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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 일제 강점 등 아픔의 공간 남산골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06-04 조회수 : 2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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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승지이자 출판 단지, 가난한 선비들의 주거지

조선시대 남촌의 남쪽 경계인 목멱산은 한양의 내사산 중의 하나로서 안산(案山)에 해당하며, 남쪽에 위치했기 때문에 흔히 남산이라 불렸다.
남산 북쪽 기슭에 해당하는 남산골에는 산수가 수려해 삼청동·백운동 등과 더불어 한양의 명승지로 손꼽혔던 청학동이 있었다. 유명 인사들이 이곳에 귀록정(歸鹿亭)·녹천정(鹿川亭)·노인정(老人亭) 등의 누정을 짓고 시회(詩會)를 베풀며 남산을 비롯한 한양의 풍경을 노래하기도 했다. 교서관동(校書館洞)과 주자동(鑄字洞)이라는 동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서적의 인쇄와 출판을 담당하는 교서관과 주자소가 이곳에 있었는데, 이러한 장소성은 현재의 을지로 인쇄골목과 충무로 인쇄골목으로 이어지고 있다. 또한 ‘남산골 샌님’이나 ‘딸깍발이’라는 표현처럼 실세(失勢)한 사람들이나 가난한 선비, 몰락한 양반들이 주로 거주했다.



일제 식민지배의 본거지이자 경성의 최대 번화가

남산골 일대가 일본인의 본거지가 된 것은 1885년 조선 정부와협의를 통해 이 지역이 일본인 거류지로 정해지고 곧이어 일본공사관이 자리하면서부터였다. 1894년 청일전쟁과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잇달아 승리하자 서울로 이주해 온 일본인 수도급증해 1910년경에는 3만 명을 웃돌았으며, 이들을 수용하기 위한 일본식 주택도 현재 지하철 충무로역 일대를 중심으로 많이건립됐다. 식민 통치를 위한 기관도 속속 들어섰다. 1906년 2층목조건물 형태로 세워진 통감부 청사는 1910년 총독부 청사가 돼1926년 총독부가 경복궁 안으로 이전될 때까지 그 청사로 쓰이다가 은사기념과학관으로 바뀌었다. 기존의 일본 공사관 건물은 통감 관저, 총독 관저로 사용되다가 1939년 총독 관저가 현 청와대자리로 이전한 후 역대 통감과 총독 관련 유물을 전시하는 시정기념관으로 개편됐다. 한국의집 자리에는 총독부 2인자 정무총감의 관저가 세워졌고, 한옥마을 자리에는 헌병대와 헌병대사령부가 들어섰다.
재경 일본인을 위한 종교시설도 마련됐다. 통감부 건물 맞은편엔 동본원사(東本願寺)가 세워졌다. 현 숭의여대 안에 대신궁(大神宮)이 세워졌다가 병탄 후 경성신사로 개칭됐으며, 그 근처에러일전쟁의 영웅으로 추앙받던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를 위한노기신사도 들어섰다. 1925년에는 일본의 한국 지배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남산 중턱에 조선신궁을 건설했으며, 일제 말부터는 한국인의 조선신궁 참배까지 강요했다. 남촌 동쪽 끝머리에 세워진 장충단은 공원화하고 그 맞은편에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박문사를 건립했다. 대한제국의 국립현충원 격인 장충단의 역사성을 완전히 뒤집은 조치였다.
그런데 남산골 일대가 일본인 본거지에 그친 것은 아니었다. 일본 거주민이 늘어나는 것에 발맞춰 도로와 가로등, 상수도와 하수도 등 각종 사회 기반시설이 갖춰졌다. 근대적 하수도는 비가 오면 질퍽이던 진고개 일대의 거주환경을 개선했으며, 이때 만들어진 ‘진고개에서 회현동 방면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서울 최초의 콘크리트 포장도로였다. 이 도로를 따라 근대 물품을 판매하는 각종 상점과 백화점 그리고 카페와 다방, 댄스홀 등의 유흥시설이 들어서면서 진고개 혼마치(本町) 일대는 경성 최대의 번화가로 변신했다. 조선시대 ‘부귀(富貴)한 북촌과 빈천(貧賤)한 남촌’의 이미지가 불과 반세기 만에 역전돼 ‘퇴락하는 북촌과 번창하는 혼마치’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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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을 정보력과 군사력으로 뒷받침하다

