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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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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장 오옥진
발행일 2014-01-06 조회 3825

[위대한 문화유산]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의 무형문화재이야기 - 각자장 오옥진 국가무형문화재 제106호 각자장 Master Artisan of Calligraphic Engraving Holder

각자장 오옥진
1935.11.11 ~ | 보유자 인정: 1996년 11월 1일

나무를 오래 다룬 어떤 목수가 나무결(木理)에도 혼이 있다는 뜻의 말을 한 일이 있었다. 혼이라는 말을 그냥 마음이라고도 혹은 정신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일을 통해서 나무를 고르고 깎고 밀고 다듬고 맞추어 가며, 일생을 두고 나무와 그렇게 만나면서 그는 마침내 살아 있는 나무가 아닌, 집을 짓고 가구를 만드는, 그런 단순한 자재로서의 나무의 결에 깃들인 혼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경우 그는 한 목수이지만 가히 나무의, 혹은 나무결의 도에 통한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다.
- 이흥우 시인 ‘서각의 혼, 글씨의 마음_銕齊 吳玉鎭展에 붙여’ 중에서

주요작품

지성무식(至誠無息)
지성무식(至誠無息), 오옥진, 36×33cm,
지성(지극한 정성)은 쉼이 없고 그 미치는 힘은 영원하고 지대하다.

서각(書刻)의 혼, 글씨의 마음

  • 각자장(刻字匠)이란 목판에 글자를 새기는 기능을 가진 장인을 말한다. 각자는 크게 두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 인쇄를 목적으로 글자를 좌우 바꾸어 새기는 반서각(反書刻)과 공공 건물이나 사찰, 재실에 거는 현판용으로 글자를 목판에 그대로 붙여 새기는 정서각(正書刻)이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목판본은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만든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다. 이러한 신라의 목판 인쇄술을 바탕으로 하여 고려시대에는 사찰을 중심으로 경전이나 고승들의 문집과 저술의 간행이 성행하여 목판 인쇄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조선시대에도 고려의 목판 인쇄술은 그대로 전래되어 [훈민정음]을 비롯한 많은 목판 인쇄물이 간행되었다.
  • 목판 인쇄에 사용되는 책판은 대추나무, 배나무, 가래나무, 박달나무, 자작나무 등이 좋다. 대추나무는 단단하고 벌레가 잘 먹지 않으며, 배나무는 연해서 칼질하기가 쉽고 매끈하다. 각자의 제작과정은 먼저 나무결을 삭히는 연판(鍊板) 과정을 거치는데 바닷물에 수년 동안 담가 진을 빼 삭힌 다음 음지에서 말린 뒤 각자를 한다. 각자장의 기량은 각질의 흔적, 글자체의 균형, 잘못된 글자나 글자획이 빠진 것 등으로 가늠할 수 있다. 각자는 금속활자의 발달로 조선시대 후기 이후에는 그 정교함이 부족해지고 근래에 이르러서는 서양인쇄술의 도입으로 급속히 쇠퇴하게 되었다.

