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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 돈황, 실크로드 문화유산 기행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10-02 조회수 : 3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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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바람은 서역으로 향하고
경주 왕릉을 방문할 때마다 ‘왜 서역인상(사진 2)은 38대 원성왕릉 과 42대 흥덕왕릉에 갑자기 조각물로 등장했을까?’라거나 ‘용강동 출토 호인형 토용(사진 2), 계림로 출토 보검(사진 3)을 비롯해 4~6 세기 금관(사진 3) 등 황금유물과 유리구슬 그리고 헌강왕대 처용 설화는 문화사에 어떤 의미인가?’라는 의문이 들곤 했다.

조형 예술을 공부하면서 자료와 유물을 대할 때마다 늘 명쾌하지 않은 부분이다. 삼국사기와 유사의 이방인 기록은 물론 페르시아 서사시 『쿠쉬나메』와 이란 아바스왕조 이븐 쿠르다지바의 『제도 로 및 제왕국지』의 신라 기록을 간과하더라도 이들 유물에 대한 의 문은 여전하다. 해답을 찾기 위해 한반도를 넘어 실크로드, 중앙아 시아로 눈을 돌려 본다.

실크로드는 인류 문명교류의 상징이며, 답사여행을 즐기는 한국인 들의 로망이기도 하다. 돈황은 서울에서 비행기로 세 시간을 날아 서안을 경유해 국내선 비행기로 두 시간을 더 가는 먼 거리다. 기차 로는 서안에서 꼬박 하루를 가야 한다. 바닷길이 여의치 않던 시절, 한무제는 흉노로부터 무역로 보호와 지역 안정을 위해 하서사군인 무위(武威) 장액(張掖) 주천(酒泉) 돈황(敦煌)을 두었다. 한나라 장 건의 서역 개척부터, 신라 승 혜초와 당 현장법사 등 인도를 방문한 구법승들, 후일 비단장수 왕서방도 귀환을 위해 피할 수 없는 길이 었다.

돈황에서 서역으로의 관문인 양관(陽關)과 옥문관(玉門關, 사진 4) 은 현재 훼손돼 모래사막과 황량한 들판뿐이다. 양관의 봉화대에 올라 바라보는, 황량한 사막에 끝없이 펼쳐진 길이 주는 막막함과 비장함은 화려하고 진귀한 보물보다 감동적이다. 당나라 시인 왕 유(王維)의 “그대에게 다시 한번 술을 권하니 서쪽 양관으로 가면 아는 이 없을 테니…”라는 시구(詩句)처럼 기약 없이 까마득한 누 란(樓蘭) 왕국의 전설 속으로 빠져든다.

실크로드는 1877년 독일의 지리학자인 폰 리히트호펜(1833~ 1905)에 의해 처음으로 이름 지어진 이후 세계적 문명교류의 대명 사가 됐다. 넓은 의미로는 서기전 7,000~4,000년, 짧게는 서기 8 ~7세기 스키타이의 초원로 개척 시기다. 돈황 중심으로 보면 서기 전 2세기 장건의 서역로 개척부터 당·송의 번영기를 지나 18세기 이후까지다.

흔히 실크로드 하면 돈황·투르판 등의 지역을 생각하는데 실제로 는 세 갈래다. 북위 50~40도 지대의 초원로, 북위 40도 지대의 오 아시스, 사막로와 해양실크로드인 바닷길이다.
초원로는 서기전 8세기부터 스키타이인에 의해 개척된 흑해↔우 랄산맥↔알타이를 관통하는 지역이다. 적석목관분, 말, 유목국가, 황금 동물의장, 철 단검, 마구 등 고대 신라 유물과도 궤를 같이해 궁금증 일부를 풀 수 있다.
오아시스로는 중국 장안에서 로마까지 1만 2,000㎞에 달하는 지역 으로, 개념을 확장하면 한반도 남단까지 1만 4,700㎞의 대장정이 다. 고비사막·타클라마칸사막·이란·시리아·인도 등지와 비단, 종 이, 도자기, 불교문화와 석굴사원, 조로아스트교 등이 오간 좁은 의 미의 실크로드다.

바닷길은 로마와 중국 간 1만 5,000㎞에 달하는 ‘도자기와 향로의 길’이다. 당대에는 로마와 페르시아 사절단이 직접 중국을 왕래했 다. 신라 승 혜초를 비롯해 인도로 간 구법승 56명 중 34명도 중국 남부 바닷길을 이용했다. 명대 정화(鄭和, 1371~1435?)의 7차례 대 원정은 해양 실크로드의 절정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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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황 막고굴, 명사산 월아천
전돈황은 연간 강수량 40㎜에 불과한 덥고 건조한 땅이다. 가을 답 사 시 당도 높은 건포도는 여행의 피로를 풀어주는 청량제이다. 또 명사산(사진 1)의 아침 해맞이와 낙타에 올라 도교적 풍광의 명불허전(名不虛傳) 누각, 월아천(月牙泉)을 향하는 풍경은 힐링 답사의 정점이다. 돈황은 키질 석굴을 비롯해 투루판의 바이쯔커 리커(柏孜克里克) 천불동, 난주 병령사석굴(炳靈寺石窟), 천수 맥 적산석굴(麥積山石窟) 등 장안으로 가는 경로상의 유적이다. 다 만 운강이나 용문굴과 달리 돈황석굴 석질은 왕모래가 섞인 역암 (礫巖)으로 벽면에 흙을 발라 벽화를 그렸고, 흙·잡초·점토 등을 조합해 소상(塑像)을 만들었다.