5·16군사정변으로 집권한 군사정권은 국가정보기관으로 중앙정보부(약칭 중정, 이후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국가정보원으로 개칭)를 창설했는데, 중정·안기부의 핵심 시설들이 바로 남산 일대에 자리 잡았다. 현 대한적십자사는 안기부 사무실이었고, 서울소방재난본부는 안기부 사무동과 유치장으로 사용됐으며, 지금은 철거된 서울시 도시안전본부(국내 정치사찰의 본거지 안기부 6국이 위치)와 옛 tbs교통방송국 건물도 안기부 건물이었고, KBS 라디오방송국·통일부 청사로 쓰였던 현 애니메이션센터도 1986년부터 안기부에서 사용했다. 재난본부 뒤편의 현 문학의집은 안기부장의 관사였으며 그 옆의 산림문학관은 안기부장 경호원 숙소였다. 지금은 청소년 숙박
시설인 서울유스호스텔로 바뀐 건물은 안기부 본관으로 수많은 민주인사들이 고문과 취조를 받았던 역사적 현장이며, 그 주변의 남산창작센터와 서울종합방재센터 역시 안기부에서 쓰던 건물들이다.
한편 식민지 시기 헌병대와 헌병대사령부가 자리했던 중구 필동에 5·16군사정변이 일어난 이듬해 수도경비사령부(이후 수도방위사령부로 개칭)가 들어섰다. 수도방위사령부는 유사 시 수도 방위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동시에 군 출신 대통령의 최측근이 사령관에 임명돼 군사정권을 뒷받침하는 군사력으로도 기능했다.



문화 공간과 다크투어의 현장으로 탈바꿈하다

남산 일대에 수십 년간 배어 있던 군사독재의 흔적은 한국사회가 민주화되면서, 직접적으로는 1994년 서울 정도 600년 기념사업과 남산 제자리 찾기 사업이 계기가 돼 정리되기 시작했다. 수도방위사령부는 서울 외곽으로 이전됐고, 그 자리에는 조선 말기의 전통 한옥들을 옮겨와 조성한 남산골 한옥마을이 자리해 지금은 내외국인들이 자주 찾는 문화 공간이 됐다. KBS·통일부·안기부숙박가 차례로 사용했던 건물도 외관을 훼손하지 않은 채 리모델링을 거쳐 애니메이션센터로 탈바꿈해 만화·애니메이션 산업의 중심지이자 어린이들이 즐겨 방문하는 문화 명소가 됐다. 1995년 안기부가 내곡동으로 이전한 이후 다른 안기부 건물들은 공공기관 청사로 활용되거나 문학의집·산림문학관·남산창작센터 등 문화공간으로 변신했다.
조선신궁 자리에 안중근기념관을 세우고 백범광장을 조성하는 등 일제 잔재를 극복하려는 노력은 2010년대 들어와 남산골 일대에 남겨진 일제의 흔적을 체계적으로 발굴·정리해 역사의 반면교사로 삼기 위한 움직임으로 진화했다. 한국통감 관저 터 일대에 표지석을 세우는 한편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무하는 기억의 터를 조성했으며, 2018년에는 서울시에서 대한제국의 멸망과 관련된 이 일대의 일제 흔적을 연결한 1.7㎞의 역사탐방길(일명 ‘국치길’. 한국통감관저 터~한국통감부 터~노기신사 터~갑오역기념 터~경성신사 터~한양공원 비석~ 조선신궁 터)을 조성하기도 했다. 이제 남산골은 일제 식민지배의 흔적을 체계화하는 다크투어의 현장으로 또 한번 변신했다.



- 글. 김웅호. 서울역사편찬원 전임연구원, 문학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