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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 한국의집의 탄생, 영빈관에서 한국의집까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8-12-14 조회수 : 4948
하단내용참조
해방 후에는 ‘영빈관’, 6·25전쟁 때는 ‘코리아 하우스’로

박팽년의 절개와 지조가 깃든 한국의집 터는 한때 조선총독부 제2인자인 정무총감 관저로 사용되며 오욕의 세월을 견뎌야만 했다. 광복의 날 아침에 정무총감이 조선을 대표하는인물로 몽양 여운형에게 치안 유지에 협조해 줄 것을 요청하는, 사실상의 항복 절차가 이루어진 역사적인 장소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후 한동안 한국의집은 지금과 같은 공간으로 거듭나기까지 수많은 사연과 곡절을 겪어야만 했다.
   해방 이후 한국의집은 적산가옥으로서 주한미군정의특별관리하에 들어갔다가 1948년 정부가 수립된 이후 공보처 산하의 정부 소유물로서 내외 귀빈들의 숙소인 영빈관으로 활용됐다.
   대표적으로 이 무렵 한국의집은 6·25전쟁 기간 중 밴플리트(James A. Van Fleet) 미8군사령관의 관저로 이용됐다. 1951년 4월 맥아더가 해임되면서 리지웨이 장군이 미극동군사령관으로 영전해 가자 밴 플리트 장군이 1951년 4월 그의 후임으로 한국에 도착했다.
   밴 플리트 장군은 1953년 3월 전역할 때까지 2년 가까이 6·25전쟁을 지휘했고 재임 중 육군사관학교를 설립하는 등 대한민국 육군의 전력을 강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하지만 B-26 폭격기 조종사였던 그의 외아들 제임스 공군대위가 1952년 4월 작전 중 전사했다. 총사령관의 아들이한반도에서 산화한 것이다. 훗날 이승만 대통령은 미 의회연설에서 밴 플리트 장군을 가리켜 ‘한국군의 아버지’로 불린다고 상찬했다.
   한국을 떠난 다음에도 밴 플리트 장군은 1957년 뉴욕에 ‘코리아 소사이어티(The Korea Society)’를 설립했다.한·미 양국 국민의 ‘문화와 예술’ 등의 교류를 도모하자는것인데, 이는 그가 한국의집에 머물며 보았던 한국의 자연과아름다움, 전통문화와 예술에 대한 감회와 애정이 묻어나는증거라고 할 수 있다.
   당시 한국의집에는 미군이 주둔했고, 관저는 미군들에게 ‘코리아 하우스’로 불렸다. 밴 플리트 장군은 자기 숙소외의 가옥과 시설을 미군의 편의시설과 게스트 하우스로 활용하도록 했다. 6·25전쟁이 한창인 가운데 한국의집은 미8군을 방문하는 주요 인사들의 숙소와 휴게소 역할을 했던 것이다. 당시 참모총장인 백선엽 장군은 육군본부가 있는 대구에서 미8군과의 협의를 위해 자주 서울로 와야 했는데, 그때마다 밴 플리트 장군의 배려로 필동의 코리아 하우스에묵을 수 있었다.
   1952년 말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가 방문할 것에대비해 밴 플리트 장군과 함께 한국군 20개 사단 증강계획의 밑그림을 그린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밴 플리트 장군과백 장군은 낮에는 동숭동의 미8군사령부에서, 밤에는 필동의 코리아 하우스에서 6·25전쟁은 물론 전쟁이 끝난 뒤의한국군 청사진을 함께 그려 나갔다. 이때 세운 계획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지원하에 전후 한국군을 개편하고 강화하는데 근간이 됐다. 
   이듬해인 1953년 8월 4일 밤 10시. 야심한 시각임에도불구하고 백두진 총리 이하 변영태 외무장관과 3군총참모장그리고 100여 명의 국내외 기자들이 여의도비행장에 운집해귀빈을 기다렸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의 가조인을 위해 존 포스터 덜레스(John F. Dulles) 미 국무장관 일행 8명이 방한한 것이다. 당시 6·25전쟁 휴전회담 타결 가능성이 높아지자 그동안 휴전협정에 반대해 왔던 이승만 대통령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을 압박하기 위해 반공포로를 석방하며 시위를 벌였다. 기습적인 반공포로 석방 조치에 공산 측이 맹렬히 반발하자 휴전회담이 결렬될 위기에 놓였다. 이에 미국은한국에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고 경제원조를 제공하겠다고 나섰다. 한때 고분고분하지 않은 이승만 대통령을 제거하려고까지 했던 미국이지만 결국 ‘채찍’보다는 ‘당근’을 주기로한 것이다. 이에 실무협의를 거쳐 조약의 가조인을 위해 미국 정부를 대표해서 덜레스 국무장관이 방한했다.
   밤늦게 도착한 덜레스 장관 일행의 숙소는 영빈루(迎賓樓)라고도 불렸던, 바로 한국의집이었다. 자동차가 여의도를출발해 숭례문과 한국은행 앞을 지날 때 덜레스 장관은 창문을 열고 전쟁의 상흔이 역력한 건물 잔해들을 바라볼 수있었다. 그는 필동의 영빈루에 도착해서 약 1주일 간 머무르며 동양의 한 작은 나라와의 방위조약에 조인해야 하는 본인의 운명을 생각하며 매일 밤 잠들었을 것이다. 8월 8일 중앙청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덜레스 국무장관과 변영태 외무장관이 협정에 서명했다. 이 협정은 현재까지 한·미동맹의 근간이 되고 있다. 한국의집은 한국을 수호하는 동맹조약이 체결되는 동안 미국의 대표가 잠을 청한곳이다.
   이후 코리아 하우스는 주로 주한미군과 외국인의 위락시설로 이용됐다. 1951년에 설립된 주한미군 위문단(USO)은 주한미군의 사기진작 프로그램과 한·미 친선행사를 주관했는데, 코리아 하우스는 주한미군을 태운 USO 버스가 한국 문화를 체험하기 위해 들르는 중요 탐방코스 중하나였다.
   이 무렵의 사진들을 보면 서양식 탁자와 테이블, 소파와바(bar), 재떨이 등의 가재도구와 시설들이 눈에 띈다.코리아 하우스에는 외국인들에게 한국인의 생활과 취미 등을 소개하기 위해 곳곳에 한국 전통의 가재도구와 공예품 등을 진열하고 군인들에게 한식과 간단한 오락거리를제공했다. 탁구대와 당구대는 기본이고 도서실과 음악실 같은 편의시설도 마련하고, 장기와 바둑도 둘 수 있었다. 미국본토의 위문공연단이 방한해서 전국의 주한미군 부대를 돌며 순회공연을 할 때에도 코리아 하우스에서 먼저 공연을선보였다. 한옥이 어우러진 이국적인 풍경 속에서 미국인들이 모처럼 회포를 푸는 사교클럽의 역할을 한 것이다.


1957년 정부 주요 시설로 새 단장 후 한국의집으로 공식 명명

1955년 공보처가 대통령 직속 공보실로 변경되자 코리아하우스, 영빈관 또는 귀빈관으로 불리던 한국의집은 정부의주요 시설 중에서도 중요도가 매우 높아지게 된다. 이 당시귀빈관의 관리비가 정부 예산의 중요 항목으로 계상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증거가 있다. 1956년의 세출 예산 중 국무원의 첫 번째 항목으로 ‘귀빈관 관리비’ 24만 3,100원(圓)이 책정됐다. 이는 국무원의 정부청사 임차비 41만 5,900원다음으로 큰 예산이었다. ‘귀빈관’의 관리와 운영이 정부청사 운영 다음으로 중요하다는 점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렇게 중요한 시설이었기 때문에 귀빈관은 해방 이후 처음으로대규모 단장을 하게 됐다. 1957년까지 기존의 노후하고 퇴락한 일본식 건물이 철거되거나 개수됐다. 정문과 문향루 등일부 건물은 다른 곳으로 옮기고 그 규모를 확장했다. 내부인테리어와 시설 등도 크게 바뀌었다. 서양식 구조물과 가구대신 마룻바닥과 한국 전통의 실내장식 그리고 전통 가구들이 배치됐다. 주요 건물의 기본 구조는 어쩔 수 없었기 때문에 지금 관점에서 보자면 서양식과 일본식 그리고 한국 전통 양식이 혼합됐다.
   마침내 1957년 6월 24일 공보실이 처음으로 한국의집이라고 명명했다.
   당시 공보실의 한국의집 설립 목적은 지금의 기능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외국인에게 한국의 전통생활과 문화를소개하고 한국의 아름다움을 한곳에서 즐길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전통가옥과 궁중음식, 전통문화상품 진열, 전통공연, 전통혼례 등을 통해 한국의 맛과 멋을 보여주고자 했다. 개관식에는 주한 외국인 수백 명을 초청해 한국의 전통혼례식과 널뛰기, 그네 등의 전통놀이를 선보였다. 이를 바라보는 외국인들은 하나같이 ‘뷰티풀’ ‘원더풀’을 연발하며 감탄하기 바빴다. 이때 프로그램을 잠깐 살펴보면, 1958년 오재경 공보실장이 개관 1주년에 즈음해서주한유엔군사령부 관계자들에게 보낸 초청장에 적힌 한국의집 행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다.
   그네, 시소, 줄넘기, 제기차기, 팽이치기, 바둑과 장기,환갑잔치, 전통혼례식, 쥐불놀이, 민요, 승무, 무당춤, 강강술래, 타작, 다리미질, 민속 생활용품 및 전통악기 전시, 미국 어린이 성가대 공연(특별)
   1957년 6월에 발족한 한국의집은 이후 1년여 동안 1만6,000여 명의 외국인과 군인들이 드나들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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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집을 찾은 주요 귀빈들과 비하인드 스토리

오 전 장관은 1919년 황해도 옹진에서 독립운동가이자 목사인 오택관의 아들로 태어나 1941년 일본 릿쿄(立敎)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공보실장과 공보부 장관을 거쳐 CBS 이사장, 동아일보 사장을 역임했다. 그가 역점을 두고 새로 단장한 한국의집의 첫 번째 귀빈은 월남공화국의 응오딘지엠(고딘디엠) 대통령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으로 1957년 9월 18일 응오딘지엠 대통령이 방문했을 때 한국의집은 처음으로 국빈의 숙소로 이용됐다.
   국빈이 매번 방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평소에는 정부 부처의 필요에 따라 로비의 장소로도 활용됐다. 요즘도그렇지만 국회의 국정감사 기간에는 대개의 정부 부처가 국회의원들의 공세에 쩔쩔매기 마련인데, 이 무렵 오재경 공보실장만은 ‘싱글벙글’했다는 신문기사가 있다.
   대통령 직속의 공보실에 대한 국정감사에서는 감사를하러 온 국회의원들을 일단 ‘코리아 하우스’로 모시고 가서으리으리한 방에서 산뜻한 점심을 대접한 후에 다시 공보관으로 안내해 방송시설들을 구경시킨 다음 영화검열실로 초대해 ‘데보라 카’가 나오는 영화를 감상시켰더니 “국회의원들이 감탄해서 입만 벌립디다!”라고 오재경 공보실장이 자랑했다는 내용이다. 궁궐 같은 한옥에서 풍악이 울리는 가운데 최고의 한식으로 배를 채운 후 <지상에서 영원으로>와<왕과 나>의 여주인공으로 1950년대를 풍미한 할리우드 여배우가 등장하는 최고의 영화로 눈요기를 시켜 주니 국정감사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는 얘기다. 그런 시절도 있었다.
   한국의집은 오재경 공보실장의 수완으로 정부의 로비장소로 활용됐을 뿐만 아니라 이승만 대통령의 집권연장 ‘도구’로도 이용됐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7년 개관식은 물론이고 이듬해인 1958년의 1주년 행사에도 연거푸 한국의집을 찾았다. 이 무렵 한국의집은 허전한 내부 장식에 고민하던 중 국내 최고의 서화가들을 데려다가 직접 산수화를 그리고 글씨를 쓰게 했다. 이들 서화들은 각각 한 점씩 또는 병풍으로 만들어 한국의집 방마다 걸고 장식을 하게 됐다.
   그리고 개관 3년차인 1959년 3월 26일에는 84세 생일을 맞아 이 대통령은 한국의집에 서화가 50명을 초청해 연회를 베풀었다. 이 자리에는 화가 고희동·김기창, 서예가손재형·김기승 등 당대 최고의 화가와 서예가들이 참석해 서예첩에 즉흥시와 즉석화를 그려 이 대통령에게 증정했다.대통령의 만수무강과 정권의 안녕을 축원하는 자리였지만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이듬해인 1960년의 4·19혁명 이래그는 한국의집을 다시 찾지 못했다.
   이후 1970년대 말까지 한국의집은 군사독재 정권의 로비장소로 활용되는 한편 지금의 한국의집이 태어나기 전까지 해외에 한국의 전통을 홍보하는 기관으로서의 정체성을모색하는 진통을 겪어야 했다.



