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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 권번 예기(藝妓)의 은어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04-02 조회수 : 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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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맞다’ ‘곁사니’ ‘무릎제자’ 그리고 ‘길내는 선수’ 


16세에 머리를 얹고 이듬해에 어룬기생, 즉 결혼을 하게 된 기생 손채옥(孫彩玉)은 “나는 채맞은 기생은 아니었다”고 했습니다. ‘채맞다’는 말은 스승에게 회초리 채로 맞아 가며 소리를 배운다는 뜻으로, 대개 사설 강습소에서 소리를 깎이는 중에 흔히 일어나는 일이었습니다. 사범 옆에서 사실상 2인자 역할을 하는 제자를 ‘곁사니’라고 불렀는데, 곁사니는 대부분 권번의 기생이었습니다. 이들은 주로 권번 수양 아주머니들의 특별한 부탁으로 과외를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들 곁사니들은 스승과 무릎을 댈 정도로 지척에서 소리를 배운다고 하여 ‘무릎제자’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무릎제자는 첫 제자를 의미합니다. 
당시 기생들에게 인기 있는 악곡은 시조와 민요, 잡가였습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잡가’라는 말 대신 ‘좌창’이라는 말을 주로 썼습니다. 좌창곡들 가운데 ‘범벅타령’처럼 점잖지 못한 소리는 ‘별소리’ 라고 했습니다. 이들 소리는 인기는 많지만 정작 점잖은 판에서는 부를 수 없었습니다. 
잡가는 주로 단재비 단장고에 맞추는데, 이때 장구를 ‘고장’ 또는 ‘고장이’라고도 했으며, 특히 장구 반주를 동료 소리꾼에게 부탁할 때는 정중하게 “언니, 길내줍서”라고 했습니다. 상대가 어린 후배라 하더라도 ‘언니’라는 말을 꼭 하게 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장구잽이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소리하는 길을 잘 내 달라’는 뜻인데 일제강점기에는 이비봉, 광복 이후에는 이소향·고백화가 길내는 선수였다고 합니다. 



기생의 출장 연회와 그 은어들

기생은 권번 소속인 동안에는 큰 요릿집과 주요 인사들의 개인적 연회에만 공식적으로 참여가 가능했습니다. 필부의 환갑잔치 같은 사적 연회 참여는 제약이 있었습니다. 다만 권번 사장 또는 수양 아주머니가 허락하거나 혹은 사설 강습소 사범이 동행할 때에는 환갑연(還甲宴)이나 칠순연(七旬宴)에서 가무악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파주에서 여생을 보낸 임학선(林鶴仙)에 의하면 부잣집에서 기생을 부를 때는 미리 숙수(숙비단)나 모본단(참비단)을 보내와 옷을 해 입고 가기도 하는데, 이런 옷은 거추장스러워 가벼운 인조견 비단옷을 해 입고 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때 여러 기생이 색색이 고운 인조견 비단옷을 입고 들어가는 모습을 ‘인조견 바람’이라고 했습니다. 
임학선은 “환갑집에 온 기생을 ‘앵도’나 ‘국화’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환갑이 춘사월이나 시월에 많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전합니다. 기생들 사이에서 ‘앵도질 간다’는 표현은 ‘환갑집 간다’는 뜻입니다. 또한 앵도질 갈 때 따라오는 늙은 사범을 손님들은 ‘반치생이’라고 부르곤 했답니다. 치생은 눈치를 뜻한다고 합니다. 급하게 배워 부른 노래는 아무래도 덜 배운 티가 많이 납니다. 덜 배우거나 모자란 소리를 가진 기생을 ‘풋새’나 ‘풋생이’, 그리고 그 소리를 ‘풋소리’라고 했으며, ‘소리에서 풋내난다’ 고 하면 소리를 영 내놓을 수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소리가 늘지 않는 기생은 ‘굼보’라고 했습니다. 



몸관리가 안 좋은 기생 ‘꺽목’과 ‘오궁떼기’

판소리 계통에서 좋지 않은 성음을 노랑목, 발발성, 악청이라고 얘기하는 것처럼 잡가 사범들도 비슷한 용어를 썼다고 합니다. 특히 마포 독막에 살던 박인섭 사범은 “꺽꺽댄다”는 뜻으로 ‘꺽목’ 혹은 ‘쩍목’(쩍쩍 갈라진다는 뜻), 소리가 뻗지 못하고 자꾸 미끄러지면 ‘자갈목’이라고 했습니다. 한번은 손채옥이 유행가 ‘연락선은 떠난다’를 부르는 것을 박인섭이 우연히 듣고는 “자갈 씹는 소리 하지 말라”며 크게 혼냈다고 합니다. 오영근은 제자들에게 “소리 속이 거뭏다”라는 말을 자주 했는데, 이 역시 좋은 뜻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한성권번 출신 하옥선(河玉仙)은 기생 가운데 몸 관리가 엉망인 기생을 가르켜 ‘오궁떼기’라고 흉봤다고 합니다. 오궁떼기는 당시 오궁골에 모여 살던 삼패 출신 기생들을 얕잡아보는 표현입니다. 하지만 ‘삼패’니 ‘일패’니 하는 구분이 없어진 1920년대 이후 오궁골에는 주로 가난한 기생들이 살았으며, 백모란·백운선·김연옥 같은 예기도 모두 오궁골 출신이라고 합니다. 



권번의 야유회와 소리판에서 유래된 ‘봉잡았다’ ‘딱지뗐다’

 권번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조선권번에서는 3월에는 화전놀이, 6월에는 선유놀이, 9월에는 단풍놀이를 꼭 했습니다. 이때 권번 야유회가 시작되면 많은 스폰서들이 붙었다고 합니다. 스폰서들이 내놓는 돈은 ‘봉’이라고 했으며, 100원 이상 큰 스폰이 들어오면 ‘대봉들었다’고 하는데, 예나 지금이나 큰 행운을 얻으면 ‘봉잡았다’라는 말을 쓰는 것은 여전한 듯합니다.
사설학원은 이런 놀이 대신 동네 어른들을 모아 겨우내 소리판을 벌입니다. 이를 공청이라고 하는데요. 가을에 파 추수가 끝난 밭을 깊게 파서 움을 만들어 지지대를 비스듬히 엮은 다음 그 위에 거적을 두르고 나무 창을 낸 공간들이 서울 각지에 세워지는데, ‘파밭에 움을 팠다’라는 뜻으로 ‘파움’(깊은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범들은 동네 촌로들을 모아 제자들의 소리 실력을 검증받는데, 이 과정이 끝나면 “딱지뗐다”라고 했으며, 이를 거쳐야 비로소 실력을 인정받았다고 합니다.

 

- 글. 김문성 국악평론가  그림. 박새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