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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 영화 속 궁궐 이야기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04-02 조회수 : 3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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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 : 왕이 된 남자> 속에 그려진 궁궐에 대한 상상력


2012년 빅 히트작인 추창민 감독의 영화 <광해 : 왕이 된 남자>는 인상적인 장면이 꽤나 많은 작품이다. 그중 하나가 극 후반부에 도승지 허 균(류승룡)이 광해군을 대역(代役) 중인 광대 하선(이병헌)과 나누는 대화 장면이다.
하선, 아니 광해군은 이제 막 동인과 서인, 북인과 남인, 대북과 소북 등으로 갈가리 나뉘어 정쟁을 일삼던(보다 정확하게는 대북 vs 서인이 될 터이다. 광해군은 서인이 옹립한 능양군, 즉 인조의 쿠데타로 집권 15년 만에 실각한다.) 대신들을 향해 명나라에 2만 군사를 파병하는 일 따위로 백성들을 희생하지 않겠다고 일갈한다. 명은 이제 후금, 곧 청(淸)나라로 넘어갈 판이지만 서인들은 왕에게 명과의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억지를 부린다. 분기탱천해 신하들을 물리친 광해의 기상에 놀란 허균은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왕이 되시겠소이까? 내가 왕을 만들어 드리리다.” 그러자 하선은 왕이 되고 싶다고, 그러나 누구를 해하고 되는 왕이라면 왕이 되고 싶지 않다는 말을 남긴다.
그 두 사람이 진정 그러한 대화를 나눴는지는 의문이다. 무엇보다 실제로 광해군을 대신했던 하층 계급의 남자가 존재했는지는 더욱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추창민의 영화는 그런 사실(史實)이 진행된 듯하게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광해>처럼 이야기가 너무 그럴 듯한 영화의 경우 사람들은 종종 역사적 공간에 대한 착시를 불러일으킨다. 광해군 아닌 광해군과 허균이 밀담을 나누는 저곳을 사람들은 경복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당시 왕이 정무를 보던 경복궁 근정전에서 이런 말들이 오갔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가 않다. 광해군 때는 경복궁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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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경복궁은 실제 경복궁이었을까?

조선 태조 이성계가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면서 1394년 건립한 경복궁은 선조 때인 1592년 임진왜란 때 불타 고종 때인 1868년 중건될 때까지 270여 년간 사용된 적이 없다. 중건된 경복궁조차 화재와 복구를 반복하다 일제 조선총독부 건물이 들어서는 등 이후 영욕의 과정을 수차례 겪었다. 그러니까 영화에서 나오는 궁궐, 왕이 기거했던 왕궁은 거의 모두가 경복궁이 아니라는 얘기다.
조선 왕은 거의 모두가 경복궁보다는 창덕궁에서 기거했다. 지금의 홍제천에서 일개 부하들과 반정(反正)의 칼날을 씻고 인왕산을 건너 역모를 성공시킨 인조의 최종 공격지도 경복궁이 아니라 창덕궁이었다. 인조반정은 결국 이 창덕궁조차 불타 없어지게 해 다시 짓게 만들긴 했지만.
조선의 궁궐은 모두 다섯 개였다. 경복궁이 있으며, 그 옆의 창덕궁과 창경궁이 있고, 덕수궁과 경희궁이 그것이다. 우리가 영화에서 보는 왕의 집무실, 정실부인의 처소, 왕이 후궁들과 거닐던 후원 등등은 대개가 경복궁이 아니라 창덕궁에서의 모습들이다. 
비원(秘苑)은 창덕궁의 후원을 일컫는 말이었으며, 이는 일제가 붙인 말이라 해서 지금은 많이 쓰지 않는다. 창경궁은 대부분 왕비가 머물렀던 곳이고 덕수궁에 머물던 왕은 딱 두 명, 곧 선조와 고종밖에 없었다는 점도 아는 사람들만 아는 얘기다. 고종은 경복궁을 중건했지만 처소는 덕수궁을 고집할 만큼 그곳을 선호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역사극, 특히 조선시대를 그린 영화의 궁중(宮中) 공간에 일정한 윤색(潤色)을 가하지 않고, 이를 있는 그대로의 사실(事實)로만 그리기 시작하면 상상력에 금이 간다. 영화적 상상력은 역사를 왜곡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풍부하게 만드는 역설의 동력이 될 수 있다. 조선조를 그리는 많은 사극들을 보면서 우리들이 자유자재로 월(越)담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조선의 오궁(五宮)이 각각 어떤 특징들이 있고 시대적으로 어떻게 변천했으며 따라서 이를 어떻게 차별화해서 보는지를 사전에 알게 하면 영화가 보다 흥미로워지게 될 것은 분명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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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비(加比, Coffee)> 속 덕수궁 돌담길과 정관헌(靜觀軒)

