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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유산이야기

두석장 박문열
발행일 : 2021-01-22 조회수 : 6096
두석장 박문열

1950. 10. 3 ~ | 보유자 인정: 2000년 7월 22일

위대한 국가유산
국가유산진흥원의 국가무형유산이야기
두석장 박문열

국가무형유산 두석장
Master Artisan of Brass Ornaments Making Holder

우리들 옛 마음씨가 이러하리라

묵중하고 섬세한 쇳대들처럼

마음먹으면 누구나 열 수 있는 것

그러나 그 안에 든 것들

많은 사람들의 노동과 삶이니

귀중히 아껴쓰라 쇳대로 잠그는 것

우리들 옛 마음씨가 이러하리라

엄정하고 다정한 쇳대들처럼

마음에 따라 차갑고도 따뜻한 것

아무렴 그 안에 든 것들

욕심이라면 차갑지만 나누면 따뜻한 것

소중히 살려쓰라 쇳대로 잠그는 것

잊혀져 가는 우리들 옛 마음씨처럼

도란도란 속삭이는 쇳대들의 이야기

- 박노해 시인 <쇳대들의 이야기>

생활품에 복된 삶의 염원을 장식하는 기물 _ 장석과 두석장

목가구, 목공예품, 생활용품 및 건축물을 제작할 때, 기능을 보강하고 장식적 효과와 실리적 기능을 위해 금속장식을 필요로 하는 부분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문을 열고 닫는 기능, 내용물을 보호하는 잠금장치 기능, 이동을 위한 손잡이 등 여러 가지 역할을 위해 장식이 필요했으며, 이 필요한 부분에 금속제 장식을 사용한다. 이러한 장식을 총칭하여 장석이라고 한다. 또한 이러한 금속장식을 만드는 일이나 그 일에 종사하는 장인을 두석장이라 한다. 사실 장석(裝錫)이라는 용어를 문헌에서 찾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오늘날 두석장인들은 자신들이 만드는 목가구의 금속장식을 장석이라고 말한다.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지만 굳이 장석을 풀이하자면 두석(豆錫)으로 만든 장식 정도로 이해 할 수 있겠다.

조선시대 문헌인 『물명고(物名考)』에는 두석을 황동(黃銅)이라고 하였다. 또한 두석을 두석(斗錫)으로 표기하면서 왜연(倭鉛)을 담금질하지 않은 것으로 두석의 오기인 것 같다고 하였다. 현재도 주석 혹은 두석이라 일컫는 쇠붙이는 그 의미가 매우 모호하며, 두석장이 두석만을 다루는 장인이라고 명확히 이야기하기도 힘들다. 왜냐하면, 민간에서 널리 사용하는 반닫이와 목가구의 금속장식의 상당수는 철을 늘여 만든 철판을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평안도 박천지역 반닫이는 철판에 구멍을 뚤어 문양을 내는 독특한 기법 때문에 ‘숭숭이 반닫이’란 별칭을 갖고 있는데 두석이 아닌 주로 철을 사용하였다. 따라서 두석이 무엇을 지칭하는지 명쾌히 정리되지는 못하나, 황동, 아연, 함석, 놋쇠 등과 혼용되어 쓰이고 있듯이 금속을 가리키는 용어이며, 두석장이란 두석으로 기물을 제작하는 장인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두석장은 엄밀한 의미에서 장식장(裝飾匠)이라 함이 타당하겠으나 현재 사용하는 장식이라는 단어가 광의의 낱말이고 재래 목가구의 금속장식에는 황동 이외에 백동, 철, 은, 오동(烏銅) 등 다양한 재료를 포괄하고 있으므로 근자에는 장식이란 말 대신 흔히 장석(裝錫)이라 표기함으로써 일반적인 장식과 구별해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두석장이 만드는 기물의 영역 또한 목가구의 금속장식을 포함하여 그 범위가 확대가 된다. 이러한 금속장식은 두석장의 솜씨에 따라 전체 물건의 가치와 품격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한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두석장은 공조와 상의원에 각각 4명씩 배속되어 있었다. 공조는 국가의 산림, 하천, 호수 등 각종 토목공사와 수공업에 관한 일을 맡는 관청이고 상의원은 왕실의 복식과 각종 기물을 제작하는 일을 한다. 두석장이 경공장(京工匠으)으로서 공조와 상의원에 배속된 것은 국가적인 행사나 왕실에서 소용되는 기물을 제작하기 위해서였을 것으로 이해된다.