1960년대 군사정권하에서는 ‘한국소개관’으로 개명…연회와 만찬의 장으로

1961년 6월 14일 저녁. 5·16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장군은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 자격으로 국내 언론사의 핵심 간부들을 한국의집으로 초청해 간담회 겸 만찬을개최했다. 당시 기사에는 ‘혁명과업 완수에 협조를 요망하는한편 상호의견을 교환하면서 환담하였다’고 돼 있다. 당시정부의 무능과 사회적 혼란에 대한 국민적 비판이 최고조에달한 때인지라 지식인과 언론계까지 군인들의 쿠데타를 온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들이 존재하던 가운데 그 주역인 박정희 장군이 언론인들을 초청해서 ‘우국충정에 따른 혁명 불가피론’과 ‘민정이양’에 관한 장밋빛 전망 등을 암시하며 언론인들의 환심을 사려 했을 것이다.
   이는 사실상 쿠데타를 일으킨 군 수뇌부가 언론인들에게 쿠데타의 정당성을 역설하고, 이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을 조성하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는 자리이기도 했다. 이 자리에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도 참석했다. 이 모임을 기점으로 각언론사들은 대체로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조처를 옹호하거나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한편 이날 이후 『사상계』 등 잡지에 ‘군사혁명’을 비판하는 글을 실은 함석헌과 장준하 등은 중앙정보부에 연행돼취조와 고문을 당해야만 했다. 한국의집이 언론인들을 불러모아 군사정변을 ‘혁명’으로 미화하고 군사독재 정권의 기반을 마련하는 로비의 장으로 활용된 것은 아쉬운 일이다. 군사정부는 정변 한 달여 만인 6월 21일 정부조직법을 개정해공보실을 공보부로 변경하고, 1964년에는 문교부의 문화재관리국과 국립박물관 등 문화업무를 공보부로 통합시켰다.그리고 마침내 공보부는 1968년에 문화공보부로 확대 개편됐다. 이때부터 한국의집은 ‘한국소개관’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하지만 외국인들은 ‘코리아 하우스’라는 명칭을 그대로사용했다. 군사정권하에서 한국소개관은 군사외교 측면에서도 매우 유용하게 활용됐다. 이 무렵 휴전선을 감독하는 군사정전위원회의 한국군은 스위스·스웨덴·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의 4개국으로 구성된 중립국감독위원회 군인들을한국소개관으로 초대해 리셉션과 만찬을 베풀곤 했다. 비록휴전상태를 감시하러 온 중립국과 공산권 국가의 현역 군인들이지만 고즈넉한 분위기의 한옥에서 맛있는 한식과 전통주를 즐기며 이국의 풍류를 감상하노라면 평화를 희구하는 한국인들의 정서와 감흥을 자연스레 이해할 수 있었을것이다.
   그리고 문화공보부는 해마다 추석과 같은 명절 기간에는 주한외교 사절과 유엔군 장병, 중립국감독위원회 장병,외신기자들을 한국소개관으로 초대해 가야금 병창과 부채춤·길쌈놀이·강강술래 등 민속놀이와 춤을 선보여 그들의 향수를 달래주곤 했다.



1978년 ‘한국의집(Korea House)’으로 개칭,재건 사업으로 지금의 기틀을 마련

1970년대에는 한국소개관의 상급 기관에 대한 조직 개편이유난히 많았다. 1972년에는 국립공보관 직제가 개정됨에 따라 공보관 기능이 국내공보와 해외공보로 이원화되면서 해외홍보관이 신설됐다. 이에 따라 1972년 9월 5일 ‘한국소개관’은 해외홍보관의 소속기관이 됐다.
   그러다가 1978년 11월 문화공보부가 국립공보관과 ‘한국소개관’의 기능을 통합하고 대외명칭을 지금의 ‘한국의집(Korea House)’으로 개칭해 오늘에 이르게 됐다. 이때의명칭 개편은 단순히 이름만 바꾸는 정도가 아니었다. 일제강점기의 정무총감 관저, 코리아 하우스, 한국소개관 등 지난세월의 면모를 완전히 일소하고, 거의 새로 짓다시피 대대적인 개·보수 작업을 거쳐 그 역할과 기능을 완전히 새롭게계획한 것이었다.
   정부는 그해 말부터 1980년 12월 26일까지 무려 약 20억 원의 예산을 투입해 지난 세월의 영욕을 지켜본 여러 채의 건물들을 대부분 철거하고, 한국 전통 건축양식과 현대미를 조화시켜 건물 4동(본관, 부속건물, 정문, 협문)을 신축하고, 문향루를 보수하고, 주차장과 경내조경공사 등을 거쳐현재의 건물구조로 완전히 확장·신축했다. 그 사이 대통령과 정권이 바뀌고 고통스러운 사회적 사건들도 잇따랐지만다행스럽게도 한국의집 재건 사업만은 큰 변고 없이 진행됐다. 건물이 완공된 후 약 3개월의 기간 동안 내부시설과 조직을 정비해 마침내 1981년 2월 완전히 새로운 한국의집을개관하게 됐다. 토지와 건물을 비롯한 모든 재산과 관리 운영권을 문화재보호협회(현 한국문화재재단)에 위임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기능과 역할도 더욱 확대됐다. 민속극장을 신설·확장해 가며 전통 민속공연을 매일 상설로 운영하기 시작했고,문화상품관 등의 부대시설을 갖춰 외국인뿐만 아니라 내국인에게도 상시 한정식과 전통음식을 제공하며, 돌·백일·성년례·혼례·수연 등 전통가례와 세시풍속 및 공연예술과 문화재를 소개하고 보급하는 국민적인 관광명소로서 거듭났다. 또한 해외공연도 추진해 직접 세계무대에 나가 한국전통과 예술을 홍보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식민지배와 전쟁, 쿠데타 같은 정치적 격랑 속에서도 일찍이 위정자든 군인이든 관료든 전통문화예술인이든 누구나 할 것 없이 한국 고유의 멋과 맛 그리고 풍류를 외국인과세계에 널리 알리고 평화와 교류의 문을 열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던 것만은 확실하다. 그때의 피와 땀방울이 반세기를 지나 국립국악원과 국립극장, 국립민속박물관, 해외 한국문화원 등 다방면의 전문 분야와 여러 공간으로 퍼져 나갔다는 사실이야말로 한국의집이 오롯이 누려야 할 보람이자긍지일 것이다.




한국의집을 지켜본 사람
# 김동호 전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영화배우도 감독도 스태프도 아니지만 영화인으로 불리는 이가 있다. 김동호 위원장. 1996년부산국제영화제조직위원회 집행위원장을 맡은 이래 세계적인 영화제로 발전시켰으며, 많은영화인들로부터 여전히 존경을 받는 어른이다. 많은 사람들이 영화인으로 알고 있지만, 그는 1961년부터문화공보부에서 28년간 근무하고 문화부 제2대 차관까지 지낸 정통 관료 출신이다. 1961년 스물네 살의나이로 문화공보부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해 영화진흥공사 사장, 예술의 전당 초대 사장, 공연윤리위원회위원장, 문화부 차관을 거쳐 1996년부터 2010년까지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 일했다. 그 누구도생각지 못한 부산에서 한국 최초의 국제영화제를 출범시켜 세계 영화인들의 축제의 장으로 만든 그는영화행정가를 넘어선 영화인으로 알려져 있다.
이번 『월간 문화재』가 한국의집을 주제로 특집호로 발간되는 동기도 한국문화재재단 진옥섭 이사장과김동호 위원장이 저녁식사 자리에서 환담을 나누는 과정에서 비롯되었다. 1957년 개관한 이래1960년대와 1970년대를 거쳐 1981년 재개관하기까지 한국의집을 관리·감독하였던 문화공보부 담당공무원으로서 한국의집에 대한 그의 인연을 들어봤다.


취직이 급해서 채용공고 보고 지원한 게 공보부 공직생활의 시작이죠

고향이 강원도 홍천인데 세 살 때 서울로 이사를 왔어요. 서울재동국민학교를 나와서 경기중·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 법대에입학했죠. 군대를 다녀와서 4학년 마치고 9월 졸업을 앞두고있을 때 취직을 할 생각밖에는 없었어요.법대를 나왔지만 가난해서 사법고시는 꿈도 못 꿨지요. 5·16직후에 제일 먼저 공개채용한 곳이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요원 모집이었는데, 졸업예정자는 안 된다고 해서 지원을 못했죠. 그 다음에 바로 채용 공고가 난 곳이 공보부였어요.그때는 공보부에서 방송요원까지 동시에 공모를 해서 채용을했는데, 100명 정도를 뽑았지요. KBS에 갈 사람은 가고,국립영화제작사에 갈 사람은 가고, 행정직은 30명을 뽑았죠.그렇게 해서 취직을 하고 공보부에서 촉탁(현재의 임시직)과주사보·주사를 거쳤는데, 당시에는 행시 대신에 총무처에서주관을 해서 주사로 2년 근무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전국에서공개 승진시험을 보게 해 합격한 사람을 사무관으로 임관하도록하는 제도가 있었어요. 주사로 일하면서 그 시험을 통과해사무관은 남들보다 좀 빨리 됐죠.
당시 공보부 장관은 군인 출신인 심흥선(沈興善, 1925~1978)씨가 하다가 오재경(吳在璟, 1919~2012) 장관이 부임했죠.오재경 장관이 부임하면서 코리아하우스를 새롭게 바꾸고공보부 내 해외홍보의 전진기지로 만드셨어요. 그때 저는기획실에서 근무하기도 했고, 교육부에서 문화업무를 인수받아1968년 문화공보부가 되고 제가 퇴직할 때까지 28년 동안문화공보부에서 근무를 했습니다. 그 때문에 1979년에 발간된『문화공보 30년』 책을 거의 혼자 집필할 정도로 누구보다문화공보부 역사를 잘 알고 있죠.



한국의집은 당시에 한국을 해외에 소개하기 위한 전진기지였지요

다들 알다시피 한국의집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의관저였고, 아마도 환수재산으로 추측이 되는데, 광복 후에공보처(국무총리 산하)에서 소유하여 정부홍보관으로 써야겠다는생각으로 한국의집을 해외공보관의 부속기관으로 흡수시켰지요.한국을 알리는 역할을 하는 곳이 해외공보관인데, 거기의 산하기관으로 소속시켜 운영하다 보니 한국의집을 관리하는관장도 공무원이었지요.



유명 예술가들의 재능기부도 받았죠

오재경 전 문화공보부 장관이 우리 문화를 해외에 알리기 위한공간으로 활용되려면 한국의집에 저명한 서예가·화가들의작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을 했죠. 그래서 한국의집에 저명한서예가·화가들을 초청해서 저녁을 근사하게 내고 술을 거나하게대접한 후에 먹과 벼루를 넓은 홀에 준비해 놓고 화가는 그림을그리게 하고 서예가들은 글씨를 쓰게 했지요. 김기창 화백 등당대의 유명한 화가들과 서예가들이 술 한잔씩 들고 여기서작품을 만들어 제공을 했죠. 다만 현장에서 바로 그린 것들이라낙관은 없었어요. 아무튼 그래서 한국의집 벽을 유명 예술가들의작품들로 도배할 정도로, 한국의집이 굉장히 유명한 작품들을많이 가지게 됐죠.
지금 보여준 사진(68페이지 18번 사진 참조)은 1958년에 있었던사진인 거 같은데, 저도 1961년 입사 후에 그러한 장면을 한두번 본 적이 있었어요. 그만큼 이곳 한국의집을 한국 홍보의최전진기지로 생각했고, 웬만한 정부행사들이 많이 이루어졌죠.문화공보부에서도 아주 많이 이용했어요. 그 당시 모임 장소로적당한 데가 따로 없고 여기가 제일 좋으니까, 연말에 장관이실·국장들을 초청해 송년회를 가진 것은 물론이고 평소에회식도 많이 하고 그랬죠.



