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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 조선 영화 태동하다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6-04-18 조회 2078


근대의 여명에 영화가 도착하다
영화는 1900년경 활동사진活動寫眞이라는 이름으로 양풍洋風과 함께 우리나라에 등장하였다. 개항 이후 본격적으로 식
민지 조선의 도시 공간과 일상생활의 변화가 시작되는 결에 영화도 실려온 것이다. 1899년 제물포와 노량진 간 철도가 놓였고,
1901년 8월부터 전기가 들어와 서대문에서 홍릉까지 전차가 운행되었다. 1902년 서울과 인천 사이에 전화가 개통되었고, 1911
년에는 황실에 자동차가 들어왔다. 1883년 《한성순보》를 시작으로 신문, 잡지, 라디오, 영화 등의 대중매체가 확산되었고, 근
대의 생활에 익숙한 인텔리겐차, 월급생활자, 학생과 같은 계층이 형성되었다. 바야흐로 새로운 세계가 밀려들어오는 근대의
여명이었다.
우리나라의 첫 영화 상영 기록은 1903년 《황성신문》 6월23일자 광고에 남아 있다. 이 광고에는 ‘동대문 한성전기회사
기계창에서 국내와 구미 각국의 절승한 풍경을 찍은 활동사진을 상영하는데, 관람 시간은 일요일과 비 오는 날을 제외한 저녁
8~10시이며, 입장료는 동화 10전’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하지만 <상록수>의 작가이자 감독인 심훈을 비롯한 다수의 영화
인들은 이보다 앞서 영화가 상영되었다는 증언을 남기고 있다.

역사적으로도 1900년 이전에 우리나라에서 영화 상영이 이루어졌을 것이란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1895년 프랑스 뤼
미에르Lumiere 형제는 그랑카페에서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La Sortie des Usines Lumière>, <기차의 도착L'Arrivée d'un Train à laCiotat> 등 10여 편으로 구성된 시네마토그래프를 처음 상영했다. 자본가이기도 했던 뤼미에르 형제는 영화에 대한 대중의 호기심이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 신속하게 촬영기사를 각지에 파견하였고, ‘움직이는 사진’은 관객들의 놀라운 반응과 함께 삽시간에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프랑스 상영 후 채1년도 걸리지 않아 영국, 러시아, 미국, 인도, 중국 등지에 잇달
아 영화가 상륙했고, 일본에서도 1897년 2월 첫 상영이 이루어졌다. 당시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 수는 1920년에 이르면 경성
인구의 30%를 차지할 정도로 증가하는 추세에 있었고, 이들은 상위 10%의 경제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일본을 경유하여 들어
온 각종 서구 문물처럼 1900년경에는 활동사진도 조선에 도착하였을 것이란 주장에 힘이 실리는 대목이다.