장석의 종류

장석이란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목가구를 비롯하여 목공예품의 생활용품을 제작할 때, 기능의 필요에 의해 그 몸체에 부착하는 금속제 장식을 통틀어 말한다. 장석의 종류로는 부착하는 물건에 따라 농장석, 궤장석, 의걸이장석, 벼락닫이장석, 모반장석, 전통장석 등이 있으며, 문양은 팔봉(八峰), 사모, 아자(亞字), 나비, 박쥐, 붕어, 학 등 다산, 부귀영화, 수복강녕을 상징하는 동식물, 문자, 기하학을 응용하였다. 자물쇠는 귀자(貴字)쇠통, 비각쇠통, 거북장쇠통, 타래쇠통, 네모희자쇠통 등이 있다.

과거 장석은 그 자체가 완전한 하나의 물품이 되지 못하고 한갓 부품에 지나지 않아서 소목장의 주문에 따라 특별 제작되었으나, 현대에 와서는 이러한 전통기법을 활용하여 금속가구를 만들기도 하며 각종 생활가구 등을 만들기도 한다. 전통 목가구의 백골(나무가구 골조)에 백동이나 황동 금속판을 붙여 각게수리, 반닫이 등을 만들며, 이와 더불어 묵호, 금속연적, 필세, 먹상, 필가, 철, 연적 등 금속 생활용품에 넓게 사용되었다.

장석의 문양과 상징

악귀를 쫓고 수복을 염원하는 표상적인 관념을 강하게 지녔던 우리 민족은 일상적으로 사용하던 물건들에 문양을 새겨 넣고 생존과 관련한 주술을 불어 넣었다. 유교의 이념이 지배하였던 조선시대에서도 장식문양들은 유교, 불교, 도교 등의 사상이 골고루 반영되어 풍요롭고 복된 삶을 희구하는 인간의 궁극적 목표를 반영하고 있다. 가구의 장석에서도 자연물의 문양과 문자모양, 기하학적인 문양 등이 표현되어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고 이상적인 세계를 동경하는 현실적 감정을 반영하고 있다.

나비문양 : 사랑과 행복을 상징하고 있다. 주로 안방 가구에 사용되어 문을 여닫을 때마다 춤추는 나비로 비유된다.

박쥐문양 : 다섯 마리 박쥐는 자손의 창성을 비는 상서로운 미물로 취급했다. 일명 편복(? ?)이라고 하며 복(?)자가 복(福)과 동음으로 발음되어 호운을 나타낸다고 하였 다. 박쥐는 밤눈이 밝다고 해서 가구를 지켜주는 수호의 상징으로도 보았다.

물고기문양 : 물고기 문양에는 잉어, 붕어, 메기, 쏘가리 등이 등장하는데 다산(多産)의 의 미와 효행, 출세, 부부 화합이 뜻을 지니고 있다.

새문양 : 학, 공작, 기러기, 오리, 원앙, 꿩, 까치, 닭, 제비 등의 새들이 문양에 쓰이고 있 다. 대부분 길상과 이로움, 행복을 염원하는 마음을 상징하며, 그 가운데 제비는 봄을 알리는 길상의 상징으로 경첩이나 반닫이 등의 자물쇠 앞바탕에 조각하여 열 쇠가 제비처럼 날렵하고 빨리 잘 열리는 기능이 되기를 기대하였다.

식물문양 : 연꽃, 국화, 소나무, 모란, 사군자, 복숭아, 버드나무 등이 식물 문양으로 쓰이고 있다. 연꽃은 가장 오랫동안 많은 곳에서 생명성과 순결의 상징으로 활용되었으 며, 국화는 안락과 군자의 충의를, 매화는 절개와 훈향을, 복숭아는 늙지 않음, 그 밖에 모란은 부귀를 뜻하는 문양으로 쓰였다.

십장생문양 : 조선시대에 많이 활용되었던 문양으로 생활용품에 학, 거북이, 소나무, 사슴, 태양, 구름, 영지, 대나무, 물, 불로초가 복합 구성되어 있다. 장수(長壽)와 출 세를 염원하는 마음을 담고 있는 문양이다.

