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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 비안도에서 시작된 수중발굴의 역사적 첫 걸음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02-03 조회 2100
수중유물 발굴 40주년 기념 특집ㅣ바다 속 문화유산 비안도에서 시작된 수중발굴의 역사적 첫 걸음


새만금 개발이 가져온 비안도 수중문화재
고군산군도(古群山群島)는 군산 서쪽에 연해있는 섬들의 무리로 선유도를 중심으로 무녀도, 신시도, 대장도, 장자도, 비안도, 야미도를 포함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고군산군도는 서남해의 세곡이나 특산물을 운반하기 위한 바닷길의 중간 기착지로, 『高麗史』나 송나라 사신 서긍이 쓴 『宣和奉使高麗圖經』 등 옛 문헌에 군산도 (현 선유도)가 자주 서술되어 있다. 기록에 따르면 군산도에 관청과 객관이 있어 사신이나 상인들이 묵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군산도에 수군진영이 창설되었고, 세종 초기에 이곳의 군산진이 옥구현 북쪽 진포로 이동하면서 ‘군산’이란 명칭까지 옮겨 감으로써 이곳을 옛 고(古)자를 붙여 ‘고군산도’라고 부르게 되었다. 고군산군도 해역은 다도해의 복잡한 해안을 통과해야 하는 항로 특성과 잦은 안개, 풍랑 등의 기상여건에 의해 재해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은 곳이다. 이런 환경은 이 해역에서 수중문화재 발견·신고 건수가 35건에 이르며, 실제 발굴조사 또한 비안도 앞바다 등 3건이나 실시된 점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입수준비 및 수중유물 노출상태를 찍은 사진군산 비안도 수중발굴은 2002년 4월 북동쪽1km 수중에 다량의 청자가 매몰된 사실을 소라를 잡던 어부가 발견, 신고하면서 시작되었다.
비안도 인근해역에서 저인망(일명 소라빵) 그물로 해저를 긁어 내려가던 어부는 그물이 끊어져 이를 찾고자 잠수장비를 착용하고 들어갔다.
그물이 걸려있는 곳에 생각지도 못했던 청자들이 더미로 있는 것을 발견하고 소라를 담는 그물에 담을 수 있는 만큼 가지고 올라와 이를 신고하였다. 당시 국립해양유물전시관에서는 수중문화재를 탐사하는 정도의 수준이었으며, 수
중에서 직접적인 발굴은 고려하지 않았다.

2002~2003년까지 5차에 걸친 발굴조사 중 1차를 제외한 나머지 조사를 해군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체적으로 수중조사를 진행하였다.
이는 독자적인 수중발굴의 첫 걸음이자, 보다 학술적인 조사체계를 갖추는 계기가 되었다. 조사 결과, 유물은 매우 단단한 갯벌층에 산발적으로 매장되어 있었으며, 비교적 양질의 고려청자 3,100여 점이 인양되었다. 이후 새만금방조제 물막이 공사가 완료(2006. 4. 21)되어 조류의 흐름이 약해진 비안도 발굴해역을 2007년 탐사한 결과, 1m 내외의 새로운 갯벌이 쌓여 수중유적은 다시 매몰되었다.


절박한 상황에서 자체 수중발굴 : 블루오션 개척
해군과 공동으로 조사한 1차 발굴 이후 추가적인 조사가 필요했으나, 2002년 6월 29일 발발한 서해 연평해전으로 인하여 해군 심해잠수사들의 협력이 어려워 자체적으로 수중발굴단을 꾸려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민간잠수사를 일부 투입하고, 당시까지 준비와 조사경험을 바탕으로 직원들이 직접 입수하여 수중탐사 및 유물 매장상태를 확인하고, 촬영 기록하는 등 적극적인 조사활동으로 양질의 청자를 인양하였다.






청자국화문합조사해역은 고군산군도 일대의 강한 조류의 영향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군산 외항과 변산반도를 연결하는 새만금방조제 공사가 진행되면서 물막이로 인한 해수유입과 유출에 따라 조류가 빨랐다. 이로 인해 설치한 수중격자(Grid)와 수중촬영시설이 조류에 휩쓸리는 등 어려운 발굴이었으며, 특히 조류의 영향으로 조사중심에서 1km 떨어진 외곽에도 유물이 분포되어 있었다. 실제 조류를 측정했을 때 약 3.0노트에 가깝게 매우 빨랐기 때문에(1노트 이상이면 잠수 금지) 수중조사는 조금 전·후의 정조 시간을 중심으로 30분에서 1시간 정도 가능했다. 또한 제토를 통한 매몰청자를 수습하고자 시도하였으나, 수작업으로는 제토가 어려운 단단한 해저면이어서 탐침봉을 이용한 조사를 하였다. 이런 바다
상황으로 잠수에 대한 두려움도 가중되었다. 이를 통해 신안해저발굴 등의 중요한 발굴을 해오면서 조사원이 수중발굴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수중에서 직접 조사하려는 노력이나 시도가 없었던 점과 당시까지 수중고고학자라 자신할 수 있는 전문가가 없었던 일면을 알 수 있었다.

수중고고학을 하려면 물속으로 들어가라!
당시 수중발굴에 대한 경험도 전무했을 뿐만아니라 잠수에 대해서는 공기통도 현장에서 처음 보았으나, 현장 책임자로서 새로운 역사를 쓸 수 있는 무궁무진한 자료가 새만금방조제 내외를 넘나드는 뻘물 바닷속에 잠자고 있다는 점과 이제까지 경험해보지 못했다는 두려움과 인원, 장비 부족으로 인해, 민간잠수사가 건져오는 유물만 수습하는 수동적인 조사방법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하였다. 이런 조사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매일 항구로 돌아오는 뱃머리에서 고민하였고, 인양 유물이나 기록하고 촬영 정리하는 조사원이 아닌, 수중에 들어가 매몰 상태와 수중상황을 파악하여 일을 주도하는 주인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방향을 설정하였다.

인양유물 세척 및 분류정리 사진 및 인양대표청자 사진3차 발굴조사부터는 잠수에 대한 자신감을 갖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하고, 먼저 물속에 들어가는 것을 앞장섰다. 물속에서 두려움만 이기면 어떤 수중조사도 할 수 있겠다고 느꼈기에 같이 물속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무모한 시도였고, 당시 조사에 참여한 민간잠수사도 뭐 때문에 공무원들이 그 위험한 물속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다며 말렸을 정도로 목숨을 내놓는 시도였다. 우리 기관이 아시아 수중발굴을 선도하는 책임기관으로 성장하는 꿈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아마 물속의 두려움을 극복하고자 한 그때 고민과 도전의 결과였다는 생각이다.

두려움보다는 새로운 역사를 쓸 수 있다는 블루오션을 보고 느꼈기에, 우리나라에서 아무도 하려고 하지 않았던 수중고고학을 개척하여 새로운 길을 열기 시작했다. 비안도 수중발굴을 통해 자체적인 발굴조사를 할 수 있는 경험과 기술을 축적하여 수중조사에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이후 군산 십이동파도, 태안 대섬 등 중요 수중발굴은 비안도 발굴에서 다진 기본기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 글 문환석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수중발굴과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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