한국문화재보호협회를 창설해 한국의집 운영을 맡겼죠

한국의집이 재단 소속으로 바뀌게 된 것은 제가 기획관리실장을 하고 박종국 씨가 기획관리실장을 하시다가 그만두게 되었을때 우리 둘이서 한국문화재보호협회를 창설했어요. 그래서 초대이사장을 박종국 씨가 하시고 한국의집은 한국문화재보호협회소속으로 민간화했죠.
* 편집자 주
1979년 문화공보부(文化公報部)에서 발행한 『문화공보30년(文化公報 30年)』 책자에 따르면 문화체육관광부의 전신인공보처는 1948년에 국무총리 산하에 설립되었다. 이후 1955년대통령직속 공보실로 개편되었다가 1961년 공보부, 1968년문화공보부로 개편되었다.그리고 이 책자에 ‘한국소개관’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한국의집은 『대통령령 제1938』호에 따라 1964년 9월 22일본부 소속 아래 한국소개관(韓國紹介館)을 신설하고, 문화공보부문화선전국 해외과의 소속 기관으로 둔다는 내용이 나온다.1968년 중앙공보관 소속으로 변경되었다가 1972년 해외공보관소속으로 이관된다. 『대통령령 제9420호』 해외공보관 직제에따르면 다음과 같이 한국소개관의 역할을 설명하고 있다.



제14조 (한국소개관)
①외국인에 대한 우리나라의 소개, 선전에 관한 사항을 분장하게
하기 위하여 해외공보관장 소속하에 한국소개관을 둔다.
②한국소개관에 사무장 1인을 두되, 행정사무관으로 보한다.
③사무장은 해외공보관장의 명을 받아 소관사무를 처리한다.
④한국소개관의 운영에 관한 사항은 문화공보부장관이 정한다.

한국의집은 1948년 이후 국내외 귀빈이 회합하는 귀빈관으로사용되다 1956년부터 1957년까지 2년간 노후하고 퇴락한기존 건물은 개수하여 1957년 6월 24일 개관하였다. 기존의일본식 건물을 철거하고 한옥으로 개수하였고, 정문과 문향루등 일부 건물을 이축하여 운영하였다. 문화공보부에서1978년까지 운영하고 3년 동안 신축공사를 한 후 1981년문화재관리국(문화재청의 전신)에서 한국의집을 재개관하였다.


부산국제영화제의 태동이 지금 이 자리(한국의집 청우정)에서 이뤄졌지요

당시에 우리가 영화제를 하려고 할 때, 마침 조순 서울시장이서울에서 국제영화제를 하겠다고 기자회견을 해서 발표를하려고 제작자협회, 극장협회, 영화인협회 회장 등을초청했어요. 그런데 이분들이 그 자리에서 시기상조라며 막고함을 지르고 뒤집어엎는 바람에 조순 시장이 놀라서 포기를해 버렸어요.
그런데 그때 저희는 그전부터 준비를 하고 있다가 당시문정수 부산시장이 영화계에 있는 단체 대표들이 어떻게생각하는지 알아보고 싶다고 해서 서울에서 단체장들모시고 자문회의를 한 거죠. 한국영화인협회 김지미 이사장,서울극장협회 곽정환 회장, 한국영화제작가협회 이태원 회장등을 모시고 만찬을 하면서 올해 9월에 부산국제영화제를출범하겠다고 했더니 이제 그분들이 좀 난처해진 거예요.서울시에서는 내년에 하겠다고 한 것을 시기상조라며 책상엎고 난리를 쳤는데 당장 9월에 한다고 하면 우리가 뭐라고해야 되느냐는 거죠.그래서 그건 그거고, 우리는 확실하게 성공할 수 있으니까그냥 참여해 달라고 했죠. 그 회의를 한 장소가 바로 여기한국의집 청우정이에요. 이 자리에서 부산국제영화제를출범시킨 거죠.


외국인들에게 한옥과 음식, 공연 등우리 문화를 다채롭게 보여주는 곳이죠

한국의집의 가장 큰 장점은 교통이 편리하고 여기 와서 식사도하고 한국의 대표적인 무용공연을 볼 수 있다는 것이죠. 교토에가면 기혼자라고 일본 노후가부키의 대표적인 공연만을 보여주며식사하는 데가 있거든요. 1980년대에 한 번 가보고 ‘아, 이런 게한국에도 참 필요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작년에 우리 집[부인인 홍명자 여사는 2017세계약사연맹총회(FIP) 자원봉사단장을 맡으면서 2017년FIP총회를 한국에 유치하는 데 기여했다]에서 국제회의를유치했을 때 개막식 공연으로 뭘 보여줄 것인가 생각하다가 SM에이야기해서 걸그룹과 한국의집예술단을 초청했죠. 그것이 외국사람들에게 굉장히 인기를 끌었다고, 그래서 집에서 꼭 고맙다고말씀을 드리라고 하더군요.영진위 사장으로 있을 때도 해외에서 영화인들이 오면 주로여기를 이용했죠.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한국의집은 교통이편하고 한옥에서 음식과 우리 문화를 알리는 공연을 하기 때문에외국인들을 데리고 가기가 참 좋은 곳이죠. 앞으로도 이러한장점들을 살려 지속적으로 발전하기를 기원합니다.


생생한 목격자들의 증언

정문희(한국의집 전 영업과장) 씨는 당시 21세의 나이로 1966년 4월 13일 해외공보관 소속 한국소개관(현 한국의집)에 영업직으로 입사했다. 당시는 해외공보관에서파견나온 주사급 또는 사무관급 관장 1명과 남녀 관리직원1명씩이 재직하고 있었고, 이외 식당영업과 공연은임대형식을 통해 외부에 위탁하여 운영하였다고 한다.정문희씨는 식당영업을 하던 영업부서직원으로 입사하여한국의집 신축개관공사를 시작하기 전인 1978년 9월말까지재직하다 공사기간 동안 신라호텔에 재직했다. 그 후신축개관을 한 1981년 1월 8일 한국의집에 재입사하게되는데 공사기간 동안(78년 10월부터 80년까지)에도한국의집에 대한 미련으로 공사를 지켜보기도 했다고 한다.2006년에 정년퇴임하고 현재는 한국의집 전통혼례의집사를 맡아 4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한국의집을배회(?)하고 있다.이영남(한국의집 전 공연팀장) 씨는 1982년 3월 입사하여한국의집이 성장하기까지 공연과 체험프로그램을 한국의집대표상품으로 끌어올리는데 많은 노력을 쏟았다. 수년 전정년퇴임하여 한국의집을 떠났지만, 여전히 한국의집과관련한 일들이 있으면 만사를 제쳐두고 찾아오는 사람이다.우렁찬 목소리는 현직에 있을 때와 다르지 않다. 인터뷰를하는 내내 수십 년 전의 한국의집을 떠올리며 흥분한 어조로이야기하는 모습에서 한국의집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을짐작할 수 있었다. 수십 년간 한국의집 안팎을 배회하며지켜봐온 ‘살아있는 한국의집 정령들’을 만나 그 동안의역사와 에피소드들을 들어본다.



# 정문희 전 영업과장이 들려주는 한국의집

1957년 이전에도 한국의집이 주요 외교행사나 미8군 행사 때 활용됐죠

한국의집이 정식 개관을 한 것은 1957년 오재경 초대공보실장 때였죠. 그런데 그 이전에도 한국의집이 활용되지않은 것은 아니에요. 남산 밑에 외교구락부라는 전문양식레스토랑이 있었어요. 우리나라 식당이 얼마 없을 때인데이 외교구락부라는 전문 레스토랑에서 출장을 와서칵테일파티나, 식사 등을 제공했었죠. 양관(洋館)이라고 하는 일본식 건물에서 주로 연회를 하기도 했고, 현재 안마당인중정에 잔디가 깔려 있어 거기에서 칵테일 파티 등이 열렸습니다.1957년 한국의집이 정식 개관하기 전까지는 전문 양식레스토랑인 외교구락부를 통해 양식이 제공됐던 거죠.



60~70년대에는 고가의 미술품들로 한국의집 벽과 문에 장식이 됐었죠

1957년 한국의집 간판을 달고 나서 유명 화가나 서예가 등을초청한 적이 있어요. 김충현 서예가, 천경자 화백 등 수십명의 당시 유명한 서예가, 화가 등을 초청했죠. 칵테일파티를열어 술을 엄청 먹이고 어느 정도 취기가 올랐을 때, 오재경장관이 예술가들에게 그냥 갖다가 붓과 재료들을 들이댄 거죠.화가에게는 그림을 그리게 하고, 서예가에게는 글씨를 쓰게하고. 이렇게 해서 그때 받았던 작품들이 병풍이나 족자, 액자로만들어져서 한국의집 벽과 문 등에 걸렸죠. 영주실, 방장실,봉래실에 죽림칠현이라고 하는 화가들의 작품과 중국 그림 등이있었죠. 달구지 끌고 가는 큰 그림도 있었고, 아무튼 유명한그림들이 엄청 많았어요.* 편집자주: 현재 이 그림들은 90년대 중반까지 걸려 있다가 후에대부분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이관되어 보관 중이다.



당시 한국의집은 아무나 이용할 수 있는 곳은 아니었죠

1970년대 초반쯤이었을 겁니다. 구자춘 전 내무부 장관(당시경북도지사)과 중앙정보부 어떤 국장이었는데 4명이 한 달 동안매일같이 새벽 5시 한국의집으로 출근해 문향루에서 2~3시간정도 회의를 하고 각자 자기 근무처로 출근을 하는 식이었어요.그러다 보니 우리는 돌아가면서 조를 짜서 커피서비스를 하기위해 새벽 4시30분에 출근을 해야 했지요. 당시에는 여기가보안이 철저하게 되는 곳이어서. 수경사 옆이기도 하고. 그당시는 여기 국내인은 출입이 안 되는 곳이었어요. 한국의집은아무나 못 들어오는 곳. 암튼 유신헌법을 여기 문향루에서만들었어요.* 편집자주 : 유신헌법은 1972년 10월 17일의 10월유신체제에따라 1972년 12월 17일 국민투표로 확정된 헌정사상 7차로개정된 제4공화국의 헌법이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10월 17일 ‘우리 민족의 지상과제인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뒷받침하기 위하여 ‘우리의 정치체제를 개혁한다’고 선언하며,초헌법적인 국가긴급권을 발동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정치활동을금지하는 동시에 전국적인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뒤(1972년10월 17일), 10일 이내에 헌법개정안을 작성하여 국민 투표로써확정하도록 지시한다. 1972년 11월 21일 유신헌법에 대한국민투표가 실시되어 투표율 92.9%에 찬성 91.5%로 확정되고,12월 27일 박정희 대통령이 재취임하는 한편 유신헌법을공포함으로써 유신체제는 수립되었다. 이로써 장기집권은시작된다. 인터뷰에 언급한 중앙정보부 모 국장은 다시 정문희씨와 인터뷰 후에 통화하여 확인한 결과, 당시 중앙정보부이철희 국장으로 확인되었다. 한국의집에서 유신헌법 초안을만들었다는 공식기록은 찾을 수 없었다. 다만, 증언의 구체성과당시의 기록들을 종합하여 살펴볼 때 신빙성은 높아보였다.그만큼 당시의 국가적인 중대사를 논의하는데 한국의집이활용되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70년대 말까지 식당과 공연은 임대 형태로 운영됐었죠

1957년 한국의집이 처음 개관을 하고 78년 9월말까지 영업을했어요. 해외공보관에서 관리를 했는데 한국의집 사무실이별도로 있었습니다. 그때는 식당은 임대를 해서 운영을 했죠.양관이라고 하는 일본식 건물이 있었고, 상품판매하는 민속관,문향루는 현재 그 자리에 있었고, 양관이라고 하는 곳에는홀이 2개가 있었는데 본관 마루가 넓어서 거기서 공연을 주로했죠. 주로 외교행사나 미8군들이 이용했었죠. 토요일에는주로 주한 미군들이 버스로 단체로 와서 이용했었죠. 관리는관장이 있었는데 주사급이 와서 공부해서 사무관 따고 나가고그랬죠. 그 외에 남자 1명, 여자 1명 직원도 있었고. 전임이사장이었던 김치곤 씨도 당시 담당주사로 와서 관장으로있다가 사무관 승진해서 나갔죠. 식당은 백인엽, 백선엽 장군의조카딸이 임대하여 운영을 했고, 공연은 김문숙 무용단, 이숙향무용단, 박정란 무용단. 이 세 무용단이 돌아가며 공연을했어요. 공연장은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니고 넓은 대청마루에서방석을 깔고 공연을 했죠. 지금 청우정, 녹음정이 있는 자리에는잔디밭이 깔려 있고 그네와 널뛰기 등이 있었죠. 그네는 현재청우정 앞에 있는 큰 나무에 매달아 설치했었고, 문향루 앞에큰 아름드리나무 두 그루가 있었는데 송충이가 너무 많이 생겨베었죠. 옛날에는 정원이 좋았죠. 잔디가 쫘악 깔리고... 78년10월부터 80년 말까지 공사기간에는 공사하는 것 구경하러 가끔와서 보기도 했죠. 미련이 남아가지고.