문자문양 : 문자는 回자, 亞자, 福자, 壽자, 乙자 무늬 등이 있으며, 그 가운데 수(壽)자와 복(福)자가 단독으로 조각되어 오래 살고 복을 누리기를 바라는 마음을 상징하 고 있다. 나머지는 글자의 형상들을 기하학적 연속무늬로 활용하여 무한 장구한 삶의 의미를 전하고 있다.

卍자문양 : 卍자는 고려시대에 많이 쓰였던 것으로 태양의 운동처럼 선의 리듬이 오른쪽 방 향으로 흘러 자연의 섭리를 반영하는 무늬이다. 가구나 건축에 많이 쓰였으며, 경첩이나, 정석의 앞바탕에 주로 사용되어 길상수복을 모은다는 의미를 상징하 고 있다.

팔괘문양 : 팔괘는 중국의 복희씨가 지은 것으로 태극에서 비롯되는 우주생성의 원리를 담 고 있다. 생활용구에 새겨진 팔괘문양은 길흉화복이 자연의 법칙에 포함된다는 인간의 믿음이 반영된 행복의 상징 부호이다.

부단히 마음의 밭을 갈다 _ 두석장 心耕 박문열 선생

박문열 선생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해인 1950년 경주시 황성동에서 아버지 박임원 선생과 어머니 최덕순 여사 사이에서 3남 4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목수일을 하셨는데 선생이 다섯 살 때 돌아가셨다. 가장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남은 가족들은 심각한 민생고를 겪었는데 당시 너무도 가난하여 경주에서 서울시 용산구 도원동으로 옮겨 정착한 곳이 전쟁 중에 만들어 놓은 방공호였다. 초등하굑 시절에는 집안 사정이 어려워서 도시락을 싸가지 못하여 남들이 밥을 먹을때는 수돗물로 주린 배를 채우는 생활을 하였다. 공부하는 것에는 흥미를 못 느꼈으나 미술시간만큼은 매우 좋아하여 다른 아이들이 휴지통에 버린 크레파스를 주워 와서 그림을 그리곤 했는데 선생님의 칭찬도 많이 받고 상도 받아 주위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다. 미술에 소질이 있었던 선생은 수업이 끝나면 집안일을 돕거나 밖에 나가서 돌멩이를 깎아서 조각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후 1965년인 15살 때 생계에 보탬이 되고자 용산에 있는 삼흥주물공장에 들어갔다. 당시 공장은 땜질하는 물건, 기아박스 등 크기가 큰 물건을 주물로 만드는 공장으로 당시 직원이 약 100명 정도 되었다. 이 공장에서 6개월 동안 일당 40원을 받으면서 잔심부름을 하면서 주물기법을 익히려고 노력했다. 특히 미싱 부속을 만드는 것을 보고 그 기술을 빨리 배우고 싶었다.새벽 4시반에 출근해서 밤9시까지 일한 끝에 남들보다 잔업수당을 더 받을 수 있었다. 이렇게 열심히 일한 결과로 17살 때는 삼척에 있는 동양시멘트 공장의 주물부서에서 월급의 2배를 더 준다는 제안을 받고 삼척으로 간다. 근무조건도 좋았으나 객지에 혼자 있는 것이 외로워서 3개월만에 다시 서울로 돌아와서 다른 주물공장에 들어갔다. 이렇게 열심히 일은 하였으나 여전히 생계 유지가 어려워 누나의 소개로 윤희복 선생이 운영하는 장석공방에 들어갔는데 그때가 1968년이었다. 여기에 잠깐 다니다가 공방을 홍은동으로 옮겨서 윤희복 선생과 같이 7년간 숙식을 같이 하며 일하였다. 이때 각종 기술을 배웠는데 주물, 자물쇠, 장석 등 다양한 것을 만들어서 안국동과 인사동 주변 가구장이나 철물점에 내다 팔았다. 공방일 뿐만 아니라 고가구 보수업도 겸하였는데 4명의 후배가 들어오자 독립의 꿈을 키우기 시작한다.

