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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 宮 조성 원리와 실제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04-02 조회수 : 26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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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천도와 경복궁 창건


조선의 새로운 수도 한양은 고려시대에 상업의 중심지로서 남경이 설치된 곳으로, 이미 많은 사람이 살고 있던 좋은 터였다. 한양은 북쪽에 주산인 북악산을 두고 동쪽은 낙산, 서쪽은 인왕산이 감싸고, 남쪽은 목멱산(남산)이 있는 분지의 형태로서 고려시대 도성이었던 개경과 너무나 흡사했다. 그러한 점이 태조 이성계의 결심을 굳혔다고 생각된다.
일단 태조 이성계가 천도를 명하자 신도궁궐조성도감이 구성되고 곧바로 터를 잡고 궁궐을 짓게 되는데, 만 10개월도 걸리지 않아 완성(1395년)했다. 이때의 궁궐은 내전일곽에 들어설 최소한의 거처, 조하와 같은 의례를 치를 정전, 상의원 같은 궐내 관청, 국왕을 보조하는 중추원 등의 고위 관청, 남문 역할을 하는 오문과 양쪽 끝에 망루 역할을 하던 각루 정도였다.
궁궐이 완성되자 정도전은 새로 지은 궁궐과 전각의 이름을 지어 왕에게 올렸다. 궁의 이름은 ‘경복궁’이라고 하고 왕과 왕비의 침소를 강녕전, 왕이 나랏일을 보는 곳을 사정전, 정치적 공간인 정전은 근정전이라고 했다. 정도전은 군주는 올바른 것을 근본으로 삼고 그러기 위해서는 남면, 즉 남쪽을 바라보면서 정치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경복궁의 정문과 근정전의 좌향(건물이 앉아 있는 방향)이 남쪽을 향해 일직선이 되도록 했다. 정도전이 가지고 있던 유교적인 통치이념이 건물에 반영된 것이다. 



한양 성곽 축조와 경복궁 궁성의 건립

1395년(태조 4) 9월 경복궁이 완성되고 한 달여가 지나 태조 이성계는 도성조축도감을 설치해 한양에 성곽을 쌓기 시작했다. 성벽은 거의 흙으로 쌓고 성문이 있는 주변만 돌로 쌓았다. 도성 축조가 어느 정도 이루어지자 1398년(태조 7) 경복궁을 둘러싼 외곽에 높은 담장을 쌓는 공사를 진행했고, 이 담장의 이름을 ‘궁성’이라고 칭했다. 후대에 쌓게 되는 창덕궁과 창경궁 등의 담장을 ‘궁장’이라고 표현하는 것과 비교하면 정궁으로서의 격식을 높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해 1월에 시작한 궁성은 7월이 돼 준공됐고 6월에는 궁성의 정문을 만들고 정문 양 끝에 동서 십자각을 세웠다.
여기서 재미있는 부분은 궁성을 완성하는 데 걸린 공사기간이 상당히 짧았다는 점과 궁성정문을 궁성남문으로 부르다 세종대에 가서 광화문이라는 이름으로 지어졌다는 사실이다. 광화문이 지어진 것은 경복궁 창건 3년이 지나서인 1398년이라는 사실을 잘 기억해 두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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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궁 창덕궁의 창건

이방원이 제1차 왕자의 난을 성공시킨 후 조선의 2대 왕으로 이성계의 둘째인 방과가 즉위한다. 정종이다. 정종은 즉위 4개월이 지난 1399년(정종 1) 2월, 왕자의 난으로 민생이 안정되지 않은 한양을 떠나 수도를 다시 송도로 옮겼다. 이후 2년 동안 이방원의 손에서 좌지우지되던 허울뿐인 왕위는 끝이 나고 1400년(정종 2) 11월, 이방원이 3대 왕(태종)으로 즉위했다. 태종은 4년 뒤인 1404년(태종 4) 한양으로의 천도 방침을 정하게 되고, 이궁조성도감이 구성됐다. 한양에는 태조 때 만들었던 경복궁이 있었지만 따로 이궁을 세우도록 결정하고, 1405년(태종 5) 이궁인 창덕궁을 10월 19일 완성했다.
한양에는 북악 아래 경복궁이 있었고, 건축한 지 10년도 되지 않은 거의 새 궁궐인 데다 규모 역시 창덕궁에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컸음에도 태종은 왜 굳이 창덕궁을 거처로 삼았을까? 이전에 경복궁을 지을 때 하륜이 말하기를 “산이 갇히고 물이 마르니 왕이 사로잡히고 족속이 멸할 것이므로, 형세가 좋지 않다” 라고 상서를 올렸었다. 태종은 이를 염두에 두고 터가 좋지 못한 경복궁을 꺼리고 이궁인 창덕궁을 따로 만들어 그곳을 거처로 삼았던 것이다.



