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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봄, 여름호-동물의왕국] 즐기다-수궁가 속 동물열전
작성자 : 재단관리자 작성일 : 2021-10-01 조회수 : 1936



수궁가 속 동물열전


역사상 유례없는 감염병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인 해 모든 것이 암담하기만 했던 2020년 7월. 한국 관광공사에서는 밴드 이날치의 「범 내려온다」를 ‘Feel the rhythm of Korea’라는 타이틀의 홍보영상으로 제작하여 유튜브에 올렸다. 이후 이 영상 은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면서 국내외에서 폭발적 인 인기와 반향을 불러왔다. 「범 내려온다」는 수궁 가의 「범 내려오는 대목」을 현대적 감각으로 편곡 한 것으로 판소리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재확인시 켜주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글·사진_ 이진오(금오공과대학교 강사)



(즐기다-4_사진01)통도사 명부전 수궁 가는 자라와 토끼 _ 사진 허균


통도사 명부전 수궁 가는 자라와 토끼 _ 사진 허균



인도, 중국을 거쳐 수궁가에 좌정한 용왕


국창 임방울의 수궁가는 “갑신년 중하월에 남해 광리왕이 영덕전 새로 짓고 대연을 배설할제”라고 시작한다. 그렇다면 갑 신년은 언제를 가리키며, 남해 광리왕의 정체는 무엇일까?

부처의 전생이야기를 담고 있는 인도의 본생담(本生譚) 중에는 악어가 원숭이를 물가로 유인하는 설화가 전한다. 이러한 내용 의 설화가 중국에 전래되면서 한역(漢譯) 불전(佛典)에 자리 잡 게 되었는데, 악어는 용으로 전환된다. 여기서 용은 인도 의 힌두교에서 숭상하는 뱀[N .ga]을 토대로 만들어진 상상 속 동물이다. 나가에서 비롯된 용은 비·바람·구름을 관장하며 사 자(死者)를 저승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존재였다. 용은 불교에 수용되면서 불법을 수호하는 천룡팔부(天龍八部)의 하 나가 되었고, 중국에서 수신(水神)과 융합하여 사해(四海)를 관 장하는 용왕이 되었다. 


수궁가의 남해 광리왕은 원래 명나라 때 구우(瞿佑)가 편찬한 『전등신화(剪燈新話)』의 「수궁경회록(水宮慶會錄)」에 등장하는 용왕이었다. 「수궁경회록」에서 남해 광리왕은 영덕전이라는 궁 전을 새로 짓는데, 인간 세상의 불우한 문인 여선문을 초청하여 새 궁전의 상량문을 지어달라고 요청한다. 그리고 여선문의 공 을 치하하여 잔치를 베푼다. 


수궁가에서는 「수궁경회록」의 이러한 등장인물과 설정들을 자 연스럽게 판소리에 담아내었다. 그 과정에서 남해 광리왕도 수 궁가에 자리 잡게된 것이다. 「수궁경회록」에 의하면 갑신년(甲申 年)은 1344년(원나라 순제 4)에 해당하며, 남해 광리왕이 다스 리는 남해는 남중국해에 해당한다. 이와 같이 「수궁경회록」의 설 정들이 수궁가에 자리 잡은 것은 주로 19세기 중후반이었다. 이 시기 판소리에는 노랫말이나 음악적인 부분에 상당히 많은 변화 가 시도되었는데, 당대의 다양한 향유층의 취향에 맞는 것이 가 사에 남을 수 있었다. 수궁가의 남해 광리왕은 조선 후기 한문에 익숙한 향유자가 수궁가에 남긴 흔적인 셈이다. 



