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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09월 - 16세기 말 동아시아 세계의 대충돌, 임진왜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3-12-30 조회 2371

 

 

지금으로부터 421년 전 1592년 4월 13일 신시 [13:00∼15:00], 부산 가덕도 응봉봉수대를 관장하는 봉수감고 이등과 연대감고 서건은 부산포로 몰려오는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선단을 발견했다. 임진왜란의 서막이었다. 다음 날 일본군은 4시간 만에 부산진을 함락시켰고, 20일 만에 서울까지 진격하였다. 맥없이 조선이 무너졌다는 소식에 평소 조선을 군사적 강국으로 여기고 있던 명은 관리를 파견하여 전황을 확인하기도 했다 사실 임진왜란은 단순한 한일 간의 전쟁이 아니었다. 조선이 초반 무력하게 당한 이면에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무역상과 예수회 선교사의 동아시아 진출이 있었고, 100여 년에 걸친 내란을 막 끝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등장이 있었다. 중국도 내우외환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으나, 여전히 동아시아의 맹주로서의 힘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각국의 입장에서 전쟁을 보는 서로 다른 시각을 가지게 했다.

 

 

임진왜란 : 壬辰倭亂
‘임진왜란(壬辰倭亂)’은 1617년(광해군 9) 국가에서 편찬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처음 사용되었으며, ‘임진년(1592년)에 왜적이 일으킨 변란’이라는 의미이다. 임진왜란 즈음 일본은 인구 1,200만이 넘고(조선은 800만으로 추산) 무(武)를 중시하는 가운데 상업이 발달하고 화려한 문화와 예술이 꽃피고 있었다. 그러나 성리학의 잣대를 가진 조선의 눈에는 일본이 신불(神佛)이나 숭상할 뿐 유교문화에 서툰 야만족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갑작스런 침입으로 대부분의 국토를 침탈당하고 왕실과 조정마저 피란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조선은 그 침략의 주동 세력이 평소 무시하던 일본이라는 점에서 충격이 더 컸다. 일본군의 약탈과 파괴, 살육과 납치는 조직적이었으며 끝이 없어서 동래성 전투, 2차 진주성 전투나 남원성 전투에서는 민간인도 모두 도륙당했으며 불국사, 충주 사고(史庫) 등 많은 문화재가 소실되고 약탈당했다. 특히 궁궐을 불태우고, 왕릉을 파헤치는 만행에 조선은 크게 분개했다. 야만스런 왜적을 몰아내기 위해 ‘충’과 ‘의’로 무장한 사람들이 각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동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또 한편 전쟁이 끝나자 우리의 힘으로 왜적을 완전히 몰아내지 못한 현실을 자조하면서, 조선은 여전히 우월하다는 의식 속에 ‘왜란’이라는 용어는 오래도록 자리할 수 있었다.

 

만력동정 : 萬曆東征

건국한 지 2백 여 년이 지난 명은 임진왜란 무렵 북쪽 타타르, 오이라트와의 분쟁, 남쪽 해안을 침공하는 왜구 문제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일본과 조선이 결탁하여 침입하려 한다는 소문도 꾸준히 나돌고 있었다. 명은 조선에서 급히 원군을 요청하자 원정군을 파견하게 되었는데, 일본군이 자국의 영토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격퇴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 그러나 겉으로는 천자의 군대로 위기에 빠진 주변국[藩邦]을 도와 천하의 질서를 바로 한다는 명분이었다. 이런 의도는 임진왜란을 지칭하는 ‘동원일역(東援一役)’이나 ‘만력동정(萬曆東征)’이라는 단어에 잘 반영되어 있다. 명군은 제독 이여송의 지휘로 전투가 소강국면에 접어든 1592년 12월 말결빙된 압록강을 건넜다. 이들은 이듬해 1월 6일부터 7일까지 이틀간 평양성을 공격하여 일본군을 몰아냄으로써 당당히 ‘천자의 군대’로서의 위용을 드높였다. 그러나 급히 일본군을 추격하다가 1월 27일 서울의 북쪽 벽제관에서 패하고 말았다. 이후 명군은 조선군의 전투도 금지하고는 강화 회담에 의한 전쟁 종결을 시도하였다. 이미 일본군이 중국 국경안으로 침공할 동력을 잃었기 때문에 더 이상 전투를 치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한편 조선은 ‘국가를 다시 일으키도록 한 은혜[再造之恩]’에 대한 부담을
가지게 되었다. 전쟁 중 내정의 간섭과 왕권의 실추, 참전 장수들의 생사당과 공적비 건립이 있었다. 전후에는 공물로 막대한 양의 은을 요구하였고, 후금과의 전투 중 군대와 물자, 주둔지의 지원을 강요하였다. 명으로서는 파병이 단기적으로는 적잖은 부담이 되었으나, 국경 밖에서 일본군을 방어하여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을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패자로서의 역할을 다하여 명분에서도 소득이 컸다.

