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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2.] 문화유산 속 나무 이야기 - 가문의 상징이 되어 후손의 정성으로 지켜온 나무들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1-03-15 조회수 : 1419

문화유산 속 나무 이야기_자세한 내용 하단참조

문화유산 속 나무 이야기_자세한 내용 하단참조



이 땅의 큰 나무들은 모두 먼 옛날 우리 조상들이 후손을 위해 심은 것이고, 긴 세월 동안 정성껏 나무를 보존한 조상들이 있었기에 아름다운 자태로 살아남았다. 연기 봉산동 향나무와 문경 장수 황씨 종택 탱자나무처럼 한 가문의 상징으로 살아남은 큰 나무들은 지금 이 땅의 모든 생명을 위해 너그러운 선조가 후손에게 남긴 큰 선물이 되어 주고 있다


‘연기 봉산동 향나무’와 ‘문경 장수 황씨 종택 탱자나무’

가문의 상징이 되어 후손의 정성으로 지켜온 나무들


대대손손 효성 깃든 향나무


나무는 언어로 표현하지 않은 가문의 가훈이며, 집안의 전통을 상징하는 문장(紋章)이기도 했다. 선조가 남다른 뜻을 담아 심은 나무는 세월이 흐르며 가문의 상징이 되었고, 그의 후손들은 긴 세월에 걸쳐 대대로 정성껏 나무를 지켰다.


세종시 조치원읍 봉산리. 아늑한 농촌 마을에 서 있는 한 그루의 향나무도 가문의 상징으로 지켜온 나무다. 천연기념물 제321호인 이 향나무는 460년 전 부친상을 당한 최중룡(1543~미상)이 후손들에게 효도의 가르침을 상징하며 심은 나무다.


강화 최씨 집안이 봉산리에 살게 된 건, 최중룡의 아버지 최완(1510~1570년)에서 시작됐다. 5백 년쯤 전에 서울에서 생원으로 지내던 최완은 처가를 찾아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갑작스레 이 마을에서 삶을 마쳤다. 아들 최중룡이 15세 때였다. 어린 최중룡은 아버지의 묘소 앞에 초막을 짓고 삼 년 시묘살이를 했다. 그의 시묘살이를 위해 집안사람들이 모두 이곳에 따라와 살아야 했고, 마침내 시묘살이를 마친 최중룡은 그 자리에 눌러앉아 살림살이를 이어갔다. 삶의 새 터를 잡은 최중룡은 어버이를 향한 효심을 기억하기 위해 나무를 심었다. 그는 나무를 심으며 “효는 말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보고 배우는 것이다. 효를 제대로 기억하고 배우기 위한 상징으로 한 그루의 향나무를 심는다”고 말했다고 한다.


최중룡의 아들인 최회(1563~1621년) 역시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한 아이로 소문나 있었다. 13세 때 아버지 최중룡이 죽음에 들자, 아버지가 했던 그대로 삼 년 동안 매일 아버지의 묘를 찾아가 인사 올렸다.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노환으로 몸져누운 어머니의 병을 간호하는 데에도 몸을 아끼지 않았는데, 결국 자신을 돌보지 않고 어머니를 돌보던 최회는 과로로 쓰러져 어머니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58세였다. 최회를 비롯한 최중룡의 후손들은 효의 상징으로 심은 나무를 바라보며 대를 이어 효성을 실천하는 가문으로 널리 알려졌다.


최중룡이 심고 후손들이 지켜온 이 향나무의 고유 명칭은 ‘연기 봉산동 향나무’다. 행정구역명으로는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 봉산리이지만, 마을의 옛 이름인 ‘봉산동’과 세종특별자치시 설치 이전의 연기군 시절에 천연기념물로 지정했기 때문에 옛 지명이 그대로 남았다.


가문의 상징으로, 집안의 역사로 뿌리내리다


‘연기 봉산동 향나무’는 높이가 3m, 줄기 둘레가 2.8m 정도로, 작은 키에 속한다. 무성하게 뻗은 나뭇가지가 이룬 그늘이 깊어서 멀리서 보면 나무줄기가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왜소한 나무로 보이기 십상이다. 그러나 사방으로 펼친 나뭇가지의 품은 어마어마하다. 땅에서 2m쯤 되는 높이에서부터 뻗어 나간 나뭇가지는 무려 11m를 넘었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사방으로 고르게 펼친 나뭇가지는 빈틈없이 촘촘한 지붕을 이뤘다.


가지 펼침 못지않게 놀라운 건 신비로운 줄기다. 고작해야 2m를 넘지 않게 올라온 줄기는 마치 다리쉼을 하며 한숨 돌리는 듯 비스듬히 바닥에 누웠다. 그리고는 다시 힘을 일으켜 비틀리고 꼬이면서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그러다가 나뭇가지 위에 내려앉은 하늘의 무게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듯 나무줄기는 주춤거리며 수평으로 배배 꼬인 뒤에 다시 수직으로 솟아올랐다. 영락없는 용틀임이다.


