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소식

월간문화재

[2019.08] 조선 궁중음식의 결정적 순간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07-31 조회수 : 2573
하단 내용 참조 해당 이미지 1번

 

조선의 궁중음식은 지금 새로운 한류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 하지만 한희순 상궁과 황혜성 교수가 없었다면, 무너진 왕조처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뻔했다. 궁중 요리 비법을 후대에 전수해 야 한다는 그들의 절박한 사명감이 ‘조선 궁중의 맛’을 옹골차게 지켜올 수 있었던 것. 그 대를 잇고 있는 정길자 조선왕조궁중음 식 3대 기능보유자는 선생이 살린 전통을 계승하면서 그 속에 현 대적 감각을 버무려 조선 궁중음식의 진화를 이끌어 가고 있다.


 
조선의 궁중음식, 국가무형문화재로 다시 태어나다
 
1926년 조선의 마지막 왕인 순종이 승하하자 순종효황후 윤씨는 창덕궁에서 낙선재로 거처를 옮긴다. 이때 윤씨를 모시기 위해 다섯 명의 상궁이 따랐다. 사라진 왕조의 마지막 황태자비와 다 섯 명의 상궁. 어쩌면 조선의 궁중음식은 그들과 함께 역사 속으 로 사라지는 게 정해진 운명이었을 것이다.

음식은 사라지는 것이 숙명이다. 따라서 실체가 계승되지 않는 유일한 문화재다. 후대는 기록과 도구를 통해 추측하고 재현할 따름이다. 만들어 본 사람에 의한 전승이나 먹어 본 사람의 증언 이 없는 한 언제나 상상력이라는 미궁 속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 순종효황후 윤씨와 다섯 명의 상궁, 누군가 그들을 발견하지 않 았더라면 500년 동안 조선왕조가 구축해 온 궁중음식은 영원히 미궁 속에 남았을지도 모른다.

일본 교토여자대학을 졸업하고 숙명여대 가정과 교수로 부임한 황혜성 선생은 학생들에게 한국음식을 가르쳐야 하는 처지가 됐 다. 식민지 조국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교육받은 선생은 막막했 다. 수소문 끝에 낙선재를 찾았다. 그곳에서 황혜성 선생은 평생 의 스승이자 어머니와도 같은 한희순 상궁을 만났다. 미궁 속으 로 사라질 뻔한 조선의 궁중음식이 기사회생하는 만남이었다.

30년 동안 한희순 상궁에게 궁중음식을 배운 황혜성 선생은 1971 년 한희순 상궁이 국가무형문화재 제38호 조선왕조궁중음식 1대 기능보유자로 지정되도록 한다. ‘음식이 어떻게 문화재가 될 수 있느냐’는 편견 속에서 이뤄낸 소중한 성과였다. ‘조선의 마지막 주방 상궁’으로서 소임을 다한 한희순 상궁이 돌아가시고 황혜성 선생이 2대 기능보유자로 지정됐다.


조선 궁중음식의 결정적 순간 해당 아래 참조 해당 번호 2-3
한국의집 조리 실장으로 한식 위상 높여
 

“너, 혹시 한복려 아니? 내 딸이야.”

1967년 한양대학교 가정학과 1기로 지원한 정길자 원장을 면접 에서 처음 만난 황혜성 교수의 일성이었다. 수도여고를 졸업한 정길자 원장은 황혜성 선생의 맏딸인 한복려 원장과 동기였다. 이렇게 시작돼 50여년 이어진 세 여인의 인연은 조선의 궁중음 식이 현대의 삶 속에 뿌리내리는 계기가 된다.

대학을 졸업한 정길자 원장은 1971년 5월 개원한 궁중음식연구원 의 초대 조교가 된다. 지금도 그녀는 이를 자기 인생에서 가장 자 랑스러운 경력으로 여긴다.

1981년 한국의집이 개관하면서 입사해 이후 조리실장으로 근무 하게 된다. 1986년 아시안게임에 이어 1988년 서울올림픽까지 건 국 이래 최대의 국제행사가 연거푸 열리던 시절이었다. 4년 만에 조리실장으로 승급해 재직하는 5년 동안 여러 차례 국내외 귀빈 만찬을 성공적으로 진행하며 한식의 위상을 높였다. 당시 학사이 면서 한국의집 최초의 여성 조리실장이었던 정길자 원장은 한식 메뉴와 코스 개발에 힘쓰고, 장류·김치류·육포·병과·두부 등을 직접 만들면서 음식의 질을 높여 나갔다.