81년도 재개관하면서 국내인들이 한국의집을 드나들 수 있었죠 
한국 사람은 70년대까지는 못 들어왔고, 혼례하면서 사실상 개방된 거죠. 1981년에 재개관하고 나서 미국 대통령이라든가 귀빈들이 다 왔어요. 안 온 사람이 없어요. 오픈할 때 전두환대통령이 테이프를 끊을라 그랬는데 남덕우 국무총리가 테이프를끊었죠. 전두환 대통령 등받이라 해서 봉황무늬가 들어간 등받이의자도 만들어 놨었고, 노태우 대통령, 김영삼 대통령 등 역대대통령 중에도 안온 사람이 없죠. 박정희 대통령 때도 5.16 후에칵테일파티도 했었고. 김대중 대통령도 천주교 신자들과 왔었고.


당시 음식서비스와 공연도 최고였죠
당시 재개관하고 나서 박종국 이사장님이 최고로만 뽑았어요.서비스 교육을 외부에서 받게 하고 아침마다 미팅을 하고...
아. 엄청났죠. 굉장했죠. 자부심과 긍지가. 그리고 재오픈할 때 공연단도 국립극장에서 지원 나왔잖아요. 우리만으로 할 수 없어가지고. 그 당시는 월급을 못 줄 정도였으니까. 창단 멤버들 엄청 고생했죠.



독립기념관도 사실 여기서 만들었죠

그리고 또 기억나는 건 독립기념관을 여기서 다 구상해서 회의도 하고 그랬죠.(정문희) 한국문화재보호협회 당시 독립기념관 발족추진위원회를 재단이 맡아서 박종국 이사장님이 초대 독립기념관사무총장으로 가신거지.(이영남) 관장은 안중근 의사 조카인안춘생 씨, 그 양반이 했지 아마.(정문희)



# 이영남 전 공연팀장이 들려주는
한국의집


중국교류도 한국의집에서 비롯됐지

중국과 교류가 시작할 때 중국 민항기가 떨어졌거든. 중국민항기가 떨어지고 나서 이를 가지러 중국 외교부 관계자가왔어. 그때 처음으로 한국의집의 공연도 보고 식사도 한 거지.그러고 나서 중국 민항기를 가지고 간 다음에 교류가 바로 시작이된 거야. 그때 청와대에서 와서 그 사람들 전부 케어를 여기서다했어. 그때 나는 조명을 담당했는데 나머지는 국립무용단이고뭐고 여기서 공연을 했지. 그때 아마 공산권에서 최초로 온 중국관리였었고 그 이후로 바로 수교가 됐지.



국악계의 커다란 사관학교역할을 했다고 보면 돼

초창기 공연단 멤버는 7명이었는데 초대단장이 홍금산 씨고.국립극장 지도위원으로 있다가 파견 나왔는데, 82년쯤에전속무용단이 발족하고 그때 초대단장으로 들어 온 거고. 그때반주단도 최고로 뽑았어. 가야금에 안옥선 씨, 김성녀 씨 등.원장현 선생도 그때 대타로 많이 왔지. 예전에는 민속악하고정악연주자하고 많이 갈렸는데, 민속악 연주자들이 크게 빛을못 봤어. 지금 처용무 보유자인 김용 선생이 여기 공연관련부장을 하면서 정악하는 사람들을 많이 구성했어. 지금은 민속악하는 사람들이 크게 떠서 국악계 정점에 있지만, 그때는 정악하는 사람들이 전부 국악계를 장악하고 있을 때니까. 정악하는 사람들이 그만두며 민속악 하는 사람들이 들어온 거야.지금은 대학교수들이 되고 엄청 잘나가는 사람들이 됐지만,김성녀, 이태백 이런 분들이 당시에는 학교를 못 다녔어. 여기와서 일하면서 학교를 간 거야. 이춘희 선생, 정재만, 박병천선생도 여기서 다 문화재 된 거고. 안행연이라는 판소리계의거목이 있었는데 안숙선 선생 전에 출연했었고. 박송희 선생도출연했다가 문화재 된 거고. 문화재 발굴, 국악계의 커다란사관학교 역할을 했다고 보면 돼.



초창기에는 힘들어서 자동판매기, 회화복제 등수익사업으로 유지할 수 밖에

막 개관했을 때는 사람들이 많이 없었고, 이전에 일반인들 출입이안 되는 곳이라. 그래서 단골을 많이 만들기 시작했어. 공관등에 출장을 주로 나갔고, 김종필 총리 집에도 갔었고, 육군본부,육군회관 등 계속 출장을 다닌거지. 여기서 당시 본관은50~60명 정도 수용 가능했으니, 오픈하고 처음에는 고전했지.그때 (한국의집 자체 수입으로는) 먹고 살 수가 없어서 궁능에자동판매기를 놔서 그때 자동판매기 월 수입이 1억이었어. 그때1억이면... 그때 내가 자동판매기 관리자로 들어왔지. 창경궁밤벚꽃놀이 할 때 창경궁에 자동판매기가 5대가 있었어. 물이더워질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밤까지... 뜨거운 물을 옆에 갖다놓고계속 부었어. 100원씩 할 때 한 대에 20만 원씩 나왔으니까.따져보니까 15시간 정도를 풀로 돌려. 그러니까 한 번 막히면어떡해. 그럼 그걸 고쳐야 되는데 막히면 사람들이 줄을 쫙서 있다가 없어져요. 에이에스 부르면 1~2시간이 걸리잖아.그래서 내가 롯데에 들어가서 고치는 걸 가르쳐 주쇼 했지.그래서 자동판매기 고치는 걸 직접 배웠어. 6시 퇴근하고 롯데에들어가서 기계를 놓고 분해조립을 해서 배운 거지. 2달 동안배우니까 웬만한 건 알겠더라고. 매점하고 음료자동판매기,그림복제(회화영인본 제작, 판매) 그걸 받아 운영했지.



자리가 없어서 표를 못 팔 때도 있었어. 그래서 외부공연을 해야겠다 생각을 했지

이런 사업들로 초창기에 운영하며 버티다 점차 관광객들이많이 늘어났지. 관광객들이 많았을 때는 공연 자리가 없어서표를 못 팔 정도였지. 외부 공연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한거지.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김치곤 이사장 있을 때, 88년서울올림픽 바로 지나면서. 김치곤 이사장이 그 코 묻은 돈받아서 회사에 도움이 되겠냐며 외부공연 때 받은 수당을공연단들에게 나눠주라고 했어. 어느 땐가 애들 출연료 나눠주고나니 수중에 100만 원이 남았어. 당시 한운기 관장이 그 돈으로군 위문공연을 하면 좋겠다고 해서 국방부에 의뢰해서 포천승리부대에 공연을 갔지. 사물놀이 가락에 젊은 군인들이그렇게 뜨거운 호응을 보일 줄 몰랐지. 이후에 문예진흥원(현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조명 교육을 주관했는데 그때교육받으러 가서 한국의집 외부공연 홍보전단지를 나눠줬어.그걸 보고 다른 기관에서 교육 받으러 온 관계자들이 하나둘씩연락을 주기 시작한 거야. 1년에 8천만 원 정도를 벌었어.



전통혼례 재현행사의 시작

2002 한・일 월드컵 때였을 거야. 김홍도 그림 중에우귀행렬도가 있어. 그 그림을 보고 내가 그렸어. 앞에 아무것도없으니까 심심할 거 같아서 사물놀이 농악단을 앞에 놓고 그뒤에 가마 가고. 그건 행렬도 순서니까. 그 다음에 말 가고 그다음에 짐꾼들이 가는 것을 그렸어. 그러고 나서 우리 한번해보자라고 했더니 직원들 반발도 있었지만, 그냥 밀어붙였어.중구청, 경찰서 협조 받고 했지. 명동에서 여기까지 오는데내 심장 박동이 막 울리더라구. 말 타고 신랑이 들어오는데사람들이 열광을 했지. 이제 관광상품으로 가치가 있다고 생각이들어서 서대문 웨딩축제에 가서 우귀행렬 하자고 설득을 했지.당시에 800만 원을 받고 서대문 웨딩축제에 참가를 했지.연속 3년을 진행했어. 수원 효문화축제 때에는 천만 원을 받고4회를 연속해서 참가했어. 그러고 나서 관광상품으로 발전을시키려고 앞부분을 무용극 형태로 만들어달라고 정재만 교수에게부탁했지. 돈 한 푼 안 받고 정재만 교수가 만들어줬어. 그렇게해서 인사동 앞에서 하던 전통혼례 재현행사가 만들어졌지.지금까지 제대로 이어지지 못한 게 정말 안타깝지만...



전통문화 체험의 시작

체험 시작한 거, 또 강습을 시작하던 거. 이런 거 이야기하려면오늘 밤 새워야 돼. 집에 갈 생각 하지 마(하하). 가르칠 수 있는사람도 있겠다, 공연장도 낮에 비는데 강습을 시작해야겠다생각을 했어. 처음에 사물놀이 강습을 먼저 시작하는데 사람을모아야 하잖아. 기자들 찾아다니며 보도자료 주면서... 한번은중앙일보 기자가 하도 졸라대니까 정성에 감복해서인지 한국의집강습하는데 취재를 온 거야. 사진을 기가 막히게 찍어 문화면에엄청 크게 실어줬어. ‘한국의집 사물놀이 강습 개시하다.사람들 호응이 좋다.’ 이렇게... 기사 나고 나니까 전화가 불이났지. 김전배 이사장이 그걸 보고 ‘이영남이처럼 일해 봐’라며인정을 해줬어. 그 공을 인정받아서 기능직에서 일반직으로바뀌었지. 또 욕심이 생겼지. 무용 강습 만들고, 단소체험 만들고.그러다 외국인 대상 체험으로 전환이 됐지. 일본 수학여행단이엄청나게 들어오는데 그걸 체험으로 소화할 데가 없는 거야.2000년 쯤 됐을 거야. 월드컵 이전에 이용부 이사 있을 때일본수학여행단을 유치하려고 체험 프로그램을 만들었어.김치, 탈 만들기, 한지체험 등 몇 개를 만들었어. 연말에한국관광공사에서 주최하는 일본여행사 송년회에 그걸 뿌리려고하는데 내부에서 전단지 컨펌 받는 게 너무 힘든 거야. 그게 너무답답해서 못하겠다고 했더니 이용부 이사가 먼저 시행하라고힘을 실어줘서 그때 일본여행사 송년회에 가서 한국의집 체험프로그램을 홍보했지. 김치체험 프로그램에 300명씩 들어오는데그걸 소화할 데가 한국의집 밖에는 없는 거지. 청소년들이 한국을경험하고 다시 한국에 들어오는 잠재적 고객이 된다는 생각에수학여행단 체험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을 했지. 뭐든지 시작을하면 가지치기 하듯이 발전하게 돼있어. 강습을 시작 안 했으면지금 체험이 됐겠어? 뭐든지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이 필요한거지. 사실 시도해서 망한 것도 꽤 있지만.