경성 거리에 극장이 들어서다
활동사진 상영 초기에는 모두 외국 필름뿐이었다. 1919년에야 조선에서 신파 연쇄극인 <의리적 구토義理的仇討>를 제 작했기 때문에, 한국 영화사 초기 약 20년 동안은 외화를 감상感想하는 것이 우리가 경험할 수 있었던 영화의 전부였다. 뤼미에 르와 멜리에스Mélies, 그리고 미국에서 제작된 짧은 필름을 중심으로 모든 프로그램은 1주일 단위로 자주 교체되었다. 뉴스, 희 극, 서부극, 드라마 등의 순서로 약 2~3시간 분량의 프로그램이 만들어져 주로 저녁 시간에 상영되었다. 1920년 전후부터 연간 200편 내외의 외화가 소개되면서 점차 그리피스D.W Griffith의 극 영화, 찰리 채플린의 희극, 그리고 활극活劇이라 불린 서부극 중 심의 장편영화가 인기를 얻었다. ‘값싸고 화려하고 재미있는’영화가 대중문화의 패왕으로 거듭나는 애활가의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당시 극장은 영화뿐만 아니라 창극, 신파연극, 기생의 병창, 유랑극단, 서커스 등을 함께 공연하는 연행의 공간이었다. 1902년 근대 극장의 시초인 협률사가 왕실극장으로 개소했고, 동대문 내 활동사진소를 비롯한 양옥집, 벽돌집, 창고 등을 개조 한 장소에서 활동사진이 상영되었다. 경성은 청계천을 사이에두고 북쪽은 조선인 지역인 종로 중심의 북촌, 남쪽은 일본인 지 역인 진고개현재의 명동과 충무로 일대 중심의 남촌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남촌에는 송도좌(1906), 어성좌(1908), 경성좌(1908), 경 성고등연예관(1910), 대정관(1912), 황금관(1913)이 잇달아 세워졌다. 북촌에도 1907년 단성사를 시작으로, 장안사(1908), 연 흥사(1908), 우미관(1912) 등의 극장이 설립되었다. 1920년까지 경성에 12개의 극장이 문을 열었고, 단성사, 우미관과 함께 대 표적인 조선인 극장이었던 조선극장은 1922년 개소했다. 연흥사의 후신으로 3층 건물에 승강기, 가족관람석, 식당까지 갖춘 1000명 관람 규모의 극장이었다. 극장은 곧 지방도시에도 확산되어 1925년에는 서울 12관, 전국 15관이 성업하였고, 군소도시 에서는 학교나 공회당의 천막극장이 대신하였다.
이 시기의 극장 요금은 특등석, 일반석으로 차이가 있었으며, 극장에 따라 5등급까지 구분되어 있었고, 부인석婦人席이 따로 마련되어 여성의 입장이 가능했다. 부인석은 기생, 여학생뿐만 아니라 여염집 부녀, 노부인에 이르기까지 입장하여 곧 남 자석 이상으로 매일 만원을 이루었다.


신파(新派) 연쇄극이 유행하다
연쇄극은 연극과 영화를 결합한 무대극의 일종으로 야외 장면을 촬영하여 연극 무대가 진행되는 사이사이에 상영하 는 방식이다. 1919년 제작된 <의리적 구토>는 연쇄극이지만 한국 영화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기점으로 인정되고 있다.
신파극단인 신극좌의 김도산은 <의리적 구토>를 공연하면서, 단성사 경영주 박승필의 자본으로 한강철교, 장춘단, 노 량진, 청량리 등을 촬영하여 10분 정도 공연 중간에 상영하였다.‘송산이 간악한 계모 밑에서 재산을 뺏기고 가문이 위기에 처하 자 의리의 칼을 빼든다’는 단순한 내용이었지만 예상 밖의 엄청난 흥행 성공을 거두었다. 이에 1919년부터 1922년까지 4년 간 신파 연쇄극의 전성시대가 열렸고, 임성구의 혁신단, 이기세의 문예단, 김소랑의 취성좌 등이 <지기知己>(1920), <학생절의> (1920) 등 20여 편의 연쇄극을 제작하였다. 그러나 연쇄극은 집안싸움, 복수 등을 소재로 한 비슷한 이야기와 낮은 완성도로 유 행이 지나자 급격히 몰락하였다.

1923년부터 전체를 영화로 촬영한 조선 영화가 나오면서 연쇄극은 사라졌지만, 연쇄극에서 시작된 신파新派는 이후에 도 가장 대중적인 조선 영화 스타일로 남게 되었다. 일본의 인기 신파극을 번안한 <불여귀不如歸>, <금색야차金色夜叉>(장한몽) 등 이 무성영화로 제작되어 큰 인기를 얻은 것이다. 영화의 신파는 봉건 질서에 반하는 자유연애와 개인의 가치, 금전의 논리 등을 옹호하면서 근대의 감성을 대중의식에 끌어들였고, 무엇보다 현실의 설움을 ‘눈물’로 웅변하는 여인의 운명적이고 희생적인 비극을 통해 식민지 민중이 처한 현실을 위무한 근대성의 발현 양식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신파극단 연기자들이 영화에 넘어 오면서 흰 회칠을 한 얼굴에 분장하는 화장법, 독특한 어조, 감정과 극적 모티프를 과장하고 눈물을 흘리는 연기 방식 등을 답 습한 데서 기원을 찾기도 한다.

