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소식

월간문화재

[2019.10] ‘조용한’ 동네, 경복궁 서편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10-02 조회수 : 2642
하단 내용 참조

경복궁 서편, 이곳의 이름은?
서촌은 서소문 내외를 가리킨다는 점에서, 세종마을은 인위적으 로 만든 명칭이라는 점에서 이 지역 이름으로는 적절치 않은 것 같 다. 우대는 그 범위가 “광통교 이상(위쪽)”이고 “육조(六曹) 이하의 각사(各司)에 속한 이배(吏輩 : 경아전)·고직(庫直 : 창고지기) 족속 들이 살았다”는 기록을 고려하면 우리가 다룰 지역의 남쪽에 해당 하는 듯하다. 그리고 조선 후기 문집을 보면 이 지역의 경화사족(京 華士族) 거주지를 ‘북리(北里)’라 칭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보면 북리는 이 지역의 북쪽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이 지역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적절한 것이 현재로서는 보이지 않는다. 이 글 에서는 임시로 경복궁 서쪽에 있는 지역이란 의미에서 ‘경복궁 서 편’으로 칭하겠다.
조선시대 이 지역에는 경아전(서리), 경화사족, 왕실 인물들이 주로 거주했다. 경아전은 양반 관원을 보필하며 행정 실무를 담당해야 했기 때문에 말투가 공손했다. 이러한 공손한 말투는 조선시대에 우대 사람들의 특징으로 언급되기도 했다. 경화사족과 왕실 인물들 은 권력이 막강했기 때문에 목소리를 높일 필요가 없었다. 산 깊고 물 좋은 명승지는 상춘객과 피서객이 몰리는 봄·여름을 제외하면 고요한 곳이었다. 근대 이후에는 조선총독부와 청와대 등 최고 권 력기관이 동쪽에 자리하여 이의 경비를 위해 이 지역은 조용해야 만 했다. 이처럼 이 지역은 과거부터 최근까지 ‘조용한’ 동네였다.

하단 내용 참조
경복궁 서편의 남쪽(우대), 경아전 주거지
경복궁 서쪽에 자리한 조선시대 관청으로는 사재감과 내시부가 있 었다. 그리고 현 정부서울청사 뒤편에 내자시·장흥고·사온서·내섬 시·의영고 등 궁궐 생활을 지원하는 관청이 다수 위치했고, 광화문 앞쪽으로는 의정부와 육조를 비롯한 정부의 주요 관청이 자리 잡 고 있었다. 경복궁 안에도 상의원·사도시·사옹원·상서원·관상감· 승정원·홍문관·승문원 등의 궐내각사(闕內各司)가 있었다. 이들 관청에서도 경아전들이 다수 근무했는데, 이들이 출퇴근 때 통과하 는 문이 바로 경복궁의 서문 영추문이었다. 그러므로 출퇴근 편의 를 위해서도 경아전들은 경복궁 서편에 거주하는 것이 유리했다. 16세기 이후 경아전을 포함하는 중인이 하나의 신분으로 자리 잡 고, 조선 후기에 중인 가문이 그 업(業)을 세전(世傳)하는 경향이 나 타나면서 경아전이 이 지역에 집중 거주하는 모습은 더욱 강화됐 을 것이다. 중인들은 18세기가 되면 양반 못지않은 한문학 소양을 바탕으로 시단(詩壇)을 결성해 위항문학(委巷文學)을 전개함으로 써 서울 문화계를 풍성하게 하는 데 기여했다. 이 지역에 거주하던 천수경을 중심으로 한 송석원시사(옥계시사)가 대표적 사례다.
하단 내용 참조