4대를 이어온 각자의 역사 - 철제 오옥진 선생

  • 오옥진 선생 집안의 각자 역사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다만 오옥진 선생의 증조부 때에 각자를 했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증조부 오성수(1860~1939)선생은 철종 경신(庚申) 정월 4일생으로 자는 여민(汝敏)이고 호는 문산(汶山)이다. 오성수 선생은 법부주사(法部主事)의 벼슬을 지내고 고향인 충북 청원군 달계리로 낙향하였다. 고향의 뒷산에 서재를 지어 손수 판각하여 ‘혼천정사(混泉精舍)’라는 현판을 걸어놓고, 자제들을 모아 학업에 정진하게 하였다. 자제들의 학업에 힘쓰는 한편 [양화세설(兩華世說), [사현지언(四賢至言)], [유림정선(儒林精選)] 등의 책을 기록하여 목활자로 각자하여 인출하였다. 또한, 원대(遠代) 선조의 문집인 [문양공집(文襄公集)], [충무공전서(忠武公全書)] 등을 판각하여 인출해 세상에 널리 반포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문집 5권을 집필하여 보관하였다. 증조부는 오옥진 선생이 여섯 살 되던 해에 돌아가셨지만, 오옥진 선생이 각자에 대한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일깨워 주셨다. 또한 증조부가 사용하던 도구 수점은 오옥진 선생에게 대물림되어 지금까지 쓰이고 있다.
  • 오옥진 선생 집안의 각자 기술은 오성수 선생의 다음 대인 할아버지대에 와서 전성기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오옥진 선생의 조부인 희순(熙淳)선생을 비롯하여 희풍(熙豊), 희문(熙文), 희대(熙大) 4형제가 모두 각자를 하였다. 할아버지대에서 각자를 한 것은 생계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재력있는 양반 집안에서는 조상들의 문집을 간행하고자 각자 기술을 익혀 두었는데, 오옥진의 집안에서도 그러한 목적으로 각자를 하였던 것이다. 이후에도 각자법은 대를 이어 전승되었으며, 이제는 집안의 생계수단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 1935년 충북 청원군 현도면 달계리에서 태어난 오옥진 선생은 초등학교 2학년때 경기도 부평으로 이사와서 집안 형편으로 인해 동양공업중학교 3학년까지만 마쳤다. 선생은 학교를 중퇴하고 생계를 잇기 위해 빙과 장사, 생선 장사 등 온갖 일을 했으며,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1951년 해병대에 입대하여 4년간 복무하였다. 전쟁 중에 수류탄 파편으로 오른쪽 눈을 실명한 오옥진 선생은 1955년 아버지와 함께 도장 파는 일을 하면서 처음으로 칼을 만지게 되었다. 당시 도장 파는 방법은 지금과는 달랐다. 지금은 한번에 그냥 밀어서 파지만, 옛날에는 목판에 각자 하듯이 사방에 칼을 넣어서 팠다. 어깨 너머로 도장일을 배우던 오옥진 선생이 22세 되던 1957년, 각자 일을 하던 셋째 작은아버지로부터 각자 권유를 받았다. 숙부는 오옥진 선생에게 도장파는 법과 나무 다루는 기술, 각자의 연원에 대해서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1957년 국립중앙직업보도소 목공예과에 입학하여 목공예에 관한 기초 교육을 받았다. 성적이 좋아서 국방부, 내무부, 보건사회부, 상공부 4부 장관의 연면통첩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수양아들이 운영하던 당시 최고의 기업이었던 중앙산업이라는 가구 공장에 취직을 했다. 5.16이후 그곳을 그만두고, 서른 한 살 때 보훈처의 소개로 동아일보 영선과에 목수로 취직해 8년 4개월간 있었다. 당시 영선과의 다른 두 사람은 집 짓는 건축쪽 전문이고, 오옥진선생은 목공예 담당이었다. 그래서 자연히 이희승 박사나 사장이 소장하고 있던 옛날 목물(木物)들을 고쳐 주면서 그들과 가까워졌고, 그 끝으로 여러 사람들을 알게 되어 많은 도움들을 받았다. 그러면서 여러 유명인사들과 같이 다니면서 고미술에 대한 안목이 높아졌다.
  • 위와 같은 경험들이 계기가 되어 선생은 각자 일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여놓기 위해 안정적이던 직장을 그만 두고 당시 서각가(書刻家)로 유명했던 신학균 선생으로부터 각자에 관해 가르침을 받고 이후 재주와 기량이 발전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오옥진 선생은 단절되어 가던 각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각자장으로서 전통문화의 계승자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각자에 필요한 공부를 찾아 했다.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선생 문하에서 8년간 서예를 배웠고, 태동고전연구소에서 청명 임창순 선생에게 2년 6개월간 한문을 수학하였다. 틈틈이 숙부에게 선인들의 각자에 대한 태도와 방법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으며, 각자를 철저히 하기 위해 기초를 닦았다. 이밖에 통문관의 이겸로 선생, 연민 이가원 선생, 공예부문 문화재 전문위원이었던 중앙일보 논설위원 고 이종석 선생 등과 각자장의 긍지와 사명감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또한 멸실되었거나 멸실 위기에 있는 국보, 보물급 각자 판본의 복원 의의에 대한 설명은 선생의 생생한 지식을 형성함과 동시에 각자의 기능적 성장도 아울러 촉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 오옥진 선생은 옛 판본의 복원에 남다른 애정을 보여 국보 70호인 [훈민정음](33판)을 비롯하여 [농가월령가](68판), [고려가요](56판), [대동여지도](1~3층), [화성전도도설], [부모은중경도설](14판), [수선전도] 등을 복원하였다. 오옥진 선생은 인출을 위한 전통 목판 각자법을 계승하였을 뿐 아니라, 정서각(正書刻)인 현판 제작에도 뛰어난 기능을 인정받고 있다. 경복궁의 <자선당> 현판을 비롯해 경복궁, 창경궁, 창덕궁 등 고궁과 송광사, 화엄사, 금산사 등 고찰의 현판 복원에 참여했으며, 독립기념관, 국립국악원, 국립국어연구원, 현충사 등 중요 건물의 현판 제작도 도맡아 했다. 선생의 각자 기법은 가계에서 전해 내려오는 전통적인 각법을 가장 충실하게 지키고 있다. 그것은 옛날 증조부가 쓰던 도구를 물려받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다시 말해, 기계화가 아닌 칼과 망치에 의한 전통적 수공 기법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는데 의의가 있다. 오옥진 선생은 상품성과 무관한 목판들을 복원하여 인출, 반포함으로써 전통 각자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선생의 작업은 치밀함과 정성이 배어 있고, 각자 기능 수준은 당대의 명가로서 이미 정평이 나 있다. 선생은 1996년 국가무형문화재 제106호 각자장 기능보유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지금까지 오옥진 선생의 문하를 거쳐간 제자만 300여 명이 되고, 그 제자의 제자, 제자 등을 합치면 1000여명이 넘는다. 현재 한국서각협회, 철제각연회 등 국내 주요 각자 단체의 회원은 열에 아홉이 선생에게 수학하거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다.