세종, 이름을 짓다

세종은 상왕인 태종이 돌아가신 지 3년이 지난 1425년(세종 7) 4월에 거처를 경복궁으로 옮겨 근정전에서 신하들의 조회를 받고 사정전에서 정사를 보았다. 1426년(세종 8) 10월, 집현전에 명을 내려 경복궁을 조성하면서 지금까지 이름이 없던 궁성문이나 다리의 이름을 짓도록 했다. 비로소 궁성남문은 임금의 빛이 널리 미친다는 의미의 광화문(光化門), 동문은 봄을 일으킨다는 의미의 건춘문(建春門), 서문은 가을을 맞이한다는 의미의 영추문(迎秋門), 태종 때 오문(午門)으로 불렀던 광화문 정북의 문은 예의를 넓힌다는 의미로 홍례문(弘禮門)으로 이름을 지었다. 또한 근정전 동월랑의 협문(사이에 있는 문)은 일화문(日華門), 서월랑 협문은 월화문(月華門), 근정문 앞쪽 돌다리는 영제교(永濟橋)라 이름을 지으며 그동안 이름조차 갖지 못했던 경복궁을 조선의 정궁으로 확고하게 다져 나갔다. 



광화문 앞 공간의 쓰임새

1440년(세종 22) 4월 6일, 조선왕조실록에는 “흥인문으로부터 광화문 동구 골목까지 모두 결채(結綵)하고, 풍악을 연주하면서 앞에서 인도하여 수진방(壽進坊)에 이르니, 교방(敎坊)에서 가요(歌謠)를 드리어 아뢰는 기생이 침향산(沈香山)을 이끌어 행하므로 … 중략 … 노래하고 춤추면서 근정전(勤政殿) 뜰에 이르니, 사대부의 부녀들이 길 좌우에 채색 장막을 치고 흥인문에서 광화문 밖까지 구경하는 사람들이 담과 같았다”라는 내용이 기록돼 있는 것으로 보아 도성에서 행사가 있으면 많은 사람들이 길에 나와 구경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광화문 앞 육조대로는 가장 활성화된 곳이었다.
세종 때 광화문 안에는 신문고가 설치돼 억울한 사연이 있는 사람은 와서 북을 쳤는데, 북은 유생이나 노비나 신분의 구분 없이 모두가 쳤다. 또한 국왕이 부묘를 마치고 궁으로 돌아오는 날은 연도는 채색 비단으로 꾸며지고 광화문 앞에 높이 세운 산대는 장식이 이뤄지고 산대 앞에서는 광대들의 흥미로운 놀이도 펼쳐졌다. 연회뿐 아니라 광화문 앞에서는 활쏘기와 말 타고 창술 겨루기 등의 무과 과거시험도 치러졌으니, 이 또한 백성들에게는 볼거리가 됐다. 광화문 앞 외에 도성의 백성들이 모일 수 있는 넓은 공간은 없었으니, 이곳은 조선의 백성들이 산대놀이도 보고 궁중의 문화도 즐길 수 있었던 여흥과 관광의 공간이었다.이러한 공간이 오늘날에도 우리 국민들에게 있어 문화예술의 공간, 소통의 공간, 축제의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으니 얼마나 오랫동안 이어져 온 것인가? 