경복궁 서편의 북쪽(북리), 조선 후기 최고의 세도가문 장동 김문의 세거지
성현은 그의 『용재총화』에서 한양의 경치 좋고 노닐 만한 곳으로 삼청동을 첫째로 꼽고, 인왕동이 그다음이며, 쌍계동·백운동·청학 동이 또 그다음이라고 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한양의 5대 명승 지 가운데 두 곳이 인왕산 동쪽 자락에 있는 셈이다. 이 지역에는 인왕동·백운동 외에 청풍계·수성동·필운대 등도 있어 조선시대 내내 시인·묵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이처럼 경치 좋고 궁궐도 가 까운 만큼 이 지역은 주거지로도 선호됐을 것이다.
장동 김문들이 이곳에 세거하게 된 것은 김상용·김상헌 형제가 여기 에 정착하면서부터였다. 이들 조부 때에도 이곳에 머문 적이 있지만 병자호란 때 김상용이 강화도에서 순절하고 김상헌이 주전파의 중 심인물로 부각되면서 이들 형제의 실천은 조선 사대부들의 모범이 됐다. 김상헌의 손자인 김수흥·김수항 형제가 번갈아 영의정을 지 내고, 김수항의 창(昌) 자 돌림의 여섯 아들이 ‘육창(六昌)’으로 불리 며 정계(김창집), 사상계(김창협), 예술계(김창흡)를 주도하면서 안 동 김씨였던 이들은 그들의 세거지 지명인 장동(壯洞)을 따서 ‘장동 김문(金門)’이라 불리며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세도가문으로 성장해 나갔다. 특히 김창흡은 그의 제자이자 같은 동네에 살던 겸재 정선, 사천 이병연과 더불어 18세기 조선의 문화와 예술계를 선도하면서 진경문화를 창출했다.

왕실 사당의 건립과 국왕의 잦은 행차
왕실과 이 지역의 인연은 세종이 이곳에서 태어난 것에서 알 수 있 듯이 조선 초부터 있어 왔다. 또한 인왕산 치마바위에는 중종의 첫 번째 부인 단경왕후의 애틋한 전설이 깃들어 있고, 승하한 선왕의 후궁들이 머물던 자수궁도 이곳에 있었다.
그런데 이 지역이 왕실과 깊은 관계를 맺게 된 것은 통의동 창의궁 에 살던 영조가 왕위에 오른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영조는 즉위 후 창의궁에 자신의 호적과 어진, 어필 등을 보관케 하는 한편 생모 숙빈 최씨의 사당인 육상궁을 현 칠궁 자리에 조성하고 꾸준히 찾 았다. 사도세자를 낳은 영빈 이씨의 사당 선희궁도 현 서울농학교 자리에 마련했다. 고종 때에는 순조를 낳은 수빈 박씨의 사당으로 계동에 있던 경우궁이 이곳으로 옮겨 왔다가 1908년 현 칠궁 영역 으로 이전된 후 그 자리에 전염병 환자 격리병원인 순화원이 들어 서기도 했다.
한편 1908년 도성 안에 흩어져 있던, 왕을 낳은 후궁들의 사당 다 섯 곳을 육상궁 경내로 이건하면서 육궁(六宮)이 됐고, 1929년 영 친왕의 생모 순헌황귀비 엄씨의 사당 덕안궁까지 이곳으로 옮기 면서 칠궁이 돼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처럼 이 지역은 조선 초부터 왕실과 인연이 깊은 곳이었으며, 조선 후기에는 여러 왕실 사당이 위치해 국왕이 자주 행차한 곳이기도 했다.