문화상품 개발의 시작

2000년에 문화상품관이 생기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거같아. 2000년 이전에는 우리가 직접 운영을 안했고, 이칠용씨(현 한국공예예술가협회 회장)가 운영을 하기도 했고. 상품관을임대형식으로 운영했지. 그러다가 전통문화를 디자인해서관광상품으로 만들자는 것이 정부 방침으로 내려왔어. 그래서경복궁 전통공예관 시절부터 우리가 디자이너를 뽑았는데당시에는 디자이너를 크게 대접도 못해줬고 그리 비중 있게생각을 하지는 못했지. 사실 상품개발이라는 것이 디자인하고상품화 한다는 게 시간도 많이 걸리고. 초창기에는 실수도많았지. 내가 상품팀장 할 때였어. 골프가 한창 유행이었을 때골프공에 장구, 꽹과리 뭐 이런 사물놀이 그림을 집어넣기도 하고골프채커버에 족두리하고 사모관대 그림을 넣어서 형태를 바꿔서만들어봤지. 만들어 놓고 보니까 멋이 없는 거야. 그걸 누가쓰겠냐고. 그걸 내 돈 20만 원 들여 샘플 만들어놓고 결국엔 우리집에 아직 모셔다 놓은 거지. 한번은 골프티를 만들라고 했더니디자인하던 친구가 알루미늄으로 만들었네. 무게도 엄청 무겁고그걸 치면 골프채가 휘어지는 건 둘째치더라도 튀어서 사람한테꽂히면 죽게 생겼는 거야. 게다가 당시에 천 원이면 한 무더기씩주는 골프티를 하나에 5천 원씩 가격을 매겨 놓은 거야. 그걸누가 사겠냐고. 처음엔 그렇게 시행착오도 참 많았지.



한국의집 연중무휴로 인해 수입은 많이 늘었지만직원들 생각하면 후회돼

공연장이 생기면서 바로 무용단이 구성됐는데 그때는 일요일에한국의집이 쉬었으니까 일요일 빼고는 매일 상설공연을 했지.2003년부터 연중무휴로 한국의집이 운영됐고. 사람들이 밥먹으러 오는데 매일 문을 열고 있어야지 언제는 쉬고 그러면되겠어? 연중무휴로 운영되다 보니 당연히 수입은 늘었는데직원들 감성이 없어진 거야. 그게 내가 생각했을 때는 가장 큰실수라는 생각이 들어. 그 연중무휴가 직원들을 얼마나 피폐하게만드는지 그걸 몰랐던 거야. 다시 정기휴무가 한 달에 한번생겼다고 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 인터뷰 정리를 마치며...

수십 년을 한 직장에 몸담으며 정년을 맞이한 이들은 아직까지는꽤 많을 것이다. 그러나 정년을 맞이하고도 변함없는 관심과애정으로 그 주변을 배회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60년대한국의집에 입사하여 재직하다 2년여의 공사기간 동안도 그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공사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이. 그리고재개관하자마자 내로라하는 최고의 호텔인 신라호텔을 그만두고한국의집에 재입사하여 정년을 맞이하고, 정년 퇴임 후에도한국의집 전통혼례의 집사로 40년이 넘는 동안 이곳을 떠나지않는 이. 한국의집의 초창기부터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고한국의집 일이라면 만사를 제쳐두고 달려와 목청을 높이는이. 이런 분들로 인해 한국의집이 여전히 많은 사람들로부터사랑받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 지면 관계상 두 분의 이야기들을다 담지는 못했다. 그러나 인터뷰 내용을 통해 한국의집에 대한두 분의 애정이 얼마나 남달랐는지는 전해질 거라 믿는다. 이영남팀장은 인터뷰 후에 이런 자리를 만들어줘서 고맙다는 이야기를전했다. 모처럼 옛 추억을 되살려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속이 후련하다고.

 
- 기획특집 3 / 한국의집의 탄생Ⅱ 글. 한국문화재재단 홍보팀 사진. 안호성 -

 

 
하단내용참조

한국의집, 우리 전통 건축양식으로 신축해 1981년 재개관

올해로 개관 61주년을 맞이한 한국의집. 서울 남산 기슭에자리한 한국의집은 오랜 역사만큼 우리에게 전통문화의향기를 전해주고 있다. 특히 한국의 전통 건축양식과 현대미가 조화를 이룬 빼어난 건축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1957년에 개관한 한국의집은 원래 주한 외교 사절과국내 귀빈의 접대 시설로 운영했다. 그러다가 시설이 노후하고 운영 목적에 맞는 시설이 필요해 기존 시설을 철거하고 새로운 전통 건축양식으로 신축하게 되었다. 기존의 한국의집은 왜식양관(倭式洋館) 건물이었고, 이후 미국 장군의 숙소로도 쓰이며 우리의 건축양식과는 맞지 않은 한·일 절충식 건축물이었다. 한국의집은 전통 건축양식에 맞게, 운영 목적에 걸맞은 기능과 시설을 갖춘 건물로 새롭게 신축함으로써 1981년 2월 역사적 개관을 맞이한다. 당시 일본식 가옥의 양관 건물과 국적 불명의 건물을 모두허물고 우리 고유의 한옥 양식에 맞춰 건축해 어엿한 한국의집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기본 설계 참여, 다양한 자문 역할 수행
# 김동현 전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석좌교수,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연구실장이던 김동현 교수는한국의집 신축을 준비할 때, 신축에 관한 기본 설계에 참여했다. 그는 1972년 불국사 보수공사 총감독을 맡아 문화재 발굴 및 공사에 주도적으로 나섰고 불국사 보수공사시절, 이광규 도편수, 신응수 부편수와 함께 공사에 참여했다. 이후 경주 안압지와 천마총 발굴 등 우리나라 발굴 및보수공사 등 역사적인 문화재 현장을 누비면서 이 분야에잔뼈가 굵었다. 그는 우리 문화재 복원 역사의 큰 어른이자 전설로 평가받고 있다.
   김동현 교수는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재직한 일이 큰보람이자 기쁨이었다고 회고한다. 그는 한국의집 신축 설계 당시, 소화당과 연결되는 환벽루와 연못 설치 등에 관한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등 인연을 이어갔다. 1988년 동산에 신축한 청우정, 녹음정 설계도 자문해주었다. 그는“한국의집이 위치한 서울 중구 필동은 ‘남촌’이라고 불리며 양반이 거주하던 동네였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한국의집은 경복궁 자경전이나 다른 궁궐을 본떠 만들었다기보다, 한옥의 다양한 생활양식이 모두 담겨 진정한 ‘한국의 집’으로서 의미가 있다”라고 평가했다


대들보를 익공집으로 변경
설계도 현장에 맞게 바꿔 시공하기도

#신응수 국가무형문화재 제74호 대목장 보유자

당시 도편수이던 신응수 보유자는 경기도 수원화성과 장안문 공사를 진행하던 중 문화재관리국의 요청으로 1978년부터 1979년까지 한국의집 신축 공사에 참여했다. 당시20여 명의 목수와 도편수로 참여한 신응수 보유자는 “대목공사에 관한 업무 협의 시, 견적서 산출이나 시공 방법 등에 관해 시공업체나 관리 기관과 의견을 조율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대청에서 본관을 연결하는 대들보를 민굴도리집(일반적인 민가에 많이 쓰임. 궁에서는 전이나 각이 아닌, 사람들의 침소 등의 당에서 쓰임)으로 설계했는데, 하중과 안전을 고려하여 익공집(지붕의하중을 안정적으로 분산시켜 기둥으로 전달하는 보강재)으로 변경해 시공했다”라고 말했다.
   “한국의집을 신축할 당시, 대부분의 주요 부재는 수입산 소나무를, 서까래에는 국내산 소나무를 사용했습니다.당시 공사가 급하게 진행되어 건조가 덜된 탓에 마룻바닥이 시공 후 휘어지는 등 시행착오를 겪었지요. 주변 민가와의 경계 문제로 설계 내용을 부분적으로 변경해 시공했어요. 또 장안문 공사 때까지 저는 계속 재래식 톱을 사용했는데, 이곳에서는 전기톱을 써서 작업 능률이 훨씬 높았습니다.”
   신응수 보유자는 “당시 다른 목수들은 현장 어디서나전기톱을 쓰고 있었다”라고 했다.
   “저는 그동안 문화재가 있는 산속에서만 작업해서 일일이 손으로 다 했어요. 한국의집 신축 공사에 와서야 전기톱을 사용했는데, 어찌나 잘 잘리던지 깜짝 놀랐지요. 김동현 교수님의 조언에 따라 안 보이는 쪽 기둥을 톱으로켜서 목재가 터지는 것을 예방했습니다.” 
   그는 본관 처마의 높이를 설계도대로 하면 낙숫물 처리에 문제가 발생해 한 칸을 낮춰 시공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했다. 한국의집 신축 공사에서 그만큼 배운 것도 얻은것도 많았다고 회고했다.



관급 공사에 참여해 겪은 수많은 시행착오,
그래도 보람이 컸다

#장순용, 삼아성건축사무소 대표이사

한국의집 신축 공사에 참여할 당시 삼성건축사무소 실장이던 장순용 대표는 “한국의집 건립에 관한 논의는 비밀리에 추진했고, 토지문제도 복잡하게 얽혀 신축 공사를 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라고 말문을 열었다.
   장순용 대표는 “최초 건축 계획은 금성건축에서 수립하고 진행 과정 중 삼성건축(안)이 채택되었다”라고 밝혔다. 선친인 고 장기인 소장님이 수차례 한국의집 신축 자문 회의에 참석해 기초를 다졌다고 한다. 1979년 7월 문화재관리국과 종합 설계에 관한 계약을 체결하고, 같은 해 10월 제2차로 마감 설계가 완료되었다. 최종 설계를 완성하기전까지 여러 차례 회의가 있었고, 공사 시행 과정에서도 외부의 영향으로 설계를 변경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민간 건축은 감리 제도가 있지만 관급 공사에는 감리제도가 없고 자체 인력으로 담당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설계 변경 시에는 당초 설계 건축가에게 의견을 묻지 않고문화재위원의 자문을 받아 추진했죠. 당시 관급 공사에 참여하며 어려움도 많고 여러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한국의집이 잘 완성되어 지금까지 잘 이어오는 모습을 보니, 공사에 참여한 사람으로서 보람을 느낍니다.”



기존 건물 부수고 새로 지었지만
문향루만 보수공사로 새롭게 정비

#김긍식, 성진토건(주) 대표이사
당시 문화재관리국 보수과 건축기사보이던 김긍식 대표는“문화재보수과 이태윤 계장이 공사 감독을 맡고 자신과 구경회 건축기사가 감독 보조로 참여해 기존 건물을 철거하고 신축 공사를 진행했다”라고 말했다.그는 한국의집 신축 작업에 참여해 본관(해린관)에서상량식을 함께 하면서 신축이 잘 이뤄지기를 축원했다고한다. 상량식은 기본 구조를 다 세우고 집이 튼튼하게 잘유지되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행하는 것이다. 본래 목조건축과 관련한 의례이지만, 현대에도 건물을 신축하는 과정에서 철골 공사의 마지막 부재를 올리는 의식을 지칭하는데 사용하기도 한다.김긍식 대표는 “한국의집 신축 공사는 기존의 건물 대부분을 다 부수고 새로 짓는 것이었으며, 문향루만 보수공사를 통해 새롭게 정비했다”라고 밝혔다.“한국의집 신축 공사가 끝나고 문화재관리국장 지시로, 문화재보수과 구경회 건축기사가 준공 보고서를 작성했습니다. 지금 재단에서 보관 중인 원고지와 사진첩은 후대에도 이어질 무척 소중한 자료라 생각합니다.”
 