막고굴 개착 연대는 698년의 중수막고굴불감비(重修莫高窟佛龕 碑) 등의 기록을 감안할 때 303~366년 사이로 추정된다. 이후 명· 청대까지 개착이 되었으니 인류문화사의 유래 없는 대역사이다. 현존 가장 이른 시기 작품 중 하나는 북량(北涼, 397~439)의 268 호 굴이다. 막고굴 전체 규모는 492개의 굴에 벽화 4,500㎡(길이 약 1,600m), 조각 2,300기 등이다. 1987년 작품의 예술적·문명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198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이 엄청난 유산은 우습게도, 1900년 6월 2일 왕원록(王圓籙, 1850~1931)이 17굴에서 많은 고문서와 불화 등을 발견해 헐값에 서구 열강에 팔아넘기며 세상의 빛을 보았다. 먼저 러시아의 오브 루체프가 도착해 일부 유물을 반출했다. 본격 반출은 영국의 오렐 스타인(1862~1943)을 시작으로 프랑스의 폴 펠리오(1878~1945)가 왕오천축국전 등 연대가 확인되는 이 굴의 유물 대부분을 가져간 것이다. 이를 계기로 중국 정부가 막고굴의 나머지 중요 문서를 북 경으로 이관했다. 이후에도 일본의 오타니 등의 유물 반출은 계속 됐다. 20세기 초 서구 열강의 중앙아시아 탐험은 지도 제작, 조약 체결, 교역권 확보 등 정치·경제적 의미도 있었다. 하지만 문화재 를 원래의 자리에서 반출하고 훼손했으므로 문화유산 보호·관리 의 기본 원칙을 위배했다는 비판이 쏟아지는 대목이다. 현재 막고 굴 앞 왕도사탑 안내문에는 그를 ‘만고의 역적’으로 표현해 문화유 산의 애잔한 과거사를 읽을 수 있다.

돈황석굴은 예배굴과 복합굴로 구분된다. 예배굴은 인도 아잔타석 굴처럼 탑과 불상을 봉안한 곳으로 예배나 의식장소로 사용됐다. 한국의 군위 삼존불, 경주 석굴암도 이 형식이다. 복합굴은 인도의 비하라식 석굴처럼 석굴 내에 예배당·강당·승방이 배치된 형식으 로 돈황 막고굴 내에도 다수 확인되고 있다.

막고굴 불상을 시기별로 보면 먼저 북조시대인 북량부터 북위, 서 위, 북주까지의 시기다. 이 시기 작품은 서역풍의 교각미륵상(交脚 彌勒像)을 비롯해 네모진 얼굴에 당당한 어깨, 272굴 본존(사진 5)처럼 인도식 옷 착용인 우견편단(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옷 착용), 물에 젖은 옷 주름 양식 등 인도와 서구적 요소들이 강하다. 특히 258굴의 경우 미륵반가상이 등장해 우리나라 국보 78·83호 등 금 동반가상의 원류를 확인할 수 있다.

수나라와 당나라 때 작품은 서역 요소가 점차 줄어들어 옷 주름 양 식이 패턴화하고 얼굴 모습과 체구 등이 중국적 모습으로 변화된 다. 특히 45굴 보살상(사진 6)의 경우처럼 당대 특징인 S자형(三窟) 조각기술, 운동감 있는 표현 등 절정기를 보여준다. 130굴의 미륵 불의좌상(彌勒佛倚坐像)은 26m의 대불로 측천무후를 표현한 중 흥기의 대표 작품이다.

돈황 막고굴 내 한국 인물상
돈황연구원 이신 선생의 조사에 의하면 현 막고굴에는 고대 한국 인물상 벽화(사진 7)가 최대 40여 건이나 된다. 인물상은 『열반경 변도(涅槃經變圖)』, 『유마힐경변도(維摩詰經變圖)』, 61굴 『오대산 도(五臺山圖)』 등에서 확인된다. 이 중 유마힐경변도상의 각국왕 신청법도(各國王臣廳法圖) 속에 가장 많은 24폭이 전하고 있다. 한 국 인물상이 출현하는 대표적 굴은 332굴, 148굴, 335굴 등이다. 고구려·백제·신라인들은 관모에 새 깃털(鳥羽冠)이나 새 꼬리 털(鳥 尾冠)을 착용하고 있다. 이런 모습은 우즈베키스탄의 아프라시압 궁전벽화나 당 장회태자묘에 출현하는 형식과도 유사하다.

이들 고대 한국 인물상의 출현 배경에는 여러 설이 있다. 불교 전파 의 필요성에서 벽화 제작 시 한국 인물상이 포함됐을 수 있다는 것 이다. 다른 하나는 돈황 지역에 전하는 당·송시대 사료에 나타난 고대 한국인들의 돈황 거주 사실 등을 근거로, 고대 한반도에서 이 주해 온 후예들일 수 있다고 보는 관점이다. 마지막으로 혜초나 원 측(서안 흥교사 전탑에 모셔진 신라 승) 등 많은 승려·학자들이 장 안과 돈황을 방문한 기록으로 보아 막고굴 개착 시 한국 인물상이 자연스럽게 묘사됐을 것으로 추측한다.
경주 출토 유물들에 대한 궁금증을 완전히 해소하기에는 더 많은 시간과 자료조사가 필요하다. 한반도 전래 문명이 직접교류든 중 간 매개자를 통했든 이들 독특한 유물들 중 황금·유리·적석목곽분 등은 스텝루트와, 서역인상·보검·석굴사원 등은 오아시스루트와 의 교류 결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돈황 막고굴 내 한국 인물상에 대해서는 중국 측의 협조 속에 조사를 더해야 보다 종합 적이고 구체적인 교류 관계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 글. 안태욱. 한국문화재재단 미래전략기획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