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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대중가요 100년, 최초의 노래들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6-04-18 조회 3218


대중가요의 등장 배경
한국 대중가요의 첫 번째 작품을 무엇으로 볼지는 사실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어떠한 경우이든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것은 대중가요가 문화현상으로 등장하는 데 영향을 미친 19세기 말 이래의 여러 가지 배경이다. 신분제 폐지와 자본주의화·도시화 확산에 따른 소비 대중의 형성, 음반·방송·출판물·극장 등 다양한 근대 매체의 보급, 전통음악의 통속적 발전, 종교·교육·국가의례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한 서양음악의 수용과 통속화 등이 그러한 배경의 주요 내용이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확인되는 여러 배경들속에서 형성된 대중가요는, 무엇보다 매체성과 상업성이 두드러진 음악이었다. 그리고 형식에서는 재래 전통음악의 틀을, 내용에서는 계몽적 창가의 틀을 벗어난 새로운 음악이었다. 최초의 대중가요 후보로 일각에서 거론되기도 했던 <학도가>는 유행 시기가 보다 앞서고 1913년에 이미 음반이 만들어지기도 했지만, 뚜렷한 계몽성을 떨치지 못했고 음반에 수록된 가사가 관제적 성격마저 가지고 있었으므로 대중가요로 보기는 적절치않다. 그런 점에서 번안곡이란 한계가 있었지만 다른 면에서는 최초의 대중가요가 되기에 손색없었던 것이 <카추샤의 노래>
였다.





음반을 통한 유행
초연 무대에서 여장을 하고 카추샤 역을 맡은 배우 고수철이 퉁소와 바이올린 반주에 맞춰 불렀던 <카추샤의 노래>는 극장과 출판물을 통해 1910년대 말 이후 1920년대까지 크게 유행했으나, 뜻밖에도 음반에는 수록되지 않았다. 1929년에 발매된 <부활> 극 음반에 삽입곡으로 일부 포함은 되었지만, 노래만으로 녹음된 음반은 결국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1923년에 음반이 발매된 번안곡 <탕자자탄가>는 또 다른 의미에서 최초의 한국 대중가요라 할 만하다.
미국에서 찬송가로 불리다가 일본으로 전해지고, 일본에서는 창가와 대중가요로 불리다가 식민지 조선에까지 유입된 <탕자자탄가>는, 3.1운동 직후 1920년 무렵부터 급속히 유행하기 시작했다. <탕자경계가>, <청년경계가>, <이 풍진 세월>,<이 풍진 세상> 등 여러 가지 다른 이름으로도 불린 <탕자자탄가>는 오늘날 통상 <희망가>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유행 초기에는 <카추샤의 노래>와 마찬가지로 노래책에만 실렸지만, 1923년에 기생들이 타령조로 불러 녹음한 음반이 제작되면서 한국 대중가요의 새로운 단계를 열었다.
연인과 함께 현해탄에 몸을 던져(자살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으나, 근거는 없다) 세상을 놀라게 했던 정사의 주인공, 소프라노 가수 윤심덕의 유작으로 유명한 번안곡 <사의 찬미>는<탕자자탄가>보다 3년 뒤인 1926년에 음반으로 발표되었다. 따라서 거기에 어떤 최초의 의미를 부여하기는 어렵다. 다만 곡조는 1920년대 전반에 이미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다 하더라도 가사와 결합한 노래 자체는 음반을 통해 처음 발표되었다는 점, 그리고 윤심덕의 죽음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음반 구입으로까지 이어져 당시로서는 놀라운 판매 기록을 세웠다는 점에서는 <사의 찬미>가 가지고 있는 나름의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다. 6년 뒤인 1932년 신문 기사에 의하면, 그때까지 <사의 찬미> 음반 판매량이 1만 3000장 정도였다고 한다. 어쩌면 최초로 음반 판매 1만 장을 돌파한 노래가 <사의 찬미>일지도 모른다.