애초에 신파는 ‘새로운 물결’이라는 뜻으로 전통연극인 구파舊派에 반하는 새로운 연극 형식을 일컬었지만, 1930년대 이 후 신파의 의미가 우연성을 남발하는 전개와 상투적이고 낡은 극복해야 할 것으로 점차 변화하게 되었다.



<아리랑>, 무성영화의 전성시대를 전하다
한국 영화사상 최초의 전성시대는 1923년부터 1935년까지의 무성영화 시기다. 활동사진 대신 ‘영화’라는 용어가 일 반화되었고, 나운규, 이규환, 윤백남, 이필우, 전창근, 심훈 등의 영화인들이 대표작을 내놓았다. 최초의 극영화 <월하의 맹서> (1923)는 조선총독부에서 저축을 장려할 목적으로 만든 계몽영화였으나, 조선인이 각본・감독하였고, 최초의 조선인 여배우 이월화를 비롯하여 조선인 배우와 스태프가 참여하여 한국의 첫 극영화로 인정되어왔다.

이어 제작된 <춘향전>(1923)은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 첫 조선 영화로, 조선극장 사장인 일본인 하야가와 고슈早川孤舟가 결성한 동아문화협회에서 만든 작품이다. 조선극장 변사 김 조성과 개성 명기名妓 한룡이 이도령과 춘향 역을 맡았다. <춘향전>은 조선인이 나오는 영화에 몰린 관객들로 흥행에 크게 성공 하였고, 단성사에 활동사진 촬영부가 조직되어 조선인만으로<장화홍련전>(1924)을 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판소리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을 중심으로 ‘조선에 활동사진이 생긴 이래 초유’의 흥행을 이루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 조선 영화들이다.

대중의 열광적인 조선 영화에 대한 반응에 이어 1926년 나운규 감독의 <아리랑>이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아리랑>은 식민지 조선의 저항적 민족주의를 대표하는 전설적인 작품으로, 민족정신을 형상화하였고, 한국 영화의 수준을 올려놓았으 며, 저항성이 투영되었다는 점에서 한국 영화사 최대의 문제작으로 꼽힌다. 1950년대까지 순회 상영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 으나 현재 필름이 소실된 상태이다.

무성영화 시기에는 영화 해설자인 변사辯士의 역할과 스타성을 빼놓을 수 없다. 조선의 변사는 1908년경 일본에서 건너왔다고 추론하고 있으며, 경성의 극장가가 형성된 1913년경부 터 발성영화가 제작되기 시작한 1935년경까지 전성기를 누렸다. 경성의 개봉관에는 극장마다 3~4인의 변사가 있었으며, 급여가 고급관리 월급의 두 배 이상인 인기 직종이었다. 허가제로 운영되어 1921년부터 경기도 경찰부에서 주관한 등용시험에 합격해야 했다. 장르별로 주요 인물이 구분되어 있었으며, 서상호,김덕경, 최병룡, 성동호, 김조성, 서상필 등이 유명세를 떨쳤다.

변사는 배우이자 해설자(narrator)로 서양에서는 영화사 초기에 잠시 존재했다가 사라졌지만, 우리나라를 비롯한 일본, 태국 등지의 아시아 지역에서는 무성영화 기간 동안 존속하였다. <아리랑> 같은 영화가 상영되면 변사가 민요 ‘아리랑’을 부 르며 크게 외쳐댔고, 관객들이 흥분해 같이 동조하여 일본 당국이 경찰을 배치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영화의 힘은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는 진정성에 있다. 우리 영화가 시간을 지속하여 생명력을 발휘 할 수 있는 것도 우리의 문화적 경험과 역사에 있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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