선조의 뜻이 담긴 나무여서 후손들은 가문의 상징으로 여기며 공들여 지키고, 늘 곁에서 나무를 바라보며 효도 정신을 되새겼다. 연기 봉산동 향나무는 결국 한 가문의 상징으로 남았다가 마침내 이 땅의 역사 속에 가장 아름다웠던 한 집안의 역사로 남게 됐다.


후손의 보살핌과 공생의 지혜로 역사를 이어온 탱자나무


가문의 상징으로 심은 아주 특별한 종류의 나무도 있다. 조선의 명재상 황희 정승의 후손이 터 잡고 사는 경북 문경 대하리의 문경 장수 황씨 종택 앞마당에도 가문의 상징인 나무가 있다. 이 집안을 상징하는 나무는 놀랍게도 탱자나무다. 그저 생울타리로 심어 키우는 하찮은 나무로만 여겨오는 나무가 여기에서는 가문의 상징이 됐다. 장수 황씨 15대조인 황시간(1558~1642년)이 처음 짓고 살았던 장수 황씨 종택 앞마당에 서 있는 한 쌍의 탱자나무가 그 나무다.


놀라운 것은 한 그루처럼 보이는 이 나무가 실은 두 그루의 나무라는 사실이다. 바짝 붙여서 심어 키운 한 쌍의 탱자나무는 4백 년을 살아오면서 적잖이 불편했을지도 모른다. 나뭇가지는 물론이고, 보이지 않는 땅속의 뿌리도 제 뜻대로 몸을 풀 공간이 모자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서로에게 조금씩 양보하고 배려하면서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아름다운 수형을 이뤘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푸근해지는 멋진 나무다. 두 나무가 거리를 두지 않고 바짝 붙어서 자란 이 탱자나무는 제가끔 줄기의 둘레가 2m 가까이 될 만큼 굵다. 탱자나무 가운데 이만큼 굵은 줄기로 자란 나무를 보는 건 특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7m나 되는 키는 물론이고, 두 그루의 나무가 모여서 사방으로 10m가 넘게 펼친 나뭇가지의 품도 장관이다. 탱자나무로서는 엄청난 규모다.


동서로 두 그루가 한데 뭉쳐 자란 탱자나무는 멀리서 보면 영락없이 하나의 나무로 보인다. 동쪽의 나무는 땅에서부터 3개의 큰 가지로 나누어졌는데, 줄기 일부가 조금 썩어들어갔으나, 4개의 가지로 뻗어 나간 서쪽의 나무는 건강한 상태다. 역시 탱자나무의 큰 특징 가운데 하나인 가시는 억세게 발달해 있으며, 가지 사이사이로 노란 탱자 열매가 무성하게 맺힐 때의 풍경은 더없이 아름답다.


나라 안에서 잘 알려진 탱자나무 가운데에 천연기념물 제78호로 지정한 강화 갑곶리 탱자나무의 높이는 겨우 4m 정도 된다. 살아있는 탱자나무 가운데에는 비교적 큰 나무로 알려진 게 그 정도다. 하지만 그래 봐야 장수 황씨 종택의 탱자나무에 비하면 절반 조금 넘는 규모에 지나지 않는다. 나무는 마침내 지난 2019년에 천연기념물 제558호로 지정됐다.


탱자나무는 이 집을 처음 지을 때인 1593년 무렵에 함께 심은 나무로 전해진다. 처음 집을 짓고 살던 황시간이 집의 풍치를 돋우기 위해 마당 한가운데에 연못을 파고 그 주변에 심은 여러 그루의 나무 가운데 하나다. 집안의 정원에 심은 나무가 어떤 종류였든, 조상이 심은 나무를 후손들은 조상의 혼이 담긴 나무로 여기고 오랫동안 정성껏 지켜왔다. 지금처럼 아름다운 생김새의 정원수로 자라난 것은 모두가 고택과 나무를 고이 지켜온 후손들의 덕이다.생육 공간이 모자란다는 최악의 생육조건에서도 두 그루의 탱자나무는 공생의 지혜를 찾아내 살아남았다. 두 그루의 나무가 다툼 없이 이토록 오래, 더구나 이토록 아름답게 살아남은 것은 순전히 나무를 가문의 상징으로 여기며 극진히 보호하려 애써 온 이 집안 후손들의 보살핌 덕이다. 

이제 우리 차례다. 다시 이 땅에서 더 풍요롭게 살아야 할 우리 후손을 위해 지금 우리가 한 그루의 나무를 심고 정성껏 돌아보아야 할 때다.


글.사진. 고규홍(나무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