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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2.] 기획특집 3. 연등회의 축제적 의미와 지속가능성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1-03-15 조회수 : 1457

기획특집 3. 연등회의 축제적 의미와 지속가능성_자세한 내용 하단참조

기획특집 3. 연등회의 축제적 의미와 지속가능성_자세한 내용 하단참조



연등회는 역사적으로 동시대의 사정에 따라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화해 왔다. 상류층에서는 왕권을 신성화하는 수단으로 이용했고, 민간 층에서는 풍농과 풍어를 기원하는 축제 의례로 승화했다. 일제 강점기 때는 민족적 단합과 저항운동으로 기여했다. 연등회를 불교축제로만 인식하는 것은 맞지 않고, 올바른 문화해석이라 할 수도 없다. 연등회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아시아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불교축제이자 민족축제로 자리를 잡은 지 오래다. 역사적·지역적 특수성과 보편성을 동시에 지닌 거대한 행사이자 영원한 정신인 셈이다. 그렇다면 연등이야말로 인류 평화와 지혜의 길을 밝히는 실천이 아닐까.


인류 평화와 지혜의 길 

밝히는 ‘연등’


‘빛과 어두움의 상대성’을 상징하다


2001년 5월 종묘제례악이 등재된 이후 2018년 11월에 남북한 공동으로 씨름이 등재됐고, 2021년 21번째로 연등회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연등은 말 그대로 등불을 켜서 사방을 밝히는 행위인데, 빛을 통해 어두움을 물리치는 상대성에 큰 의의가 있다. 불교만이 아니라 세계 모든 종교에서 ‘빛과 어두움의 상대성’을 대표적인 상징성으로 삼고 있다. 다만 그 상대성과 상징성이 종교의례나 종교건축, 축제, 생활관습에 따라 차이가 날 뿐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아득한 원시시대 사람들에게 빛을 내는 불은 생명을 지키는 절대적인 요건이었기에 신앙의 대상이 되고, 점차 빛은 문명과 문화 발전의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원동력으로서 종교와 동반 관계를 갖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석가모니는 자신을 수행자라 했다. 그는 수행과정에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깨달은 숱한 체험을 불(火), 불빛(光), 햇빛, 등불(연등) 같은 데 비유해 자주 표현했다. 사람은 끊임없는 욕망과 분노, 번뇌와 집착, 폭력과 독선 등으로 불타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불타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정화할 수 있는 것도 역시 불이라고 석가모니는 설파했다. 그것은 ‘지혜의 불’이다. 석가모니의 육성을 운문시 형식으로 엮어 놓은 『숫타니파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나는 지혜를 얻었다. 다시는 누구에게도 끌려다니지 않을 것이다. 수행자는 이렇게 그 자신을 다지면서, 저 광야를 가고 있는 코뿔소의 외뿔처럼 혼자 가라.” “진리에 대한 통찰과 명상을 통해서 침착한 마음 자세와 생각을 순수하게 갖는 것, 이것이 무지를 부수는 길이요, 영혼의 자유를 얻는 길이다.”

국내 자료에서 연등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유사』의 ‘감통’ 신라 승려 선율의 설화에 등장한다. 


“그는 신문왕 5년(685)에 건립된 망덕사의 승려였다. 그는 6백 반 야경을 펴내려다 일을 마치지 못하고 죽어 지옥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만난 한 여자는 환생하게 될 그에게, 경전 제작비용을 마련할 방도와 함께 그녀를 위해 불등(佛燈)을 켜 달라고 부탁한다.” 이 대화를 통해 신라의 연등 풍속이 이미 성립된 사실을 알 수 있다. 경문왕 6년(866)에 “왕은 황룡사에 행차하여 연등을 관람하고 백관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다”고 했고 진성왕 4년(890)에 “왕은 황룡사에 행차하여 연등을 관람했다”고 전해진다.


연등회, 불교문화의 꽃을 피우다


연등회는 인도의 행도(行道)와 행상(行像)에서 성립되어 전파됐다. 행도는 부처님을 모신 법당이나 당탑의 주위를 수행자들이 선회하면서 공경하고 존중하는 뜻을 나타내는 신앙적 의식이다. 행상은 불상을 받들고 아름다운 행렬을 지어 가는 것을 말한다. 행도가 선회운동인 데 비해 행상은 직선운동인 셈이다. 이런 의례에는 음악이나 춤, 거리극 같은 것이 함께 연행됐는데, 이런 예술을 기악(伎樂)이라 했다. 기악은 불교 의례와 함께 전파되어 아시아 예술의 기반이 됐다.