- 기획특집 3 / 한국의집의 탄생Ⅲ 글. 한국문화재재단 홍보팀 -

 



하단내용참조

 
정말 언제인지 기억도 가물가물한 오래전, 우연히 몇 분들과함께 한국의집에 들른 일이 있었다. 한국의 정취가 듬뿍 밴건물들을 둘러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걷고 있었는데,갑자기 마음속에서 피어오르는 아련한 그리움에 ‘이게 무슨일이지?’ 하는 느낌으로 다시 주변을 돌아보게 됐다. 그러고는 이내 그 그리움을 일으킨 주범(?)을 찾아냈다. 바로 주련의 글씨들이었다.
   내가 가장 잘난 체를 할 수 있는 일이 주련의 한시들을해석하는 것인데, 그 글씨들은 바로 내가 유독 그리워하는분들 중 한 분인 청명 임창순 선생님의 글씨였다. 누구는 ‘글씨와 인품은 별개’라고 했지만, 글씨를 보면 선생님이 보인다. 그러나 정작 글씨와 인격이라든가 인격수양의 관계를 부정한 사람이 바로 선생님이시다.
   한 서예잡지 기자가 서예와 인격수양에 대해 질문하자“그것은 서예학원 선생들이 회원을 모집하려고 하는 거짓말이고, 글씨는 내가 써서 보기 좋으면 그뿐이야”라고 하셨단다. 그런데 그런 선생님의 자유분방한 가운데서도 꼿꼿한 풍모를 그분의 글씨에서 느끼게 되니 참으로 재미있지 않은가?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한국의집 주련들을 읽어 나가노라니 정말 주련 하나하나가 주옥같은 글귀들이었다. 물론모두가 선생님이 지은 한시는 아니다.


꽃 사이에 말을 매니 봄바람이 불어오고 (花間繫馬春風遠)
술 마시고 누각 오르니 좋은 달 떠오르네 (酒後登樓好月來)

-다산 정약용-

행한 자취를 잘 살펴 일을 잘 주선해 나가면 크게 길할
것이요(視履考祥其旋元吉)

-주역(周易)-

맑고 밝은 기운 몸에 깃들면 그 뜻과 기상이 신과
같도다(淸明在躬氣志如神) -예기(禮記)-



   이 밖에도 많은 이들의 시에서 가려 뽑은 구절들이 멋진 글씨로 기둥들에 걸려 있었다. 그 원작자들은 거의 우리한국의 인물들이다. 한국의집이라 일부러 신경을 쓴 듯 정약용·강항·신위 등 선생님이 평소 좋아하던 분들의 글 중에서 대부분을 뽑아 쓰셨고, 유명한 대련집이나 고대의 경전에서 뽑아 온 것이 몇 구절 보였다.
   많은 건물들의 주련이 주로 중국의 유명한 대련이나 중국 문인의 시에서 뽑아오는 것과는 상당히 대조적이다. 그러한 주련들 가운데 “마음속에는 온화한 정신으로 가득 차 있는데(胸中自足氤氳味) 세상에 다만 높은 뜻을 가진 사람이그립구나(海內只思磊落人)”라는 주련을 읽으면서는 ‘내 마음에 그리움 가득 차 뜻 높으셨던 선생님이 그립구나’ 하는마음이 들면서 좀 주책없이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다



한학자라고 부르기 힘든 한학자?

나는 임창순 선생님께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은 제자다. 한학이라는 학문적 바탕을 주신 큰 은혜는 두말할 필요도 없지만, 그보다도 더 인간적인 깊은 정으로 이어져 있다. 그러니 내가 그리는 임창순 선생님의 모습은 전혀 객관적인것이 될 수가 없다. 또 객관적이라고 할 수 있는 자료는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수도 없이 나올 터이니, 여기서는 오히려 나의 주관적인 느낌에 들어오는 몇 가지 일화들을 중심으로 선생님의 모습을 그려 본다.
   우선 임창순 선생은 서당 급비생(장학생)으로 선발돼 6년간 배운 것이 외적으로 인정될 수 있는 학력의 전부다.나중에 성균관대학교의 교수가 되고 문화재위원장을 지냈으며 한국 금석학의 태두로 여겨지는 분의 학력 전부가 그렇다. 그 짧은 학력에 어찌 그러한 일을 이루실 수 있었을까? 시대를 앞서 가는 혜안은 물론이고, 무엇보다 중요한‘민족 문화에 대한 애정’을 가지셨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런 일이 있었다. 우리가 보기에는 어느 것이 글자인지도 모를, 거의 새까맣게 보이는 탁본을 선생님은 줄줄 읽어 내리셨다. 하도 신기해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여쭈었다.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나는 아무리 들어도 도대체 모를 음악을, 척 들으면어떤 악단이 연주하고 누가 지휘했는지까지 아는 사람들이있더군. 마찬가지야. 애정과 관심을 기울이면 보이고 들리는 법이지.”
   선생님은 전통적인 한학자라고 불리기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분이셨다. 한학자라고 하면 일반적으로는 전통에 대한 강한 애착을 지니고 있으며, 상당히 보수적인 경향을 띤다고 생각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선생님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내가 장학생으로 선발돼 처음 뵈었을때, 천연덕스럽게 담배를 권하셔서 사람을 놀라게 하셨다.그때 하신 말씀이 지금도 기억난다.
   “이거 기호품이잖아? 단순한 기호품 때문에 내 앞에서불편해할 필요가 없어.”
   또 한학자라는 분이 “앞지른다고 하면 될 것을 왜 추월한다고 해? 인권을 짓밟는다고 하면 되지 꼭 유린이라고 해하나?”라고 한글 전용을 주장하시며, 현실에서 한자를쓰는 것을 매우 싫어하셨다. 한문으로 된 전통문화는 우리처럼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시대에 맞는 말로 바꿔서 대중적으로 펼쳐야지, 그 어려운 한문과 한자를 현실에서 쓰는 것은 참으로 시대착오적이라는 게 선생님의 생각이셨다.
   선생님은 현실에 대한 참여의식이 매우 높고, 우리가놀랄 정도로 진보적인 사고를 지니고 계셨다. 4·19혁명때에는 교수들의 시위에 앞장서서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자!’는 플래카드의 글씨를 직접 쓰셨다. 그 뒤 박정희 정권시절 ‘인혁당 사건’에 연루돼 고초를 겪고 교수직에서 물러나셨다. 현실의 정치적 문제에 대해 언제나 날카로운 비판의식을 지니고 계셨으며, 지식인이 나약하게 현실에서 도피하거나 타협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셨다. 내가 건국대 교수가 됐을 때 정말 기뻐하시면서도 “교수 자리가 무슨 목숨줄인 양 매달려 비겁하게 살지는 말게!” 하셔서 제자의 교수생활을 불편하게(?) 만들기도 하셨다. 그런 선생님께서가장 가슴 아프게 생각한 것은 민족의 분단이었다. 제자들이 생신 잔치 한번 해 드리려 해도 “민족을 이렇게 분단되게 만든 세대가 뭐 잘났다고 생일상을 받겠나!”라며 거절하셨다. 돌아가시기 전에는 사시던 집을 포함한 모든 재산을 출연해 재단을 설립하셨다. 민족문화의 계승과 창달 그리고 분단 상황을 극복하고 통일을 지향하는 데 작은 힘이라도 되겠다는 뜻에 전 재산을 쾌척하신 것이다. 말로 하는가르침을 넘어 삶 자체가 귀감이 되는 분, 그러한 분이 임창순 선생님이 아닌가 싶다.



한국의집 임창순 선생님의 글씨와 주련

붓글씨는 선생님이 가진 자산 가운데 매우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당신께서는 서예가라 자처하신 적이 없다.그렇지만 서예계에서 선생님을 빼놓고 말하는 사람 또한없었다. 일중 김충현, 여초 김응현, 검여 유희강 등 당대의쟁쟁한 서예가들과 교분을 맺은 선생님은 금석학과 서지학에 조예가 깊었다. 이를 통해 쌓은 글씨에 대한 안목과 소양은 선생님 자신만의 독특한 글씨를 낳게 한 바탕이 됐다.
   유홍준 씨는 선생님이 행서에서 일가를 이룬 명필이며, 대단히 지적인 풍모를 지닌 데다 멋이 구사돼 있다고평한다. 가획의 강약에 리듬을 주는 점에서 그 특징이 드러나며, 기본적으로는 기골(氣骨) 자체에 그 멋스러움이 살아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선생님 글씨는 당대(唐代)의명필인 저수량의 글씨에 그 미적인 연원을 두고 있다고 말한다. 필자도 저수량의 글씨를 매우 좋아하는데, 그의 글씨는 외적인 아름다움도 있지만 필획 하나하나가 철골(鐵骨)로 이루어진 듯한 강함을 보여준다. 생동하는 아름다움 속에 강직한 풍모를 드러내는 선생님 글씨에 대한 제대로 된평가라고 생각된다. 이런 선생님의 글씨가 모든 기둥마다주련으로 걸려 있는 한국의집, 그것만으로도 참으로 멋스럽다. 글 내용은 주로 수양에 도움이 되는 것, 빼어난 자연의 경치, 그러한 자연 속에 녹아든 멋있는 삶의 모습을 묘사한 것들이다. 본디 주련이 그러한 것이며, 가옥의 건축에그런 멋들어진 예술적 감각을 곁들여서 삶을 풍요롭게 했던 것이 바로 우리 전통의 아름다움이다. 그리고 그러한 주련의 멋이 지금 임창순 선생님의 글씨를 통해 한국의집에구현되고 있다. 이런 전통건축의 아름다운 일면을 생각하면 지금의 건축들은 너무 삭막하다는 느낌이 든다. 주련이야 가옥 구조상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집 안에 좋은 그림이나 글씨를 거는 것조차 인색해하는 풍조이니 더 말할 것이 없다.
   그렇지만 그것 또한 전통문화를 제대로 계승해 시대에 맞게 발전시키지 못한 우리의 책임이다. 특히 한문이라면 십만팔천리 달아나는 요즈음 세대들에게, 서예의 미적가치를 알고 한문으로 쓰인 글들의 의미를 음미하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무리다. 우선은 한국의집처럼 전통적 건축의 멋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을 제대로 살려내어 현대인들의삶과 연결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런 다음에야 그 속에 담긴의미가 전달될 수 있을 것이다.
   임창순 선생님은 한문 글씨로 주련을 쓰셨지만, 선생님의 주장대로라면 빨리 아름다운 우리말로 주련의 의미를전달하는 일을 서둘러야 할 것 같다. 이런 점에서는 한국의집에서 여러 가지로 노력을 기울이는 것으로 알고 있다.

 
- 기획특집 3 / 한국의집의 탄생Ⅲ 글. 성태용. 前 건국대학교 문과대학 학장 사진. 안호성 - 



하단내용참조

# 궁중음식연구원 한복려 원장
2대에 걸친 한국의집과의 인연

사명감 갖고 궁중음식 계승・발전에 앞장

한복려 원장을 이야기할 때 어머니인 황혜성 교수를 빼놓을수 없다. 조선왕조 궁중음식 2대 기능보유자인 황혜성 교수는 1대 기능 보유자인 ‘조선의 마지막 주방 상궁’ 한희순에게서 30년간 궁중음식 조리법을 배워 궁중음식의 틀을 닦았다. 조선왕조 궁중음식은 1971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황 교수는 궁중음식의 맥을 잇기 위해 1971년 사단법인 궁중음식연구원을 설립하였고, 이곳은 명실공히 궁중음식 전수기관으로 지금까지 맥을 이어오고 있다. 궁중음식연구원은 어머니 황혜성 교수의 가르침을 받은 한복려 원장이대를 이어, 우리의 옛 음식을 계승·발전시키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복려 원장은 “한국문화재재단이 예전에 문화재보호협회였을 때 어머니가 한국의집과 인연을 맺고 일을 시작했다”고 말문을 열었다.“어머니가 대학의 가정학과 교수로 계실 때, 관련 교수들과 함께 한국의집에 모여 한식을 제대로 알려 보자고 의기투합을 하였어요. 전통 한식을 어떻게 계승·발전시킬지끊임없이 연구하고 한국의집의 한식 메뉴 구성과 조리법을전하면서 조언을 하셨지요.”