1981년 한국의집이 개관하면서 입사해 이후 조리실장으로 근무 하게 된다. 1986년 아시안게임에 이어 1988년 서울올림픽까지 건 국 이래 최대의 국제행사가 연거푸 열리던 시절이었다. 4년 만에 조리실장으로 승급해 재직하는 5년 동안 여러 차례 국내외 귀빈 만찬을 성공적으로 진행하며 한식의 위상을 높였다. 당시 학사이 면서 한국의집 최초의 여성 조리실장이었던 정길자 원장은 한식 메뉴와 코스 개발에 힘쓰고, 장류·김치류·육포·병과·두부 등을 직접 만들면서 음식의 질을 높여 나갔다.

조선왕조 궁중음식 2대 기능보유자가 된 황혜성 선생은 맏딸인 한복려 원장과 애제자인 정길자 원장 두 사람을 전수교육조교로 길러낸다. 이때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은 당연히 한복려 원장 이 보유자로 지정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2006년 황혜성 선생 이 돌아가시자 정부는 궁중음식의 방대함을 고려해 한복려 원장 과 정길자 원장 두 사람을 나란히 국가무형문화재 제38호 조선왕 조궁중음식 3대 기능보유자로 지정한다. 이후 궁중병과연구원의 초대 원장으로 부임한 정길자 원장은 지금까지 2,000명에 가까 운 수강생을 배출하고 있다. 한희순-황혜성-정길자·한복려로 이 어지는 3대에 걸친 스승과 제자의 연은 그래서 우리 한식 분야에 더없이 감사한 인연이다.


하단 내용 참조 해당 번호 4,5번
전통 병과의 새로운 해석
 
조선은 기록의 나라다. 왕의 일상 업무는 실록을 통해 낱낱이 기록 했고, 왕실과 국가의 큰 행사는 별도의 관청을 두어 의궤로 정리했 다. 특히 『진연의궤』는 국가에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때 베푼 연회 의 전말을 문자와 그림으로 상세히 기록한 책이다. 『진연의궤』 덕분에 조선의 궁중병과는 오늘까지 면면히 전해오고 있다.

정길자 원장은 기록을 재현해 생명을 불어넣는 이다. 사라지는 숙명을 가진 음식은 후대가 개입할 여지가 많은 대신 그만큼 왜 곡될 위험도 동시에 안고 있다. 그래서 ‘조선의 마지막 주방 상궁’ 한희순으로 시작해 정길자로 이어진 조선 병과의 전통은 그 존재 자체로 축복이다.

250여 종에 이르는 궁중병과 가운데 정길자 원장이 가장 애착 을 갖는 떡은 두텁떡이다. 두텁떡은 거피팥을 쪄서 계피·간장· 꿀을 넣고 볶아 만든 거피팥고물을 시루에 뿌린 다음 찹쌀가루 를 한 수저씩 놓는다. 그리고 유자·밤·대추·잣·호두 등 견과류 로 만든 소를 올리고, 여기에 다시 찹쌀가루·거피팥고물·소를 올리는 작업을 반복한 다음 찌는 떡이다. 차례차례 쌓아 올린 모양이 봉긋한 봉우리를 닮았다 하여 ‘봉우리떡’이라고 하고, 도도록하게 하나씩 떠서 먹기에 두터울 후(厚)자를 써서 ‘후병(厚餠)’이라고도 한다.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에 등장한 이후로 1902년까지 궁중의 모든 연회 맨 앞줄을 장 식했던 떡이 바로 이것이다.

“손이 많이 가지만 남녀노소 누가 먹어도 정말 맛있는 떡”이라는 정길자 원장의 말대로 두텁떡은 각각의 재료가 가진 섬세한 향이 어우러지는, 수수한 듯하면서도 품격 넘치는 떡이다. 우리 땅 곳 곳에서 거둔 귀한 재료에 장인의 솜씨가 곁들여져 빚어 낸 조선 의 미식 수준을 가늠하기에 충분한 떡이다.

긴 세월을 놓고 보면 전통은 반복된다. 명맥이 끊어질 듯하다가 이어지고, 답습 속에서 혁신을 거듭한다. 이 과정을 통해 전통은 시대와 함께 새롭게 해석되고 발전한다. 그 고비마다에는 사람 이 있다. 원형을 재현하고 전수해 주는 이가 있기에 해석도 가능 하다. 오늘날 우리의 떡은 더러는 간편한 대용식으로, 때로는 귀 한 분께 드리는 선물로 새롭게 해석되고 있다. 정길자 원장과 그 녀에게서 배운 수천 명의 제자가 일궈낸 성과다.

조선의 떡과 과자가 단지 전통에만 머물지 않고 현대적 감각으로 새롭게 변모하는 것은, 온고(溫故)와 지신(知新) 사이에 정길자 원장이라는 훌륭한 스승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 글. 박상현. 맛칼럼니스트 사진. 김희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