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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 풍류방의 언어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06-04 조회수 :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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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 속 ‘풍류’의 의미와 그 구성에 관한 용어들

최치원(崔致遠)이 쓴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에는 “이 나라는 현묘한 도[玄妙之道]가 있으니 이를 풍류(風流)라 하였다”라는 말이 전해진다. 하지만 ‘현묘지도’로서 풍류는 오랜 세월을 거쳐 오늘날에는 사전적으로 “멋스럽고 풍치가 있는 일, 또는 그렇게 노는 일”이라는 뜻과 “대풍류, 줄풍류 따위의 관악 합주나 소편성의 관현악을 일상적으로 이르는 말”이라는 뜻을 가진 말로 변하게 됐다.
조선 후기에 우리말을 기록한 여러 문헌들을 보면 ‘악(樂)’이라는 말을 “풍류하다”라고 했으니 당시 풍류는 음악을 하는 일로 대중들에게 알려져 있었을 것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풍류를 즐기는 음악인들을 ‘풍류객(風流客)’이라 칭했고, 그들이 즐기는 기악(器樂)인 현악영산회상(絃樂靈山會相) 줄풍류를 ‘음률(音律)’이라 했기에 ‘율객(律客)’이라고도 불렀다. 풍류에는 줄풍류 외에도 가곡(歌曲)을 부르기도 했는데, 이러한 가곡을 전문적으로 부르는 음악인들을 ‘가객(歌客)’이라고 했다.



풍류방의 모임과 운영에 관한 언어들

풍류객들이 모여 줄풍류를 즐기는 장소를 ‘풍류방’이라 불렀는데, 이들이 모이는 모임 자체는 ‘풍류회(風流會)’ ‘율회(律會)’ ‘율계(律契)’라고도 했다. ‘율계’는 근대기 풍류회의 한 형태로 율객들이 계를 조직해 모였기 때문에 이르는 말이었다.
이러한 율계는 전통 음악사회에서 지역마다 존재했다. 그래서 그런지 전국에 분포하는 율계가 360개 정도 됐다고 하여 이를 ‘풍류 삼백육십 틀’이라고 했다.
풍류방은 경제적으로 능력을 갖춘 율객이 개인 사랑방을 율방으로 운영하는 경우나 계를 조직하여 율계로 운영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하는데, 모이는 규모에 따라 매일 연주회를 갖는 일회(日會),
한 달에 한 번씩 갖는 삭회(朔會), 연회로 축제를 벌이는 춘추회(春秋會) 등으로 나누었다고 한다. 



줄풍류 ‘현악영산회상’의 기원과 변천

풍류회에서 연주하는 대표적 음악인 줄풍류는 현악영산회상을 말한다. 영산회상이란 조선 전기 궁중음악의 하나로서 정재반주(呈才伴奏)에 활용되던 음악에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양덕수(梁德壽)의 『양금신보(梁琴新譜)』에 영산회상을 무도지절(舞蹈之節)이라고 한 것을 보면 이 악보가 편찬된 17세기 초에도 춤 반주 음악으로 영산회상이 활용됐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영산회상은 음악적으로 변모하게 되고 상령산(上靈山) 중령산(中靈山) 세령산(細靈山), 가락덜이와 같은 여러 변주곡으로 분화 발전된다. 
이들 악곡 명칭에 나타나는 ‘상·중·세’의 의미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는 풍류의 하나로 가객들이 부르던 성악곡인 가곡에서 보이는 만대엽(慢大葉) 중대엽(中大葉) 삭대엽(數大葉)과 같은 악곡 명칭에서 나타나는 ‘만·중·삭’과 관련이 있는데, 일부 고악보에서 상령산·중령산·세령산을 만령산·중령산·삭령산으로 이름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중·삭’은 보편적으로 빠르기와 관련된 명칭으로 보고 있으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악곡의 음높이와 관련된 명칭이라는 주장도 보인다. 즉 ‘세(細)’가 ‘삭(數)’과 같이 ‘잦은’ 또는 ‘자진’과 같은 의미로서 혼용해서 쓰이는데, 보허자 변주곡의 하나인 세환입(細還入)이 바로 낮은 환입인 본환입(本還入)에 대해서 높은 음역대의 환입이라는 뜻으로 쓴 것으로부터 ‘세’가 높은 음악이라는 뜻도 갖고 있는 악곡이기 때문이다. 



가객과 율객들이 주로 사용하던 말과 이름들

가객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매우 중요시했다. 가곡의 거장 하규일(河圭一) 선생은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의 촉탁(囑託)으로 근무하면서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 학생들에게 풍류 성악인 가곡을 지도했다. 당시 학생들에게 자신의 가곡 학습 과정을 이야기하며 “성악에서는 흔히 일청이조(一淸二調)라는 말을 쓰는데 아무리 들어봐도 너는 청(淸)이 좋지 않으니 일찌감치 포기하라”고 과거 숙부에게서 들었던 말을 전했다고 한다. 이는 가곡에 있어 ‘일청이조’, 즉 타고난 성대가 가곡의 가락보다 중요하다는 말이다. 
하규일에게서 가곡을 학습한 김천흥(金千興)은 이왕직아악부에서 근무하던 가운데 조선정악전습소(朝鮮正樂傳習所)에 들르곤 했는데, 그곳에서 당시 서울 장안의 유명한 풍류객들이 모여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이들 중에 김상순(金相淳)이나 민완식(閔完植) 선생이 양금(洋琴) 조율을 하시던 모습을 기억하며 선생님들이 양금의 음정이 맞지 않아 불안한 소리를 내면 “소리가 아롱거린다” 고 했다고 한다. 양금이 모두 48개의 철사줄로 돼 있으며, 각 4줄씩 같은 음정으로 조율해야 하고, 온도에 민감했기에 조율이 틀어진 양금 소리를 “아롱거린다”라고 표현한 것이다. 
율객들은 자신들이 연주하는 악기들을 매우 소중히 관리했다. 그들이 다루는 악기의 각 부분에도 이름을 붙여 부르곤 했다. 악기의 부분 명칭은 조선 전기에 집대성된 악서인 『악학궤범(樂學軌範)』에도 소상히 기록돼 있는데, 풍류가 전국에서 연주되니만큼 지역성을 갖춘 다른 이름들도 나오기 마련이었다. 
풍류의 대표적 기악이 줄풍류이니만큼 거문고가 풍류를 이끄는 중요한 악기인데, 가야금에까지 거문고의 부분 명칭을 대입해 사용하기도 했다. 이리(裡里-현재의 익산) 율객인 강낙승(姜洛昇)은 가야금의 복판을 천판(天板), 등판을 지판(地板), 용두는 머리라고 했으며, 안족은 괘, 학슬은 부줄이라 불렀다. 그리고 좌단(座團)은 “머리 싼다”라고 했다. 가야금을 거문고에 빗대었으니 가야금의 대단한 변신이 아닐까 싶다. 


- 글. 이진원.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