이수자·전수자 양성에 사명감 가져

한복려 원장은 “궁중음식연구원을 전승·발전시켜야 한다”는 황혜성 교수의 가르침 아래 한국의집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어머니에 이어 한국의집에서 수업을 맡아 하였고, 조언을 하는 역할을 계속 해 왔습니다. 한국의집에서 향토음식전 등 전시회와 궁중의 잔치 재현 등 여러 행사를 진행하였고, 한국의집 조리사들을 경연대회에 출전시키기도 하였습니다. 조리사들이 한국의집 조리사라는 자부심을 넘어궁중음식 이수자와 전수자가 되도록 사명감을 갖고 양성하고자 합니다.”
   전수 교육을 통해 많은 이수자를 배출한 궁중음식연구원은 궁중음식 연구, 궁중의례 재현 행사, 전시회, 방송, 출판 음식 개발 및 컨설팅 등 다양하게 활동하고 있다.



궁중음식 토대 마련하기 위해 궁중음식문화재단 설립

“궁중음식연구원과 한국문화재재단은 앞으로 더 밀접한 관계를 갖고 궁중음식, 나아가 궁중문화를 어떻게 활용하고발전시켜 나갈 것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사실 일반 국민은무형문화재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두지 않는 듯합니다. 하지만 궁중음식의 범위는 굉장히 넓습니다. 단지 음식뿐 아니라 조선시대 생활상과 문화를 아우릅니다. 따라서 한국문화재재단은 무형문화재인 궁중음식을 국민들에게 더 많이 알리고 홍보해야 합니다. 또한 경복궁 소주방에서 궁중음식을 어떻게 유지하고 활용할 것인지 연구하고, 궁에서여는 행사에 많은 국민들이 참여하도록 알리며 행사마다기록으로 남기는 작업도 필요합니다.”
   한복려 원장은 궁중음식연구원과 별도로, 올해 초 궁중음식 연구를 심화하고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궁중음식문화재단을 설립하였다. 재단에서는 교육사업에 더욱 중점을두고 한국의집과 연계해 끊임없이 궁중음식 문화의 맥을이어가겠다고 소망을 밝혔다. 어머니 황혜성 교수에 이어평생을 궁중음식에 바친 한복려 원장. “음식을 귀하게 여기고 먹는 사람을 생각하며 만들라”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들어 오늘도 소명을 다하고 있다.


# 궁중병과연구원 정길자 원장
한국의집 원조 여성 주방장

자부심과 긍지로 맛의 품격을 높이다

깊어 가는 가을, 길 양쪽으로 붉게 물든 단풍나무와 노란 은행나무가 눈부시다. 서울 종로구 가회동, 북촌으로 향하는길가에 궁중병과연구원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서 만난 정길자 원장은 차와 다과를 내오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정길자 원장은 궁중병과의 기능 보유자로서, 현재 사단법인 궁중병과연구원을 이끌고 있다. 궁중병과연구원은1999년 궁중음식문화원 부설로서, 우리의 전통 떡과 병과전문 기능인을 양성하는 전문교육기관으로 설립되었다. 국가무형문화재 제38호 조선왕조 궁중병과를 계승하기 위해문을 열었고, 2007년 궁중병과연구원이 독립하면서 이 분야의 기능보유자인 정길자 교수가 초대 원장으로 부임하였다.



한국의집 최초의 여성 주방장으로 한식 메뉴 정립

정길자 원장과 한국의집은 인연이 깊다. 그는 1981년 한국의집이 개관하던 해에 조리실장으로 들어와 4년 만에 조리장으로 승급, 5년간 조리장으로 한식 메뉴의 토대를 닦은 인물이다. 당시 학사이면서 한국의집 최초의 여성 조리장이었던 정길자 원장은 조리장으로 있으면서 한식 메뉴와코스 개발에 힘쓰고, 장류·김치류·육포·떡과자·두부등을 직접 만들면서 음식의 질을 높였다. 또한 조리장이 놋그릇까지 직접 닦는 등 솔선수범하는 리더십을 보였다. 매년 장을 담가 장독에 발효시키고, 김치는 물론 두부도 콩을맷돌로 갈아 직접 만들면서 음식에 정성을 다했다.
    “한국의집에서 일한다고 하면 특급호텔이 부럽지 않았어요. 직원들에게 늘 주인의식을 갖고 일하라고 하였지요.‘힘들다고 1년 만에 그만두고 직장을 옮겨 다니는 것은 이력서에도 못 쓴다. 자부심을 가지라’고 강조하였어요. 그런자부심이 있었기에 음식이 맛이 있고 한국의집에 대한 평판도 좋았지요.”



나라를 대표한다는 자부심으로 음식에 정성 들여

정길자 원장 역시 황혜성 교수의 가르침 아래 궁중음식 조리법을 배웠다. 정 원장은 “스승에게서 배우고, 다시 후배에게 전하면서 궁중음식의 맥을 이어오고 있다”고 말하였다. 1990년 경주에 호텔학교 관광교육과에 한식과가 생기며 초대 교수로 후학을 양성하였고, 이후 궁중병과연구원에 부임하면서 지금까지 궁중음식 병과 부문의 이수자와전수자를 양성하고 있다.
   “눈과 입, 즉 시각과 미각이 즐거워야 음식에 대한 만족도가 큽니다. 그래서 양보다 질로 승부하면서 고객의 만족도를 높였습니다. 한국의집을 찾는 손님들 중에는 외국인이나 외교관 등 특별한 이들이 많습니다. 이 때문에 나라를 대표한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음식 하나하나에 정성을기울였습니다. 궁중음식은 자극적이지 않고 담백하며 부드러운 맛이 특징입니다. 그래서 내국인은 싱겁다고 느끼는데, 잔치음식을 할 때 홍어무침을 넣는 식으로 입맛을 맞추었습니다. 또 특별한 사람뿐 아니라 일반인도 한국의집 음식을 즐기도록 정월대보름에 나물 위주의 식사를 마련하고, 동지에 팥죽을 끓이는 등 문턱을 낮추는 데도 힘을 썼습니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끊임없이 후학들과 교류하며 공부하고 여러 권의 책을 펴내는 등 여전히 열정을 다하는 정길자 원장. 그는 마지막으로 후학들에게 조언 하나를 남겼다.
   “조건과 환경을 따지기보다 자기 스스로 자부심과 열정을 갖는 일, 즉 자세와 마음가짐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어떤 일이든 하고자 노력한다면, 안 되는 일은 없습니다.우리 음식을 사랑하는 젊은이들이 많이 나와서 전통 한식의 맥이 끊임없이 이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기획특집 3 / 한국의집의 탄생Ⅲ 진행. 한국문화재재단 홍보팀 글. 허주희 -

하단내용참조
 
 
초창기 어려움을 극복하고 도약을 위한 노력 펼쳐

한국문화재재단이 운영 중인 한국의집예술단은 한국의집 개관 초기인 1981년 7명의 단출한 규모로 출발하였다.1978년 이전에는 공연요청이 있을 때 외부에서 공연단을섭외해서 공연을 펼치다 1981년 신축 후 극장을 가지게 된계기로 한국의집예술단을 창단하게 되었다. 국립무용단 지도위원이었던 홍금산 씨가 초대 무용단장으로 임명되어 기틀을 잡아 갔는데, 무용단원 모집은 한국무용과 의상에 어울리는 응시자를 위주로 선발하였다.
   각 대학 무용과에 모집공고를 발송할 때는 국립무용단모집이 끝난 뒤였는데, 당시 무용계의 인식은 음식점에서운영하는 무용단으로 여겨 단원 모집에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고 한다.
   국립극장의 협조를 얻어 국립무용단 오디션에서 불합격한 응시자에게 한국의집 무용단에 응모해 줄 것을 요청하던 시절도 있었다. 이렇듯 많은 어려움을 겪으며 한 해한 해 성장하여 국악예술의 상업화에 성공을 거두는 쾌거를 이룬 데에는 무용계 거목들을 무용단장으로 선임해 체계적으로 지도케 하고 단원들 모두 쉼 없는 연습을 통해 무용의 격을 높인 피나는 노력이 있었다. 역대 무용단장에는최현·송범·박병천·정재만·국수호 씨 등이 있는데, 모두들 한국무용계의 원로로서 지도자의 역량이 뛰어난 분들로 평가받았다. 매일 피땀 흘린 연습 덕에 한국의집 단원들의 기량은 국·공립단체 단원들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수준으로 향상되어 세계에 한국을 알리는 코리아 문화사절의 임무를 수행하는 기회를 맞이한다.



내실을 다지는 한편 외연을 점차 확대해 나가

공연 개편은 테마별·분기별로 외부의 도움을 받아서 하고,프로그램 하나하나를 숙달될 때까지 연습하여 무대에 올렸다. 무대 시설과 조명, 음향설비 역시 국립극장을 비롯해 대형 전문공연장 책임자의 도움을 받아 개선해 나갔다.
   한국의집 공연은 1980년대 부채춤, 살풀이, 태평무, 시나위반주, 판소리, 봉산탈춤 등 한국전통공연의 레퍼토리로유지하다가 2000년대 들어 명인명창 상설공연을 통해 판소리, 가야금산조 및 병창, 처용무, 남해안별신굿 등의 예능보유자와 명무가들의 공연으로 외연을 확대하였다. 기획공연으로는 1983년부터 1999년까지 중요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문화재) 마당종목 발표 공연이 이어졌고, 찾아가는 문화활동 사업의 일환으로 소외계층과 특수학교 방문공연도추진하였다. 특히 국가의 주요 행사나 문화교류를 위해 열린 공연으로는 새천년맞이 히말라야 산상천도재(1999년),한·일 국민교류의 해 기념공연(2002년), 일본 5개 지역 순회공연(2002년), 아시아 악·가·무 순회공연(2004년), 프랑스 한국민요 특별공연(2004년), 한인이주 100주년 기념공연(2005년), 한·터키 우정의 해 기념공연(2007년) 등의미 깊은 발자취를 남겨 왔다.



고궁 궁중의례 재현행사 및 해외공연으로 확대

한국관광공사와 함께 한 2002 한·일월드컵 개최지 순회공연은 일본인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이후 한국의집에단체방문으로 이어지며 공연관람과 한식·문화 체험으로연계되어 오랫동안 발길이 이어졌다.
   한편 설, 정월대보름, 입춘, 삼짇날, 단오, 칠월칠석, 추석, 동지 등 세시절(歲時節)에는 특별공연을 통해 내국인은 물론 외국인들에게도 한국의 고유한 풍속을 알리며 흥겨운 시간을 마련해 왔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공연행사로는 서울도심 궁궐에서 시작된 조선시대 궁중의례 재현행사이다. 숙종 인현후 가례의식특별공연(2004년), 고종대진찬의 재현행사(2005년), 영조대 대사례의(2006년) 등역사에 기록된 문헌과 전문가의 고증을 바탕으로 궁궐의아름다움과 조화를 이룬 작품으로 만들었다. 관광객들이많을 경우 요청에 비해 앉을 자리가 부족했고, 공연장 좌석을 늘리는 데는 한계가 있어 외부공연을 시작하였다. 처음나간 공연은 용인자연농원(지금의 에버랜드) 튤립축제였다. 특기할 것 중 하나는 문화재청에서 주관하는 중요무형문화재 해외공연에 지속적으로 참가하여 한국문화의 아름다움을 홍보하는 성과 외에 단원들의 기량이 향상됨에 따라 정재만 보유자의 살풀이 전수장학생으로 전속 단원 전원이 등록되고, 그중 2명의 이수자가 배출됨으로써 중요무형문화재의 맥을 이어가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2000년에접어들어 다양한 공연행사의 원활한 수행을 위해 기존 예술단 외에 별도의 공연팀을 구성하였다. 무용단 5명, 반주단 5명, 사물놀이 4명 등 모두 14명으로 된 팀은 외부공연과 행사를 활발하게 수행하며 공연 수요에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다.
   한국의집이 2001년부터 연중무휴로 운영체제가 바뀌면서 현재 예술단은 무용단과 연주단을 합쳐 24명, 스태프4명 등으로 민속극장에서의 상설공연은 물론 국내외 공연과 각종 외부초청공연을 활발하게 이어나가고 있다.
 