경복궁의 중건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으로 도성 내 세 궁궐은 모두 불태워졌다. 의주에 피난했던 선조는 한양으로 다시 돌아왔고, 임시 거처인 정릉동 월산대군 사저에서 지내며 경복궁이 아닌 창덕궁을 중건(1611년)했다. 아마도 임진왜란을 겪고 난 후 태조 때 경복궁터가 불길하다고 상서를 올렸던 하륜의 말이 자꾸만 거슬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대로 방치되던 조선의 정궁 경복궁이 중건에 들어간 것은 1865년(고종 2)으로, 그해 4월 2일 대왕대비 신정왕후의 교지가 내려지고 공사를 주관할 영건도감이 설치됐다. 온갖 어려움이 있었지만 경복궁을 복구하려는 의지가 강했던 흥선대원군의 추진력으로 1868년(고종 5) 5월 드디어 완공했고, 7월 2일 고종과 왕실 가족은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경복궁 시대가 열린 것이다.
경복궁은 1395년(태조 4)에 지어질 당시의 기본 틀을 유지했으며, 1398년(태조 7)에 완성된 외곽의 궁성도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이것은 경복궁 중건을 통해 건국 당시의 영화를 다시 살리겠다는 흥선대원군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광화문에서 흥례문-근정문-근정전-사정전-강녕전으로 이어지는 남북 축선에 따른 건물배치는 유교이념에 따른 정궁 경복궁만의 질서였는데, 이것이 그대로 복구되었던 것이다. 태종 때 지어진 경회루가 원위치에 다시 만들어졌고, 세종 때 만든 교태전이 강녕전 뒤에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전과 다른 건물들도 만들어졌다. 바로 대비를 위한 건물들이 확장된 것이다. 교태전 동쪽에 대비정침인 자경전이 만들어지고, 그 주변으로 만경전과 흥복전 등이 만들어졌다. 고종은 온돌방이 없었던 조선 초기 편전 사정전을 이용하지 않고 좌우 넓은 온돌방을 갖춘 수정전에서 정사를 보았다. 결국 중심축은 조선 건국 시 만들어졌던 배치를 따라하되, 변화된 궁중생활에 적합한 건물들은 추가적으로 확대해서 만들었다. 



경복궁의 현재, 그리고…

1910년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점하면서 궁궐은 전시장 혹은 식물원·동물원 등으로 변질되는 등의 수난을 겪었다. 특히 조선의 정궁이었던 경복궁에서 전국궁술대회, 전국미술전람회, 조선물산공진회 등이 열리면서 철저히 유린됐다. 궐 내 많은 전각들이 철거됐고 정전·편전·침전·경회루 등의 건물들만 살아남았다. 참으로 아픈 역사다.
우리가 지금 관람하고 있는 경복궁은 문화재청에서 1990년대부터 흥선대원군에 의해 조성된 경복궁을 기준으로 한 복원을 진행한 결과물로, 궐내각사와 동궁지역을 제외한 거의 모든 건물들이 제자리를 찾았다고 보면 된다. 광화문·소주방·태원전· 건청궁 등 다양한 건물에 대한 복원을 진행했으며, 현재는 흥복전 권역을 복원 중에 있다. 앞으로 광화문 앞 월대를 복원하려는 장기적인 플랜도 꼼꼼히 검토하고 있다고 하니 더 멋진 경복궁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현재의 궁궐은 왕과 왕실가족이 사는 공간이 아니다. 21세기 궁궐은 국민들이 함께 역사를 공부하고 문화를 즐기고 예술을 체험하는 문화향유의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이에 문화재청에서는 광화문만 복원한 것이 아니라 그 앞에서 수문장 교대식을 운영하고 있으며, 소주방을 복원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궁중음식체험을 운영하고 있다. 궁궐의 화려함 속에 아픔과 시련의 역사가 있었음은 알되,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대한민국의 최고 브랜드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문화유산 보존은 모든 사람들이 그 가치를 알게 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기에 문화유산 활용은 문화유산 보존의 가장 중요한 요건이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문화재재단에서 진행하는 궁중문화축전은 매우 중요한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한다. 


 
- 글. 김재홍. 한국문화유산연구센터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