작업도구와 재료

각자에 필요한 도구는 크게 나무를 다듬을 때 필요한 도구(그무개, 곡자와 조합자, 톱, 대패)와 각자를 할 때 필요한 도구(평칼, 굽은 평칼, 삼각칼, 둥근칼, 끌, 함지박칼, 때리는 칼, 다듬는 칼, 각자용 망치, 조임쇠 등)으로 나뉜다. 각자를 할 때 쓰이는 재료로는 나무가 주로 쓰이는데, 나무는 재질이 아름답고 재료 구입이 쉬우며, 작품을 한번 만들면 영구적으로 보존이 가능한 점 때문에 선호되어 왔다. 목공예에서는 빛깔과 무늬가 진하고 선명한 나무를 선호하지만, 각을 할 때는 글씨가 죽기 때문에 그런 나무는 피한다. 감나무의 경우 목공예에서는 좋은 나무이지만, 각자를 할때에는 검은색 대문에 글씨가 죽으므로 글씨가 생명인 정서각에서는 쓰지 않는다. 정서각이나 반서각 모두 검은 빛깔의 나무를 사용하는 것을 꺼린다. 그리고 나무의 무늬는 각할 때 대칭이 되는 것이 나중에 보기 좋기 때문에, 무늬의 균형을 잡아 주어야 한다. 또한 무늬에 따라서 각이 죽는 경우도 있어 잔글씨는 가급적이면 무늬목에 각을 하지 않고, 무늬목을 원할 경우에는 각을 하기 전에 무늬를 약간 죽인다. 일반적으로 각자에 많이 쓰이는 나무는 소나무, 잣나무, 주목(朱木)과 비자나무, 감나무, 은행나무와 호두나무, 배나무와 대추나무, 느타나무와 오동나무, 참죽나무, 고로쇠나무와 단풍나무, 박달나무와 자작나무, 벚나무와 피나무, 후박나무와 버드나무, 밤나무와 향나무, 아카시아 등이 사용된다.

작업 과정의 모습

작업 과정의 모습

약력

  • 1935년출생
  • 1953년대통령상 수상
  • 1958년해군참모총장상 수상
  • 1970년신학균 선생께 사사
  • 1978년오옥진 서각연구실 개설
  • 1980년대한민국 국민훈장 석류장 수상
  • 1982년한국서각협회 창립 회장
  • 1985년한글학회 공로 표창 수상
  • 1985년서울 정도육백년 기념 자랑스런 서울시민 선정
  • 1996년국가무형문화재 제106호 각자장 기능보유자 인정
  • 1996년철재오옥진각서전
  • 1996년~국가무형문화재보유자작품전 및 해외 전시 등 다수 전시 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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