25살 때 독립하였으나, 실패하고 다시 윤희복 선생 밑으로 들어가서 3년 정도 더 일하였다. 3년 뒤에 한남동의 고물상 옆에서 작은 천막을 치고 고가구 수리업을 겸하여 그 곳에 공방을 차렸다. 그곳에서 장석 수리 및 자물쇠 제작을 하였는데 어느 날 가게에 화재가 나서 전 재산을 잃고 다시 윤희복 선생의 아들이 운영하는 광명당으로 들어가서 일하였다. 어렵사리 이태원에 공방을 다시 차리고 독립하여 운영을 하였으나 형편은 좋아지질 않았다. 기계를 사용하면 짧은 시간안에 더 많은 물건을 만들어 경제적인 어려움을 다소나마 해결할 수 있었는데 박문열 선생은 전통적인 방식을 고집하며 작업을 했다. 손으로 만든 장석과 기계로 만든 장석은 그 미감이 전혀 다르다는 생각과 ‘나는 해야 된다’라는 의무감으로 3년을 버텼다. 그러나 생활이 어려워 다시 막내 누나의 매형이 운영하는 가구 회사에 들어가 매형 대신에 공방을 운영하였으나 장래가 보이지 않아서 홍은동 건물 위에 임시 가건물로 작은 공방을 만들었다.

그 후 전통공예관의 임영주 관장의 도움으로 1987년부터 전승공예대전에 출품하게 되었다. 출품 제안을 받고선 밤낮으로 출품할 작품을 만들었고, 그렇게 열심히 만든 ‘숭숭이 장석’으로 전승공예대전에서 특별상을 받기는 하였으나 주위에서 장석 분야로는 큰 상을 받을 수 없다는 조언을 듣고 자물쇠를 제작하여 출품하기로 마음을 먹고 특별한 자물쇠를 찾으러 서울대학교 박물관 등 곳곳을 찾아 다녔다. 결국 경남 진주의 태정박물관에 좋은 자물쇠가 많다는 정보를 얻고 19세기 초 단조기법으로 마들어진 7단짜리 자물쇠를 보게 되었다. 당시 관장에게서 사진촬영도 자물쇠의 구조를 그리는 것도 허락을 받지 못해 10여분동안 자물쇠를 들여다보면서 머릿속으로 그 형태를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작업을 시작하여 10일만에 그 중요한 실마리를 찾아내어 완성하였다.

1993년엔 전래되는 다양한 비밀 자물쇠를 종류별로 한 벌씩 제작하여 전승공예대전에 출품하기도 하였다. 결국 전승공예대전에서 문화체육부 장관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후 2000년 7월 22일 드디어 국가무형유산 두석장 보유자로 인정받게 된다. 선생은 현재 장석 제작만을 고집하지 않고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전통건축 보수 현장에서 필요한 철물을 제작하고 현장에서 직접 설치까지도 한다. 등자쇠(들쇠), 아궁이 함실의 문, 그밖에 지네출 등을 제작하여 설치까지 하여 마무리를 짓는 것이다. 이러한 일들 외에 선생이 역점을 두는 것은 강의이다. 현재 한국문화재재단에서 운영 중인 한국전통공예건축학교에서 장석반을 개설해 전통 기술을 익힐 제자들을 양성하는데 힘을 쏟고 있다. 그러나 선생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경제적으로는 여전히 어렵다. 그러나 선생은 한 번도 전통 공예 장인으로서의 삶을 후회해 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작품

돈괘, 박문열, 80x40s52cm돈괘, 박문열, 80x40s52cm
백동가재반닫이, 박문열, 높이 53cm백동가재반닫이, 박문열, 높이 53cm
백동경대, 박문열, 23x35x27cm백동경대, 박문열, 23x35x27cm
예물함, 박문열, 81x42x46cm예물함, 박문열, 81x42x46cm
8단 비밀 자물쇠, 박문열, 7.5~17cm8단 비밀 자물쇠, 박문열, 7.5~17cm
황동5단자물쇠 분리 모습황동5단자물쇠 분리 모습
옻칠시우쇠 숭숭이 장석 및 반닫이 90x46.5x80cm옻칠시우쇠 숭숭이 장석 및 반닫이 90x46.5x80cm