식민지 시기 - 식민 지배시설의 구축과 각종 학교 건립
20세기 들어와 일제가 조선의 주권을 위협하면서 이 지역에도 변 화가 시작됐다. 먼저 1910년 동양척식주식회사(동척) 사택이 창의 궁 터에 들어섰고, 체신관리양성소가 현 정부서울청사 창성동 별 관 자리에 세워졌다. 1920년대에는 효자동을 종점으로 하는 전차 노선이 생겼으며, 경복궁 전면에 조선총독부 청사가 건립되면서 통의동과 적선동 일대에 총독부 관사촌도 형성됐다. 누상동 일대 도 일본인 거주지로 개발됐다. 이런 과정을 거쳐 이 지역에 광복 후 ‘적산가옥’이라 불리던 일본식 가옥이 대거 들어섰다.
옥인동에는 일제 침략의 앞잡이 노릇을 했던 친일파 윤덕영과 이 완용 저택이 세워졌다. ‘조선의 아방궁’이라 불릴 정도로 대규모였 던 프랑스풍의 윤덕영 별장(벽수산장)은 1916년 완공됐다. 1954년 부터 국제연합 한국통일부흥위원회(UNCURK, 언커크) 청사로 사 용되다가 1966년 대형 화재로 2·3층이 소실됐고, 1973년 도로정비 사업으로 완전히 철거됐다. 벽수산장 오른쪽에 자리한 이완용 집 도 대규모 저택이었다. 이완용은 1913년 완공된 이 집에서 1926년 사망할 때까지 거주했다. 1950년 간첩죄로 처형된 김수임이 고위 급 미군 장교와 동거했던 집이기도 하다.
각종 학교들도 세워졌다. 1895년 설립된 장동소학교(매동초)를 시 작으로 1898년 선교사 캠벨이 세운 캐롤라이나학당(배화학당·배 화여중고)과 1906년 순헌황귀비 엄씨가 후원한 진명여학교(진명 여중고)도 들어섰다. 1913년에는 현 서울맹학교와 서울농학교의 전신인 제생원 맹아부(盲啞部)가 선희궁 터에 자리 잡았다. 1920년 대에는 경성제2고등보통학교(1921년, 경복고)와 청운공립보통학 교(1923년, 청운초)가 개교했고, 1926년에는 경기공립갑종고등학 교(경기상고·청운중)가 동숭동에서 현 위치로 이전해 왔다. 광복 이후에도 1948년 창성동에 국민대가 자리했다가 1971년 정릉동으 로 옮겨갔고, 1964년 개교한 경복초는 1978년 능동으로 이전했으 며, 진명여중고는 1989년 목동으로 학교를 옮겼다.
이 지역은 화가와 문인들이 많이 거주한 곳이기도 했다. 동양화가 청전 이상범을 비롯해 시인 이상과 그의 친구 화가 구본웅이 이곳 에 거주했고, 문인 이광수와 노천명 집도 이곳에 있었으며, 시인 윤동주가 연희전문 다닐 때 이곳 누상동에서 하숙하기도 했다. 이런 전통은 광복 후에도 이어져 화가 이중섭이 누상동 작업실에서 그림 그리기에 몰두했으며, ‘꽃과 여인의 화가’라 불린 천경자 집 도 이곳에 있었다. 1973년부터 40년간 화가 박노수가 머물던 집은 2013년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으로 재탄생했다.

광복 이후 - 부자·서민 주거지의 공존
6·25전쟁 후 피란민·이주민·철거민 등이 이곳으로 몰려들면서 인왕산 자락은 판잣집·달동네가 됐다. 이 지역의 한옥 대부분은 1960년대 건립된 것으로 북촌 한옥에 비해 규모가 작은 편이다. 무 주택 서민용으로 청운시민아파트(11동)와 옥인시민아파트(9동)도 각각 1969년과 1971년에 들어섰다.
한편 1980년대 청운동 일대에 고급빌라와 단독주택들이 입지하면 서 청운동은 ‘부자동네’ ‘유명인이 사는 곳’이라는 이미지가 형성 됐다. 1995년 고도제한이 10m에서 20m로 완화되자 한옥을 허물 고 다세대주택(빌라)이 들어섰다. 이에 서울시는 한옥과 경관 보호 를 위해 2010년 이 지역을 한옥보존지구로 지정했다.
시민아파트를 철거한 자리에 2007년 청운공원을 조성하고 2010 년 수성동계곡을 복원하면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경복궁 서편은 2010년대 들어와 골목의 재발견 및 복고 열풍과 맞물리면 서 핫 플레이스로 떠올랐다. 자하문로 좌우에 다양한 화랑이 들어 서고 있고, 이 지역 곳곳에 한옥을 개량한 카페·갤러리·음식점 등 이 많은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조용한’ 동네가 ‘시끄러운’ 동네 가 된 것이다. 

- 글. 사진.김웅호. 서울역사편찬원 전임연구원.문학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