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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2.] 근대 역사 산책 - 수탈의 역사를 간직한 근대의 최전선 경북 울릉도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1-03-15 조회수 : 1428

수탈의 역사를 간직한 근대의 최전선 경북 울릉도_자세한 내용 하단참조

수탈의 역사를 간직한 근대의 최전선 경북 울릉도_자세한 내용 하단참조



수탈의 역사를 간직한 근대의 최전선 경북 울릉도


한반도의 동쪽 변방으로 알려진 울릉도. 그런데 이 섬은 단순히 동쪽 끝에 위치한 낙도가 아니다. 이미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아온 오랜 삶의 터전이자, 육지와는 다른 생태 환경을 간직한 자연의 보고다. 또한 신라시대 이래 조선을 거쳐 오늘 이 순간까지 국토 수호의 역사가 깃든 지역이기도 하다. 관광지로서 혹은 독도 관광의 출발지로서만 인식해온 울릉도가 아니라 거북손과 칡소 그리고 해녀를 위시한 눈부신 자연과 인문, 나아가 한반도 근현대사의 원형이 남아있는 공간으로서의 울릉도를 좀더 깊숙이 들여다보자.


소에게까지 불어 닥친 제국주의


울릉도에 왔다면 꼭 한 번 방문해볼 곳이 있다. 관광지로 개발된 곳이 아니기에 미리 양해를 구하고 방문해야 하는데, 그건 ‘칡소 농장’이다.


송아지 송아지 얼룩송아지 / 엄마소도 얼룩소 엄마 닮았네

송아지 송아지 얼룩송아지 / 두 귀가 얼룩 귀 귀가 닮았네


박목월 시인이 쓴 시에 손대업 작곡가의 곡을 붙인 이 동요에 나오는 얼룩소는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리고 정지용의 시 <향수>에서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얼룩백이 황소’는 또 어떤 소일까? 반론이 없는 것은 아니나 많은 이들이 가리키는 게 ‘칡소’다. 가죽에 칡넝쿨처럼 검은색 줄무늬가 불규칙하게 나 있어 붙은 이름인데, 호랑이 가죽 같다며 ‘범소’라 불리기도 한다.


그런데 칡소란 이름이 왜 생소하게 들릴까. 일제는 강점기 초기부터 일본 소의 품종을 개량한다며 황소나 흑우, 백우, 칡소 등 온갖 한우 수탈을 시작했고, 중·일 전쟁이 한창이던 1930년대 후반부터는 군사적 쓰임새가 많은 소가죽 확보와 식량 조달 등을 목적으로 150만 마리가 넘는 것으로 추정되는 소들을 공출해갔다. 이런 무자비한 수탈로 한우의 종 다양성이 사라져갔고, 개체 수도 급감하는 시련이 밀어닥쳤다.


핍박은 수탈에서 끝나지 않았다. 일제가 대한제국의 농축산 실태를 파악하고 농업 환경을 자신들의 체제에 맞게 재편하기 위해 설치한 권업모범장이 조사한 내용에 따르면, 1912년 경북지방에서 사육하는 한우의 털색을 살펴봤는데 조사 대상 2,744마리 중 황소가 2,135마리로 77.8%, 흑우가 284마리로 8.3%, 칡소가 71마리로 2.6%였다고 한다. 그랬던 것이 1938년 한우의 심사표준을 ‘털색을 적색으로’ 규정하며 칡소는 물론 흑우나 백우도 도태되기 시작한 것이다. 심지어 해방 뒤에도 일제 때의 기준을 그대로 답습했다. 1970년 한우 심사표준을 개정할 때 ‘털색은 황갈색’으로 규정함으로써 황소 외 다른 털색에 대한 도태를 꾸준히 유도했다.


이런 정책적 움직임에 한때 100여 마리 정도로 줄어들었던 칡소였다. 그런데 불행 중 다행일까. 경사진 비탈밭에서 쟁기를 끌기 적합하게 발굽과 어깨가 잘 발달해 있어 산간지방을 중심으로 칡소를 지켜온 이들이 있었다. 이어 1996년 충청북도를 중심으로 이른바 ‘향토 새 옷 입히기’라는 이름의 ‘얼룩백이 황소’, 즉 칡소 복원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근래 전국적으로 4천여 마리까지 늘었다가 2021년 현재는 3천 마리 정도가 사육 중이다. 그중 울릉도에서는 2006년 지역특화상품으로 육성하기 시작해 나리분지와 남양 울릉도 전역에서 현재 약 400마리가 길러지고 있다는 것이 울릉군 농업기술센터의 설명이다. 


하마터면 제국주의에 의해 영영 사라졌을 뻔했던 울릉도 칡소. 그러나 지금은 국제적인 이목을 끌고 있는 한우 종자이기도 하다. 지난 1996년 이탈리아에 본부를 둔 비영리 국제기구 ‘종 다양성을 위한 슬로우푸드 재단’이 전통 먹거리 종자와 그 다양성을 지키며 해당 지역만의 전통음식과 문화를 보전하기 위해 ‘맛의 방주(Arca del Gusto)’ 프로젝트를 시작했는데, 거기에 이름을 올리는 것 중 하나가 울릉도 칡소다. 관심 없으면 그냥 지나칠 색깔 특이한 소에 불과하지만, 알고 보면 이 소마저도 제국주의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운명이었다.


지정학적 가치를 보여주는 망루 터


울릉도 북동쪽 끄트머리쯤에 있는 ‘석포일출일몰전망대’에 가보자. 이름은 전망대지만 정작 찾는 이들이 많지 않아 가는 길도 정리가 잘 안 돼 있다. 석포길 즈음에 있는 공중화장실 근처에 차를 대고 임도를 따라 20분 정도를 걸어 올라가야 한다.