 

 

분로쿠 게이초노 에키 : 文祿慶長の役
16세기 일본의 전국시대가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정복으로 끝나게 되었을 때 일본은 내란 속에서 단련되고 ‘뎃뽀(鐵砲, 조총)’로 무장한 최강의 전투 집단을 보유하고 있었다. 미천한 신분에서 최고 권력자로 자리한 히데요시는 자신을 과시하려는 공명심을 가지고 있었고, 제한적인 대외 교역도 해소하고, 정적들의 힘을 빼야 하는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다. 따라서 대륙 정복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임진왜란에 대해 에도시대 초기에는 ‘조선정벌’이라 하여 이른바 삼한정벌을 계승하고 있음을 강조하다가, 합방 이후에는 내선일체의 역사를 반영하여 ‘분로쿠 게이초노 에키’1) 또는 ‘조선역’이라는 용어로 고쳤다. ‘에키[役]’는 일본어에서 ‘국경 내의 전쟁’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전쟁 중 일본군은 조직적인 약탈을 위해 선호 품목을 작성하고 전문가를 동원했다. 약탈품은 서적, 불상, 그림, 도자기에서 심지어는 현판이나 주련, 기와에 이르기까지 다양했으며, 참전한 영주들의 이국적 취미 충족과 자기 과시의 장식품, 원찰(願刹)에의 기증, 서양과의 교역 등을 위해 이용되었다.

 

또한 전쟁으로 인한 후방 지역의 인적인 공백을 메우기 위해 포로를 잡았는데, 학자는 가신(家臣)으로 기술자들은 집단적으로 거주시키며 물건을 만들게 했으며 나이 어린 포로는 시동으로 삼았다. 또 일부는 서양 무역선에 노예로 넘기기도 했다. 포로들은 대체로 송환되지 못하고 정착했는데 이 중에는 천주교에 귀의하여 박해 속에 끝내 순교자의 반열에 오른사람도 있었다. 도요토미가 갑자기 죽음을 맞이하면서 황급히 전쟁을 끝맺었지만, 일본은 장기적으로 자국의 극심한 피폐를 만회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도자기 산업의 발달을 기반으로 한 서양과의 교역에서의 부의축적, 조선 학자들에 의한 학문의 발달과 활자 보급에 의한 인쇄의 발달등을 이루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대륙 진출의 선례로서의 자신감은 이후 대륙 침탈과 탈아론(脫亞論)의 사상적인 배경과 실제 행동의 전범(典範)으로 계승되었다.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당시 조선은 당시 세계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여 적극 대처하지 못했었다. 또한 동남아까지 진출하여 부를 축적한 극소수의 사람도 있지만 조선 전체로는 전쟁 과정과 전쟁 후 세계로 나갈 수 있는 위기 속의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는 전쟁이었다.

 

글˚이상훈 (해군사관학교박물관 기획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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