번안에서 창작으로
1926년 10월, 그러니까 <카추샤의 노래>가 초연된 지10년 반이 지났을 때, 단성사 무대에서는 또 다른 최초의 대중가요가 발표되었다. 지금까지도 전설로 회자되고 있는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 이른바 <본조 아리랑>이다. 영화 주제가인 <아리랑>은 그 전까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노래이므로 명백히 새로 창작된 대중가요로 볼 수 있는 작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민요로 알려져 있는 경우가 많은데, 가장 큰이유는 작자를 분명하게 알 수 없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가사는 나운규가 어려서 들었던 사설을 다듬어 직접 쓴 것으로 보이나, 곡조는 단성사 악대의 누군가가 만들었을 것이라 추정만 할 뿐 확실하게 알 수 없다.
작자를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최초의 창작 대중가요는 <아리랑>보다 1년여 뒤인 1927년 10월에 역시 단성사에서 초연된 영화 주제가 <낙화유수>이다. 요즘은 <강남달>이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는 이 곡은 영화 <낙화유수>의 주제가로 만들어졌는데, 영화의 각색을 담당했던 단성사 소속 변사 김영환이 김서정이라는 이름으로 직접 작사·작곡한 작품이다.
<아리랑>과 <낙화유수>는 1928~1929년에 앞서 본 <카추샤의 노래>처럼 영화 내용을 축약해서 만든 극 음반 삽입곡으로 먼저 녹음이 이루어졌고, 1929~1930년에는 노래만 수록된 음반으로도 제작되었다. 두 곡보다 조금 늦게 역시 김서정이 작곡한 <세 동무> <암로> 등의 영화 주제가도 만들어져 비슷한 방식으로 음반화되었다. <아리랑> 이후 1920년대 후반은 한국 대중가요가 번안 일색의 단계에서 벗어나 창작의 시기로 첫걸음을 내딛은 때였다.






유행가 시대의 개막
1916년 <카추샤의 노래>로 실제 작품이 등장하기 시작한 한국 대중가요는 14년 뒤인 1930년에 그 초창기의 역사를 일단락 짓게 된다. 발표 조건 면에서 손색이 없는 최초의 작품이 이때 나타나기 때문이다. 1930년 3월에 발매된 <유랑인의 노래>와 <봄노래 부르자>는 음반을 통해 비로소 발표되었고, 작자도 확실히 알 수 있는 창작 대중가요의 첫 번째 사례이다. 이후에도 번안곡이나 작자 불명의 작품, 음반에 담기지 않은 노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1930년대부터는 대중가요가 완연한 성장기에 접어들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흔히 ‘유행가’라 통칭되었던 1930년대의 대중가요는 빠른 성장세만큼이나 다채로운 면면을 보여주었다. 비슷한 시기에 일본 대중가요의 영향을 많이 받은 음악 스타일, 이른바 ‘트로트’가 그 당시 한국 대중가요를 천편일률적으로 지배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으나, 실상은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통속적 전통음악 양식을 계승한 장르인 신민요가 한때 ‘트로트’와 자웅을 겨룰 만큼 성황을 이루기도 했고, 비록 소수이긴 했어도 재즈와 라틴음악을 소화해내려는 진지한 시도도 있었다. 물론 식민지 현실에서 피하기 어려웠던 여러 가지 제약들로 인해 1930년대 후반 이후로는 군국가요 같은 암울한 노래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100년 전, 80년 전 노래의 자취를 더듬어보는 일이 지금시점에서는 다소 현실감 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 이미 도쿄나 오사카, 베이징이나 상하이에서 한국 가수들이 한국 대중가요를 불러 갈채를 받았다는 것을 안다면, 그때 이미 저고리시스터즈 같은 걸그룹(?)이 화려한 퍼포먼스 무대를 선보였음을 안다면, 거리감의 폭이 그렇게 넓게만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 당시와 오늘날 한국 대중가요의 모습을 같은 선상에 놓고 단순하게 비교하거나 등치시킬 수는 없는 일이지만, K-Pop과 유행가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도 당연히 아니다. 지난 100년 대중가요의 역사는 지금까지 우리가 피상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보다 훨씬 깊고 넓다. 그리고 그 역사 속에서 과거와 현재는 생각보다 훨씬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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