보고가 지리산에 들어가 거문고를 타다 세상을 잃어버린 일화가 있다. 그리하여 임금이 금도(琴道)가 끊어질 것을 염려하여 신하들을 보내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렇듯 우리 조상들은 스스로 즐기고 수행하기 위한 예술을 향유해 왔다. 그간 연등회에서도 화려하게 혹은 남의 등불을 무색하게 하고 자신 혹은 그들만의 등이 남의 불빛을 삼켜버리는 일이 없도록 만전을 기해 왔다. 남에게 보여주기 이전에 나를 밝히는 행복의 등이 하나둘 밝혀질 때, 그 등불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아름다운 빛을 발하게 된다. 그렇게 밝혀진 등불은 거두지 않아도 피어나는 들꽃과 같이 강한 생명력을 지닌 저력이자 매력이 될 것이다.



글. 윤소희(위덕대학교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