예컨대 장윤현 감독의 <가비(加比, Coffee)>에서 조선 최초의 바리스타가 되는 여성 따냐(김소연)가 아관파천(俄館播遷)①으로 러시아 공사관에서 망명 아닌 망명 생활을 하던 고종을 만나기 위해 드나들던 덕수궁의 비밀 문은 어디쯤 있었을까. 따냐는 또 다른 조선 여성으로 일본 편에 선 사다코(유선)의 고종 암살 음모를, 이중 스파이로 고종과 자신을 동시에 지키려 했던 남자 일리치[사카모토(주진모)]에게 알리려고 애쓴다. 그런데 그 문은 어디쯤 있었을까. 분명한 것 하나는 따냐가 당시의 러시아공사관을 오가던 길은, 지금은 ‘고종의 길’로 복원된 덕수궁 돌담길이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사람들은 덕수궁 돌담길을 세종대로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십상이지만 영국대사관이 들어서기 전까지는 지금의 정동까지 이어지는 골목길 돌담 전체를 일컫는 것이었다. 그런 점들을 머릿속에 연상하며 <가비>를 보면 훨씬 더 재미있을 것이다. 이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지 못한 데는 사적(史蹟)에 대한 몰이해가 한몫 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럼에도 <가비>는 한국영화로서는 처음으로 정관헌(靜觀軒)을 공개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남다르다. 정관헌은 고종이 덕수궁 내에 만들었던 로마네스크양식의 서양 건축물로, 실제로 조선의 이 비극적인 왕은 여기서 커피를 마시며 울분과 회한을 달랬던 것으로 전해진다. 



<관상> <사도> 그리고 왕의 거처 창덕궁

송강호의 명연기를 만날 수 있는 <관상>과 <사도>도 조선 궁궐에 대한 이해도를 넓히면 훨씬 역동적으로 볼 수 있는 작품들이다. <관상>은 문종의 동생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 곧 세조에 오른, 쿠데타의 역사 계유정란(癸酉靖難)을 배경으로 한다. 수양이 단종의 충신이었던 김종서 장군을 척살한 곳은 어디였을까. 현재 문화일보 옆 농협중앙회 본사 주변에 김종서 집터 표지석이 있는 점으로 미뤄 서대문 근방이 그의 집이었을 것이다. 장군은 여기서 단종이 기거하던 경복궁을 오가며 출퇴근했을 듯하다. 왕을 지근거리에서 모신 셈이다. 김종서를 죽이고 조카를 귀양 보낸 세조는 이후 자신의 아버지인 세종부터 머물던 경복궁을 버리고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는 첫 왕이 된다.
자신의 친아들을 왕권을 위해 의도적으로 죽인 영조(송강호)의 이야기 <사도>에서 세자(유아인)가 갇힌 뒤주는 또 어디에 놓여 있었던 것일까. 그 좁은 상자 아닌 상자에 갇혀 갈증으로 숨이 넘어가기 전 세자가 아비인 왕에게 간언을 하며 이마를 찧느라 피를 흘렸던 돌바닥은 어디에 있었던 것이었을까. 영·정조 시대의 모든 비극은 창덕궁과 창경궁에서 일어났다. 영조 때는 이미 경복궁을 사용하지 않은 지 오래된 시점이며 사도세자의 비극은 창경궁 앞마당에서 벌어진 일이었다.다만 영조는 천신만고 끝에 경복궁 북쪽 기슭에 모신 어머니 숙빈최씨의 사당을 모시기 위해 교태전 건순각을 조기에 만들었다. 지극한 효심이 경복궁의 일부를 일찍 서둘러 중건케 한 것. <사도>가그런 사연까지 담고 있지는 않지만 궁과 궁 사이에 흐르는 도도한역사의 흐름은 영화가 단순히 허구의 이야기만이 아님을 감지하게만든다.


 
- 글. 오동진. 영화평론가  일러스트. 임진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