책ㆍ두루마리ㆍ옷ㆍ옷감ㆍ제사그릇 따위를 넣어 두는 길고 번듯한 큰 궤(櫃)를 우리말로 반닫이라고 한다. 앞판의 위쪽 반만을 문짝으로 하여 아래로 잦혀 여닫기에 반닫이라고 한다. 반닫이는 지역에 따라 철장식을 쓴 남한산성반닫이, 개구멍 여닫이문을 쓴 남원반닫이, 은입사(쇠나 구리 같은 금속에 은실을 써서 무늬를 넣는 세공기법) 된 광두정(대가리가 둥글넙적한 장식용 못)을 쓴 통영반닫이, 숭숭이(박천) 반닫이, 제비추리 경첩을 달며 안쪽 윗부분에 세 개의 서랍이 있는 전주반닫이, 백통과 놋쇠로 조촐하게 장식한 서울반닫이 같은 것들이 있다. 이 가운데 쇠판에 숭숭 구멍을 뚫어 무늬와 글자를 새긴 기하학적인 특성의 장식을 단 것이 숭숭이반닫이다. 평안도 박천지방에서 만들어 박천반닫이라고도 부르는데 추운 지방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단단한 나무보다는 무른 피나무를 써서 반닫이가 변형되지 않도록 하였다. 또 장식의 변형이나 빛깔이 변하는 것을 막으려고 소피에 삶았다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박천지방의 공예기술이다.

이층 백동 갑게수리 58x41x102cm이층 백동 갑게수리 58x41x102cm

보물·보석·문서 등을 넣어 두는 가구이다. 몸체는 홍송천목이며 주재료는 백동을 사용하였다. 백동판에 조이 정으로 파초문양을 조이질하였고 민화문양을 새겨 넣었다.

작업도구

장석의 제작도구

장석의 제작도구로는 화덕·풀무·도가니·집게·골판·타주망치·중망치·닥달망치·모루·깎칼·차장·물림집게·그림쇠·깔기·날정·짜를정·오금정·공근정·걸침정·평일정·네모정·못정·납판·활비비·왕비비·함박골판·골판정·굴림정·솟대·줄·변탕 등이 있다.

화덕 및 궤풀무 : 흙을 쌓아올려 장석 재료인 금속을 녹이기 위한 불우리와 불을 지피는 화 덕으로 구성되며 주로 황토로 제작한다.

각종 집게 : 집게 끝이 길고 굽은 형태의 집게 및 불집게 등 금속 용해 및 도가니를 집거나 성형 등을 원활히 하기 위한 다양한 형태의 집게가 필요하다.

도가니 : 금속을 녹이고 합금하는 용기로서 화덕의 고온을 견질 수 있도록 흑연으로 제작되 었다.

거푸집 : 도가니에서 녹인 금속물을 원하는 형태의 금속으로 성형시키는 철제틀

그음쇠 : 제작하고자 하는 장석의 도안이 확정되면 금속 재료의 표면 등에 도안에 따라 외 곽선 및 제작하고자 하는 선, 문양을 그릴 때에 사용하는 도구

끄심쇠 : 기능은 그음쇠와 동일하나 길이를 조정할 수 있는 조정판이 있어 원하는 길이로 조정판을 조절하여 일정한 간격으로 반복하여 위치를 표시하거나 선을 그릴 수 있 도록 하였다.

정 : 장석 작업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도구로서 금속에 도안을 그리거나, 도안된 금속을 자르거나, 양감을 나타내거나, 문양을 새기거나, 위치를 표시하거나, 표시된 금속을 따 내거나, 못 구멍을 내는 등 다양한 작업을 위하여 필요기능에 따라 편의성을 고려하여 여러 형태로 만들어 사용한다. 날정, 널정, 굴림정, 못정, 내림정, 공근정 등이 있다.

망치 : 닦달망치, 중망치, 조이질 망치, 공근정 망치, 문형 망치, 꼭두 망치 등이 있으며 각 기능에 따라 달리 사용된다.

통박과 닦달 모룻둘 : 모룻돌, 조임쇠 등을 얹어 놓고 작업하는 작업대로 망치질 등에 의한 충격을 흡수하도록 주로 통나무를 사용한다.

말음쇠와 말음대 : 금속판을 둥글게 말 때 사용하는 도구로서, 주로 자물쇠 굽통을 만들 때 사용한다.