중국 동진의 스님인 법현이 4세기 초에 인도를 방문해 기록한 책이 『불국기』이다. 이 책에는 행상의 모습을 자세히 적어 놓았다. 네 바퀴로 된 큰 수레를 비단으로 된 깃발과 우산을 달아 장식했다. 불상을 그 안에 안치하고 두 보살이 모시게 했다. 이 수레는 성 밖 멀리까지 순행하고 성문으로 들어와 다시 시내를 순행했다. 왕은 손에 꽃과 향을 들고, 양쪽에 시종을 거느리고 맨발로 걸어 나와 맞이했다. 왕비와 시녀들은 여러 가지 꽃을 뿌려댔다. 이렇게 장엄한 행상축제는 모든 곳에서 14일이나 걸렸다. 또한 행상 날에는 밤새도록 연등과 기악으로 공양했다고 했다. 불교가 성립된 지 수백 년이 지난 뒤의 연등회를 말해 주는 자료이다.


불교는 중국에 전파되어 정월 대보름(원소절)과 4월 4일에 연등회를 열었다. 한나라 명제 때(58~75)였다. 여러 사원에 장등을 밝히고 신불에게 제사를 올렸는데, 부처님뿐만 아니라 도교의 신에게도 존경심을 나타내는 의례였다. 

한반도에 불교가 수용된 것은 공식적인 기록(고구려 372년)보다 앞섰다. 357년에 만들어진 ‘고구려 안악 제3호분’에서도 연꽃 문양이 선명히 드러난다. 불교 전래의 한 증거로 보인다. 연등회는 불교 공인 이후부터 시작되었고, 불교의 일본 전파와 더불어 고구려계와 백제계 예술가들의 지도로 점차 예술적인 축제로 발전했다.

연등회와 기악은 인도로부터 각기 중국 북방의 장안, 중국 남방의 남경으로 전파되고, 장안에서 다시 한반도의 낙랑(고구려의 대방), 가야, 일본의 나라로 전파된 루트를 가늠할 수 있다. 또한 백제는 중국 연나라, 고구려의 대방(구레), 중국 남경(오나라)으로부터 전파되어, 일본의 나라로 이어진 가능성을 투시할 수 있다. 신라의 경우는 고구려와 백제, 양측에서 교류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한편, 고구려와 백제의 기악은 중국에 다시 역수출되어 그곳에서 전파된 것으로 드러난다.

 

연등의 지혜로 거듭나는 한국인


오랜 역사의 변화와 변모에도 불구하고, 연등회의 본질은 ‘삶의 지혜를 탐구하는 수행자로서의 진지한 정신과 실천적 태도’로 정의할 수 있다. 석가모니의 선구적인 수행과 진리의 깨달음, 힌두교와 변별된 불교의 성립, 그리고 수행과 불교의 전파과정에서 상징화된 연등 등이 총체적으로 집단적인 연행으로 발전된 것이 연등회다. 따라서 연등회는 불교적인 축제이자 불교정신의 상징적 총화라 할 수 있다.


아울러 이러한 정신과 태도의 필요성은 두말할 필요 없이, 사람이 일상 느끼고 겪는 가난과 차별, 불평등과 부자유, 사회적 부조리와 이념적 독선, 불안과 공포, 병고와 사고, 노쇠와 외로움 등으로부터 빚어진다. 부처님이 설파한 생로병사의 고(苦), 고뇌를 만들어내는 장애물(蘊)과 원인(集)에서 사람은 쉽게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인 까닭이다. 이상적인 삶과 바람직한 사회를 희구하는 ‘인간다운 탐구와 행동’이 승려와 교단을 넘어서 모든 사람의 축제로 결집한 것이다.


연등회의 축제다운 축제를 위해 여러 학자가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한 적이 있었다. 제시에 그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주체적으로 실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연등회를 불교축제로만 인식할 수 없다’고 해서, 불교계와 종단이 수동적인 자세를 유지해 달라는 요구는 아니다. 오히려 연등회의 주체자, 주관자로서 보다 적극적인 선도와 지원과 행동이 아쉬운 현실이다. 석가모니가 수행의 모범을 보여 주었듯이, 교계는 연등회를 적극적으로 견인해 불교의 진리를 많은 사람에게 지혜의 등불로 비춰주어야 할 것이다. 축제가 곧 연등의 상징성과 불교의 도그마를 실현하는 바람직한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글. 서연호(고려대학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