- 기획특집 3 / 한국의집의 탄생Ⅲ 글. 한국문화재재단 홍보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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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혼례의 역사

『대대례(大戴禮)』라는 책을 보면 관혼(冠婚)은 사람의 시작이라 했다. 혼인은 곧 인륜의 시초라는 뜻이다. 또 『공자가어(孔子家語)』에 “얼음이 녹으면 농상(農桑)이 시작되고, 혼례를 치르면 사람의 일이 시작된다”는 대목이 나온다.
   이로 미루어 혼인 제도는 기원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이며,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혼인 제도의 변천을보면, 부여에서는 일부일처제(一夫一妻制)였고 옥저에서는돈을 받고 혼인하는 매매 결혼이 행해졌다는 기록이 있다.고구려에서는 신부의 집 뒤뜰에 서옥(壻屋)이라는 조그마한집을 짓고 사위가 거처하다가 자식을 낳아 큰 다음에 비로소 아내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한다. 이는 모계씨족시대(母系氏族時代)의 유풍으로 보인다.
   그러나 고려를 거쳐 조선조로 들어와서는 유교의 가르침에 의한 혼례가 유가의 예문에 따라 행해졌는데, 이 당시의 혼인은 남녀 당사자끼리의 결합이라기보다 신랑 신부 두집안의 맺음이라 할 수 있었다(『韓國傳統家庭儀禮』 김석진著 참조). 일제강점기를 거쳐 서구의 문화가 들어오면서부터 우리의 미풍인 전통혼례는 점차 사라지고 국민 대부분이신식 의례에 의한 예식장 혼례를 치르고 있다. 신자인 경우성당이나 교회, 절 등에서 종교의 의식대로 혼례를 치르기도 한다.



전통혼례 의식의 변천

전통혼례 의식은 고대 혼유육례(婚有六禮)와 주자 혼유사례(婚有四禮)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육례(六禮)는 △의혼(議婚) △납채(納采) △납기(納期) △납폐(納幣) △대례(大禮) △우귀(于歸)인데 옛날에는 모두 행했으나 1980년대이후에는 사례, 즉 △의혼 △납채 △납폐 △대례 중 대례만행하고 있다. 대례는 전안례(奠雁禮) 교배례(交拜礼) 합근례(合巹禮)로 이루어졌으나 성혼례(成婚禮)를 추가했다.
   전안례와 교배례, 합근례를 합쳐 초례(醮禮)라고 한다.그래서 혼례를 치르는 것을 ‘초례를 치른다’고 하고 혼례 치르는 곳을 초례청(醮禮廳)이라고 한다. 이때 초례청은 신부집 안마당이나 대청마루가 그 장소가 된다. 초례를 위해 차려지는 상을 초례상(醮禮床])이라고 한다.
   전통혼례 진행은 1980~1990년대까지는 집례(執禮)가한자홀기(漢子笏記)를 낭독했으나 2000년대에 와서 필자가한자홀기를 낭독하고 혼례 동작이 진행될 때마다 우리말로해설을 붙여 하객들이 쉽게 이해하도록 했다. 집사는 신랑신부의 거동 절차를 지도하고, 수모들은 신랑 신부 양쪽에 2명씩 서서 교배 합근례 시 절하는 것을 돕고 술잔을 따르고관세우시(盥洗于時) 수건으로 손을 닦아 준다. 성균관, 운현궁, 한옥마을 집례(執禮)는 주로 성균관 유생들이 맡는데 홀기(笏記)도 한국의집과 다르고 제문(祭文)의 창법(唱法)으로 홀기를 창(唱)으로 한다. 전통혼례에서 슬픈 가락이 깃든제문식 창법은 경사(慶事)인 혼례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본다.



한국의집 전통혼례 보급의 의의

정부 산하 공공기관인 한국문화재재단이 운영하는 한국의집 중정에서 1982년 3월 5일 혼례 사례(四禮) 중 대례를시작하게 됨은 고유한 한민족 문화인 전통혼례 의식 부활을 위해 다행스러운 일이다. 예식장 혼인 의식이 지나치게상업적이고, 엄숙한 혼인의 의미를 잘 반영하지 못함에 따라 전통혼례를 치르려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이에 지방은 물론 서울에서도 한국의집을 비롯해 성균관, 운현궁,한옥마을, 세종대왕 기념관, 전쟁기념관, 롯데월드, 낙성대등에서 성행하고 있다.
   전통혼례는 한류의 모든 것을 내포하고 있다. 삼현육각에는 음악이, 사물놀이에는 마당놀이가, 부채춤에는 율동이, 집례의 홀기에는 시문(時文)이 있다. 또 신랑의 관복과 신부의 궁중복, 집례와 집사의 도포, 수모들의 한복에는복식 문화가 담겨 있다. 한류의 본원(本源)이 전통혼례인것이다. 그래서 전통혼례를 관혼상제 의식으로만 볼 것이아니고 중요한 우리나라 유·무형 문화재로 성장시켜야한다.
   한국문화재재단에서는 2003년부터 2004년까지 각본을 작성해 인사동에서는 마당놀이를 비롯해 대례와 우귀행렬까지 시연을 하고, 남산 팔각정에서부터 인천국제공항과 지방 도시 전주까지 순회공연을 한 바 있다(필자도 참석). 그 뒤 중단됐다가 2015년부터 현재까지 인천국제공항에서 전통혼례 시연을 계속하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 전통문화 홍보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전통혼례 앞으로 나아갈 방향

오랫동안 한국의집 전통혼례 집례를 맡으며 몇 가지 아쉬운 점에 대해 소견을 피력한다. 신랑 신부의 의복 착용에관한 문제다. 신랑의 관복은 조선조에서 정2품 당상관의옷이며, 신부의 옷은 왕실 궁녀의 옷이다. 백성들이 혼인할 때만 제공하는 품격이 높은 의복인데, 최근에 와서 고객이 원한다는 이유로 한복집에서 맞춘 옷을 입히는 예가 있었다. 하지만 이는 전통의 혼례복과는 너무나 다르고 품격또한 떨어져 혼주가 원한다고 해도 잘 설득시켜 사용치 않았으면 한다. 궁중 혼례복 착용 문제도 마찬가지다. 임금의곤룡포와 왕비의 옷을 입고 혼례를 한다면 당연히 궁중 혼례 의식을 함이 마땅하다. 그런데 혼례 의식은 백성이 하는의식으로 하면서 옷만 궁중 혼례복을 착용하게 함은 전통을 지켜야 할 재단으로서는 합당한 처사가 아니라고 사료된다.
   전에는 혼례가 끝나면 집례가 중앙에 서고 신랑 신부가 함께 촬영을 해 왔는데, 지금은 거의 행하지 않고 있다.고객이 원치 않기 때문이라 하지만 인륜지대사인 혼례에서 그 의식을 집전한 집례와 함께 찍은 기념사진은 평생 살아가는 부부에게는 소중한 증거와 추억이니 촬영함이 정석이라고 본다. 전통 문화도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바꿀 때는 충분히 상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 한국의집 전통혼례에서 거의 변하지 않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혼례 의식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처우다. 오래 종사한 사람들에게 문화인의 긍지를 살려주는격려 차원에서라도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한류의 원천인 전통 혼례를 계속 유지·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지금처럼 홍보 차원의 시연도 계속하고, 전통혼례진행 요원의 전문성도 키워 주고, 시연 각본도 전통에 근거하되 흥미롭게 볼거리를 제공해야 한다. 아울러 예산을 확보해 시연 장소도 여러 지역으로 확대함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전통혼례 傳統婚禮
가배친영만삼춘 佳配親迎萬象春
홍승결약감회신 紅繩結約感懷新
교배합근영화석 交盃合巹榮華蓆
제주양효복록진 祭酒楊肴福祿眞
송죽진상모절도 松竹陳床謀節道
가문계대상천인 家門繼代上天仁
궁상주악축연리 宮商奏樂祝筵梩
선서양랑홍몽신 善壻良娘虹夢伸

아름다운 배필 친히 맞이하니 만상이 봄이로다
홍실 청실로 가약을 맺으니 감회가 더욱 새롭구나
교배 합근례는 영화로운 잔치 자리요
제주하고 안주를 거양함은 복록 기원의 진수일세
소나무 대나무를 상차림에 사용함은 절도를 흠모함이요
혼인하여 가문의 대를 계승함은 하늘의 인자함을
숭상함이다
삼현육각 연주하는 축연의 흥겨운 자리에서
선량한 신랑신부가 무지개 꿈을 펼치는 도다
<봉정 김기진 근배 鳳亭 金基桭 謹拜

 
- 기획특집 3 / 한국의집의 탄생Ⅲ 글. 김기진. 한국의집 전통혼례집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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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 담그기, 장류로 소스 만들기 등 음식 체험 인기

식품공학을 전공하고 2005년 한국의집에 입사한 이미경매니저는 “식품 조리와 영양, 가공, 메뉴 개발 등 식품에 대한 연구와 공부는 끝이 없다.”고 하면서 “우리의 음식 문화를접하고 체험하는 프로그램에 많은 외국인들이 큰 관심을 보이고 열정적으로 참여한다.”고 말했다.
   한국의집에서는 김치 담그기, 장류로 소스 만들기 등 음식 체험뿐 아니라 한지 공예, 봉산탈 만들기, 전통매듭 배우기, 사물놀이, 택견, 한국무용 등 다양한 전통 문화를 체험할수 있다. 요즘 인기 있는 프로그램은 전통 장류를 활용해 만든 소스에 구운 삼겹살을 찍어 먹는 체험이다. 여기에 외국인들이 한복 체험을 동시에 즐기고, 덧붙여 한국의집 민속극장에서 전통예술 공연을 관람하는 체험까지 두루 선택할 수 있다.
   “쌈장에 찍어 먹는 삼겹살 구이, 뚝배기에 끓인 된장찌개 등 외국인들은 장류를 활용한 한국 음식을 매우 좋아합니다. 된장, 고추장, 간장 등 우리만의 고유한 발효식품인 장류 덕분에 한국 음식은 ‘장맛’이라고 할 수 있죠. 불고기, 비빔밥, 순두부찌개 등 한국 음식에 대한 외국인들의 반응은,음식 체험을 진행하는 우리도 놀랄 정도로 매우 고무적입니다. 일본 대학의 식품전공 학생들은 특히 한국 김치에 열광합니다. 김치 담그기 체험을 하면 김치를 자기 나라에 싸가고 싶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한국의집은 한식 등 우리 전통문화를 체험하는 유일한 곳

식당에서 나오는 음식을 단순히 먹는 것과, 이 음식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직접 체험하는 것은 많이 다를 것이다. 음식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체험하면 그만큼 음식에 대한 이해와 소중함을 느끼고 나아가 음식을 만드는 이의 정성과노고를 알게 된다. 이미경 매니저는 “한식을 비롯해 우리전통문화를 체험하는 유일한 곳이 한국의집”이라고 한다.
   한국의집은 서울 도심에 자리해 교통이 편리하고 접근성이 좋으며, 바로 옆에 한옥마을이 있고 뒤로는 남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어 외국인들에게 더없이 좋은 경험을 제공하는 최적의 공간이다.
   “몇 년 전 한 외국인 학생이 김치 담그기 체험을 왔다가 우연히 한국의집에서 열린 전통혼례식을 보고 감동했나봐요. 몇 년 뒤에 한국인 여성과 이곳에서 전통혼례를 올렸다고 합니다. 그 친구가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어 저를찾았다고 합니다. 직접 만나지 못했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무척 뿌듯했고 한국의집에서 일하는 보람을 느꼈습니다.”
   이미경 매니저는 “전통 한식문화를 활성화하는데 한국의집에서 나서서 꾸준히 연구하고 개발해야 한다.”고 하면서 “앞으로 장 담그기 등 음식체험프로그램을 다양화하고활성화시켜 우리의 우수한 한식을 세계인에게 널리 전하고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 기획특집 3 / 한국의집의 탄생Ⅲ 진행. 한국문화재재단 홍보팀 글. 허주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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