모룻돌 : 장석을 절단하거나, 문양을 새기거나, 굽거나 펴는 작업을 위한 받침대

작두 : 금속판을 문양대로 자르는 도구

줄 : 제작물의 표면을 정리할 때 사용하는 도구

굴림판 : 반구, 곡면, 경사면, 직각 등 금속판을 원하는 형태로 꺾어 주는 틀

각종 줄

각종 줄

공근정

공근정

굴림정

굴림정

굴림판

굴림판

깍칼

깍칼

날정

날정

닦달망치

닦달망치

닦달 모루

닦달 모루

도가니

도가니

불우리와 화덕

불우리와 화덕

작두

작두

집게

집게

타주망치

타주망치

화덕 및 궤풀무

화덕 및 궤풀무

작업과정

두석 박문열 (1)

두석 박문열 (1)

두석 박문열 (2)

두석 박문열 (2)

두석 박문열 (3)

두석 박문열 (3)

두석 박문열 (4)

두석 박문열 (4)

두석 박문열 (5)

두석 박문열 (5)

두석 박문열 (6)

두석 박문열 (6)

두석장 영상


(굳은 쇠 속에 아름다움을 찾는 장인 두석장)


프로그램 동영상 소스코드 정보
대본보기 굳은 쇠 속에 아름다움을 찾는 장인 두석장
박문열 중요무형문화재 제64호 두석장 보유자
두석장은 황동이나 백동으로 목가구나 건물에 사용할 경첩이나 이를 보호하는 금속장식 등을 만드는 장인을 말한다
구리와 아연을 함께 녹여 황동을 만든 후에 망치로 두드려 얇은 판으로 만든다
모루돌 위에서 황동판에 본을 대고 그음쇠로 도안을 그린다
곡선 부분은 날정을 망치로 처서 모양을 도려내고 직선부분은 널정으로 도려낸다
집게로 조각을 때어낸 후 줄로 가장자리를 다듬어 외경을 완성한다
날이 무딘 조이정으로 문양을 세긴 후에 구멍이 뚫린 공근정으로 여백을 메꾼다
갓정으로 둘레를 둘러 선을 세긴다
경첩을 만들 부분을 봉의 지름을 고려하여 널정으로 표시하고 각정으로 따내서 분리한다
잘려진 모서리를 먼저 꺽은 후 밀어 두드려 경첩코를 만다
두 개의 경첩코를 겹치고 그 사이를 경첩봉을 밀어 넣어 완성한다
우리 가구의 아름다움을 완성하는 장인 두석장

약력

  • 1950년경북 경주 출생
  • 1965년서울 용산 삼흥 주물공장 입문
  • 1968년윤희복 선생 공방 입문
  • 1989년제14회 전승공예대전 장려상
  • 1990년제15회 전승공예대전 입선
  • 1991년문화재 수리기능자 등록
  • 1991년제16회 전승공예대전 입선
  • 1992년제17회 전승공예대전 입선
  • 1993년제18회 전승공예대전 문화체육부 장관상
  • 1993년부여 정림사지 황동철물장석 복원
  • 1994년서울 정도 600년 자랑스런 시민상
  • 1997년한국산업인력관리공단 노동부 기능전승자선정 ‘전통장석제작’
  • 1997년양산 통도사 금강계단 시우쇠 장석물 복원
  • 1998년제23회 전승공예대전 특별상
  • 1999년전남 영광 불갑사 대웅전 장석물 보수
  • 2000년국가무형유산 두석장 기능보유자 인정
  • 2008년뉴욕한마음선원 장석물 제작
  • 2009년한국문화재보호재단 한국전통공예건축학교 장석반 개설
  • 2009년대한불교 조계사 팔각 구층 석탁 청동상류부 제작 및 설치
  • 2009년광화문 복원현장 철물장석 제작 및 설치
  • 글 이치헌 / (국가유산진흥원 전승지원실장 / 「인간, 문화재 무송 박병천」 저자)

  • 사진 서헌강(문화재전문 사진작가)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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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궤(상세) _ 80x40x52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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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물함(상세) 81x42x46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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옻칠시우쇠 숭숭이 장석 및 반닫이(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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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층백동갑게수리(상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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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층백동갑게수리(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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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자물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