(즐기다-4_사진02)상주 남장사 극락보전 내부 벽화 _ 불광미디어

상주 남장사 극락보전 내부 벽화 _ 불광미디어

(즐기다-4_사진03)별주부전 _ 고려대학교 도서관

별주부전 _ 고려대학교 도서관



조선시대 종6품 벼슬을 얻은 자라, 별주부


『삼국사기』의 「귀토(龜兎)」설화에서 용왕의 명을 받아 토끼 를 잡아오는 동물은 거북이다. 조선 후기의 각종 문헌과 관극시 (觀劇詩)에도 용왕의 신하는 거북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19세기 중반이후 수궁가와 관련한 기록을 살펴보면 용왕의 신하는 모 두 자라로 바뀌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기실 자라는 수궁가의 이면(裏面)에는 맞지 않는 동물이다. 수 궁가에서 용궁은 분명 바다로 설정된 공간이다. 자라는 거북과 달리 강이나 하천 등의 민물에 서식하기 때문에 바닷속 용궁에 서는 생존할 수 없다. 그렇다면 자라는 어떻게 수궁가에 등장하 게 된 것일까? 자라가 수궁가에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이유 중 하 나는 별주부(鱉主簿)라는 직책을 겸한 이름을 획득했기 때문이 다. 「수궁경회록」에서 별주부는 남해 광리왕의 신하로 이름 정도 만 언급되는 보조적인 인물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수궁가에 차용되면서 거북[龜]이 자라[鱉]로 전격 교체되는 계기를 만들었 다. 마침 주부(主簿)라는 관직의 역할도 수궁가에서 적절하게 활 용될 수 있는 요인이 되었다. 조선시대 주부는 궁중에서 종6품 의 비교적 말단 공무원에 지나지 않았지만, 국왕이 주관하는 회 의의 끝자리에 설 수 있는 직위였으며, 외국에 나가 통역관의 임 무를 맡기도 하고, 백성들의 의료, 빈민 구제와 관련한 업무를 담 당하기도 했다. 수궁가에서 별주부 자라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말단에 자리하고 있다가 용왕 앞에 불쑥 나서며 험난한 육지 행을 자원한다. 그리고 외국이나다름없는 육지에 나가 난생 처 음 보는 동물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자라의 이러한 면모는 조선시대 종6품 주부의 임무와 역할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주부는 혜민서(惠民署)에 속한 관리이기도 했다. 그 때문에 일반 백성들은 수궁가에 등장한 별주부에 연민과 동정의 시선을 보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자라는 별주부라는 직책과 이름을 동 시에 얻게 되면서 비로소 수궁가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거북은 어디로 갔을까? 거북은 수궁가에서 자라의 이 성사촌(異姓四寸) 원참군 또는 자라의 먼 친척이자 음흉한 이웃 인 남생이(민물 거북)로 설정되어있다. 거북은 별주부가 등장하 면서 주인공의 자리를 자라에게 내주고 점차 엑스트라로 밀려나 게 되었던 것이다. 


고제(古制) 판소리의 흔적을 간직한 방게


수궁가에서 수족들이 용왕 앞에 등장하는 장면들을 듣다 보 면 번뜩 귀에 들어오는 한 대목이 있다. 바로 ‘신의 고향 세상이 라’라는 대목이다. 해운군 방게는 자신이 세상에 나가 엄지발로 토끼의 가는 허리를 바드드득 집어다가 용왕에게 바치겠노라고 호기롭게 나선다. 하지만 용왕은 방게가 용궁의 신하가 아니며, 겁이 많아 뒷걸음질을 잘하기 때문에 세상에 보낼 수 없다고 한 다. 그러고는 꼴도 보기 싫다며 엄지발을 똑 떼어 내쫓으라고 명 한다. 


용왕이 방게를 탐탁지 않게 여긴 까닭은 방게가 바다에 사는 어류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방게는 서해안의 갯벌이 나 금강 하구의 모래바닥에 굴을 파고 살아가는 바닷게의 한 종 류이다. 바닷게라고 하나 바다와 육지의 경계에 서식하기 때문에 바닷속 용궁의 물고기라 하기에는 애매한 존재다. 방게는 몸집 이 작지만 껍질은 단단하며 유난히 큰 집게발을 갖고 있다. 일반적으로 게들은 옆으로만 이동한다. 하지만 방게는 위협을 느끼 거나 천적을 만나면 앞뒤로 움직이며 크고 억센 집게발을 위아 래로 흔들면서 경계한다. 과거 판소리 명창들은 이러한 방게의 생태와 생김새를 포착하여 수궁가의 한 대목으로 엮은 것이다. 