울릉도의 북동쪽 끄트머리 정상부에 있어 시선을 왼쪽으로 돌리면 우뚝솟아오른 송곳산(추산)의 모습에 탄성을 지르게 되고, 오른쪽으로 돌리면 울릉도의 부속 섬인 관음도의 넉넉한 모습에 반하게 된다. 여기서 핵심은 송곳산도 관음도도 그리고 동해도 잘 조망할 수 있는 바로 그 입지다. 일제가 조선을 강제병합하기도 전에 이곳에 망루를 시작으로 해군 지휘본부와의 연락을 위한 무선전신소, 등대, 지하대피소 등을 건설한 까닭이자, 태평양전쟁이 한창인 40년대에 마을 주민들을 동원해 포대를 설치했던 이유다.


일본이 울릉도에 관심 두게 된 것은 1904년 발발한 러·일 전쟁 때였다. 결국에는 일본이 승리했지만, 일본이 처음부터 승승장구했던 것은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주력 전함들이 격침되자 일본은 한반도 주변에서 제해권을 잃게 됐다. 이때 일본군의 걱정거리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함대가 남하해 동해를 장악함으로써 만주에 파견한 일본군이 고립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여긴 것이 블라디보스토크 함대의 조기 발견과 재빠른 응전이었다. 1904년 9월 25일, 석포일출일몰전망대에 망루 등이 설치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블라디보스토크 함대를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상황에서 1905년 1월 9일 세계 최강이라 일컬어지던 발트 함대가 희망봉을 지나 마다가스카르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자칫하면 두 함대로부터 협공을 당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군부를 감돌면서 일본 해군성이 나섰다. 러시아 함대를 감시하기 위한 망루를 설치하기 위해 독도 편입을 하자며 외무성에 비밀리에 각의 개최를 요청한 것이다. 이에 1월 28일 각의를 열어 만장일치로 독도의 일본 편입을 결정했고, 독도 맞은편의 시마네현 지사에게 2월 22일 편입 사실을 공고했다. 그렇게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로 울도군수 관할 하에 뒀던 독도를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를 통해 자국 영토에 편입시켰다.


조선 국토인 독도를 무주지(주인 없는 섬)라 주장한 데다 영토 편입 절차를 무시하는 등 실효성을 확보하지 못한 고시였다. 심지어 일본 내부에서조차 고시와 상관없이 독도를 조선 영토로 인정하는 등 어지러운 모습도 보였다. 하지만 러·일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였기에 일본 입장에서는 동해에서 러시아 해군보다 우위를 확보하는 것만이 중요했다. 울릉도와 독도는 대한제국 정부나 인민들의 뜻과는 상관없이 그렇게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를 통틀어 가장 먼저 일본의 제국주의적 욕망에 노출돼 갔다. 이후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대한제국에 을사조약을 강제해 외교권을 박탈함과 동시에 통감부를 설치해 보호국화했고 이어 1910년 아예 강제병합에 성공한다. 그 시작이 울릉도와 독도였다.


다큐멘터리를 통해 확인하는 울릉도민의 삶


도동으로 돌아와 가볼 곳은 ‘울릉역사문화체험센터’다. 언뜻 봐도 일본식 목조주택으로 연면적 160㎡에 2층 구조로 개인 집 치고는 꽤 큰 편이다. 원주인은 사카모토 나이지로. 1910년대 울릉도에 들어온 일본 목재생산업자이자 고리대금업자인 사카모토가 살림집으로 지은 건물이다. 2006년 옛 주인의 이름을 따 ‘울릉도 도동리 이영관가옥’으로 등록문화재가 됐다가 2008년에 문화재청이 매입해 보수를 거쳐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카페를 겸하고 있기에 이곳 방문자들은 차를 마시거나 전시자료를 본 뒤 나가곤 하는데, 여기에서 반드시 봐야 할 것은 2층 다다미방에서 상영하고 있는 험프리 렌지(Humphrey Leynse)의 영상물이다. 지난 1921년 중국 베이징에서 험프리 렌지는 1943년 미군에 자원입대해 공보장교로 활동했는데, 1957년부터 1966년까지는 주한 미국 공보관의 영화장교로 일했다. 이때 제작한 영화가 <섬 의사>이고, 이후 민간인이 되어 만든 다큐멘터리가 <외딴 섬>이다.


그중 반드시 보았으면 하는 것은 <외딴 섬>이다. 60분이 넘는 다큐멘터리인데, 1960년대 울릉도 주민들의 의식주와 생업, 문화 등 생활상을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이 다큐를 촬영하기 위해 1966년부터 1969년까지 3년간 울릉도에 거주하며 주민들의 삶을 카메라에 담았다. 특히 지금도 한 가구만 사는 죽도의 한 가족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는데 당시 울릉도에서의 삶이 얼마나 척박했을지 가늠하게 해준다.

한겨울에는 포항에서만 페리가 운항하지만, 그 외 시기엔 강릉과 동해, 울진 등에서도 항로가 열려 예전에 비해 여행이 무척 수월해졌다. 다가올 봄에는 울릉도와 독도로 떠나보는 건 어떨까. 두 섬이 왜 일제의 첫 침탈지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 폭력적 근대의 최전선으로서의 두 섬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보자. 제국주의는 갔어도 그 결과물로서의 분단 상황이 지속되고 있는 한반도의 오늘, 오늘을 사는 한국인은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한 질문도 던져보자.



글. 권기봉(작가, 역사여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