‘신의 고향 세상이라’라는 대목은 권삼득이 개발한 소릿조인 설렁제로 불린다. 90년대 故 박동진 명창이 TV 광고에서 불러 큰 화제를 모았던 흥보가의 ‘제비 후리러 나가는 대목’도 바로 이 소 릿조로 불린다. 이처럼 설렁제는 매우 경쾌하고 씩씩한 느낌을 주는 대목들에 사용된다. 권삼득은 판소리의 유파 구분이 생기 기 훨씬 이전인 19세기 초반에 활동했던 고제(古制) 명창인데, ‘신의 고향 세상이라’가 그의 설렁제로 불린다는 점은 이 대목 이 그만큼 오래되었다는 것을 방증한다. 고제 명창들이 주로 활 동했던 지역은 금강 유역의 도시라고 알려져 있다. 토끼전의 어떤 이본(異本)에서 방게는 스스로 자신의 고향을 충청도라고 소개 하기도 한다. 실제로 충청도 금강 인접 지역에는 게장, 조림, 무침 등 방게 요리가 유명하다. ‘신의 고향 세상이라’ 대목은 금강 유역 에서 활동하던 권삼득 또는 고제 판소리 명창들이 그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방게를 관찰하여 만들어낸 노래일지도 모른다.  


팔난세계(八難世界)에서 토끼다, 그럼에도 삶의 의미를 찾는 토끼


흔히 겁을 먹고 도주하거나 도망가는 상황에서 ‘토끼다’라는 표현을 사용하곤 한다. ‘토끼다’는 명사 ‘토끼’에 종결어미 ‘-다’ 를 붙인 일종의 속어이다. 토끼는 육지의 동물 중 최약체에 속하 는 동물이다. 세상 거의 모든 것이 토끼에게는 위협이 되기 때문 에 토끼는 매 순간 위기에서 벗어날 궁리를 해야만 한다. 그래야 만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토끼다’라는 말에는 그러한 토끼 의 속성이 반영되어 있다. 



(즐기다-4_사진04)토끼를 잡은 매 호취박토 부분 _ 국립중앙박물관

토끼를 잡은 매 호취박토 부분 _ 국립중앙박물관

(즐기다-4_사진05)열녀춘향사당 토끼와 자라 _ 사진 허균

열녀춘향사당 토끼와 자라 _ 사진 허균



자라는 토끼를 용궁으로 유인하기 위해 높은 벼슬자리와 아름 다운 미인과의 만남을 약속한다. 하지만 토끼는 낯선 세계인 용 궁으로 떠나기를 주저한다. 자라는 토끼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이 세상에서 겪을 수 있는 여덟 가지 위험에 대해 일러준다. 이른 바 팔난세계(八難世界)를 언급한 것이다. 토끼는 그제서야 자라 의 말에 설득되어 보다 안전한 삶을 도모할 수있는 용궁행을 결 심한다. 하지만 만경창파를 넘어 도착한 용궁은 토끼에게 결코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용궁은 토끼에게 간을 내놓기를 요구하 는 사지(死地)였다. 토끼는 자신의 간을 육지에 두고 왔다는 거 짓 핑계를 대고 가까스로 육지로 귀환한다. 하지만 안도하는 것 도 잠시였다. 토끼는 탁첨지의 덫에 걸리기도 하고 독수리에 채 이기도 하면서, 또다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게 된다. 토끼 에게 팔난세계는 결코 탈출할 수 없는 일상이자 현실인 것이다. 하지만 토끼는 이번에도 기지를 발휘하여 위기에서 벗어난다. 종 국에는 독수리마저 따돌리고 여유롭게 노래 한 자락을 읊는 것 으로 수궁가는 마무리 된다. 


토끼는 항시 생사의 갈림길에서 생존을 궁리할 수밖에 없는 존 재다. 하지만 수궁가의 토끼는 마지막까지 삶의 기회와 의미를 찾고자 노력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조선 후기 서민들의 삶도 토끼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팔난세계에서 벗어 나지 못하는 현실에 살면서도 그것을 피하기보다는 그 속에서 삶의 여유를 찾고자 했다. 


흥앵흥앵 범 하나가 내려온다


수궁가의 「범 내려오는 대목」은 매우 이른 시기에 마련된 대 목이다. 송흥록은 19세기 전반에 활동한 동편제의 비조로 알려 져 있는 명창인데, 현재에도 그가 불렀던 이 대목의 흔적이 기록 으로 간략하게 남아 있다. 


밴드 이날치의 「범 내려온다」에는 동편제와 서편제의 「범 내려 오는 대목」의 가사가 모두 들어 있다. 신유진 씨가 맡은 1절은 서 편제의 가사이고, 이나래 씨가 맡은 2절은 동편제의 가사이다. 내용상의 큰 차이는 없으나, 각각의 방식으로 범을 매우 생동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소나무 우거진 골짜기로 범이 내려오는데, 몸은 얼룩덜룩하고 꼬리는 한 발이 넘을 정도 로 길다. 누에머리처럼 생긴 울퉁불퉁한 대가리를 흔들며 거침 없이 내려온다. 앞다리는 화살통[箭筒] 같고, 뒷다리는 동아줄처 럼 두툼하며 주둥이는 양귀까지 찢어져 있을 정도로 무시무시 하다. 새로 날을 세운 낫처럼 날카로운 발톱으로 땅바닥을 찍어 잔디를 뿌리째 뽑아내고 왕모래를 공중에 흩날리며 내려온다. 마침내 주홍빛 입을 크게 벌리고 ‘흥앵흥앵’하고 포효하며 자라 앞에 우뚝 멈춰 선다. 마치 우리의 민화 속에서 막 튀어나온 범 을 대하는 듯하다. 


수궁가에서 「범 내려오는 대목」은 엇몰이장단으로 불린다. 판소 리의 엇몰이장단은 영웅적인 인물이 극적으로 등장하는 장면 에서 사용된다. 적벽가의 「자룡 내려오는 대목」도 엇몰이장단으 로 짜여 있다. 『삼국지연의』의 조자룡은 촉한(蜀漢)의 오호대장 군(五虎大將軍) 중 호위장군(虎威將軍)으로 불린다. 범처럼 날 래고 용맹한 위세를 떨쳤기 때문에 붙은 호칭이다. 그 때문인지「범 내려오는 대목」과 「자룡 내려오는 대목」은 장단뿐 아니라 표 현도 꽤 많이 닮아 있다. 


범은 과거 한반도와 만주 지역에 서식하는 무적의 동물이자 단 군신화에 등장할 만큼 우리에게 영물(靈物)로 추앙받았던 존 재였다. 범이라는 말은 산 정상에 우뚝 서서 포효(咆哮)하는 범 의 메아리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범 보다는 호랑이라는 표현을 더 많이 사용한다. 호랑이는 범[虎] 과 이리[狼]의 합성어로 일제 강점기 무렵에 생겨난 단어라고 한 다. 당시 일본인들은 해수구제(害獸驅除)라는 명분을 내세워 대 대적으로 범 사냥에 나섰는데, 조선인들의 반발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사나운 맹수라는 의미를 강조한 호랑이(虎狼이)라는 말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범은 분명 두려운 짐승이기는 하나, 우리에게 선한 사람을 돕고, 은혜를 입으면 반드시 그것을 갚을 줄 아는 영물로 인식되어 왔 다. 그래서 산신령과 같은 존재로 여겨져 산군(山君)이라 부르기 도 했다. 안타깝게도 현재 한반도에서 호랑이는 멸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범은 우리의 소리에, 국가대표 선수의 유니 폼에 누에머리를 흔들면서 ‘흥앵흥앵’ 포효하며 여전히 우리 안 에 살아 있다. 



(즐기다-4_사진06)호랑이 _ 국립중앙박물관


호랑이 _ 국립중앙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