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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이야기

바디장 구진갑
발행일 : 2021-01-25 조회수 : 2565
바디장 구진갑

1917. 8. 5 ~ 2006. 12. 5 | 보유자 인정: 1988년 8월 1일

위대한 문화유산
한국문화재재단의 무형문화재이야기
바디장 구진갑

국가무형유산 바디장
Master Artisan of Loom-Reed Making

베틀을 노세 베틀을 노세 옥난간에 베틀을 노세.

에헤요 베짜는 아가씨 사랑 노래 베틀에 수심만 지누나.

양덕 맹산 중세포요 길주명천 세북포로다.

에헤요 베짜는 아가씨 사랑 노래 베틀에 수심만 지누나.

이 베를 짜서 누구를 주나 바디 칠 손이 눈물이로다.

에헤요 베짜는 아가씨 사랑 노래 베틀에 수심만 지누나

함경나무 북 바디집은 큰 애기 손목에 다 녹아난다.

에헤요 베짜는 아가씨 사랑 노래 베틀에 수심만 지누나

- 경기지역의 민요 <베틀가> 중

바디, 옷감을 짜는 베틀의 핵심 부품

바디는 베를 짜는 베틀에 사용되는 직조기구 중의 하나로 베틀을 구성하는 핵심 부품이다. 베틀 중에서 바디를 만드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이유는 바딧살의 촘촘하기에 따라 모시베·삼베·무명베·명주베 등의 가늘기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베틀에 걸린 바디에는 짜야 할 날실을 꿰며, 날실의 숫자는 베올의 굵기에 따라 달라져 보름새 이상의 경우 머리카락보다 가느다란 천여 올 이상의 날실을 바디에 꿰어야 한다. 따라서 얼마나 가는 실로 짜느냐에 따라 피륙의 샛수가 나뉘듯이, 바디 또한 바디 안에 몇 개의 날실을 넣을지에 따라 바딧살의 숫자가 달라지고 바디의 종류도 나뉜다. 옛날 우리네 할머니와 어머니들은 베틀에서 베를 짜서 식구들의 옷감을 짜는 것에 생활의 낙을 삼았고, 이러한 민속은 베틀노래에 담겨 현재까지 전해진다. 우리나라 고대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의생활 중에서 직조는 중대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옷을 만드는데 필요한 베틀이나 기타 직조기구를 만드는 부분인 바디를 매우 중요시했다. 역사적으로도 매우 중요시하여 국왕의 시책에 있어서도 백성을 다스리는데 중요한 정책으로 여겨 왔다. 조선시대에는 바디 만드는 사람을 성장(筬匠)이라 하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공장조(工匠條)에도 상의원(尙衣院)에 성장이 10여 명이나 있었고, 또 지방 내자사(內資寺) 제용감(濟用監) 등에도 성장, 즉 바디 만드는 장인이 고정 배치되어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조선시대 말엽부터 직조업이 점점 쇠퇴하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은 실학사상이 발전함과 더불어 기계화의 출현과 섬유화학의 발전으로 새로운 옷감이 발달하여 무명이나 삼의 재배가 성행하지 못하고 차츰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6.25전쟁 이후에는 나일론이 성행하여 목화나 삼의 재배가 거의 없어지고 기계방직기의 발달로 재래 직조기구인 베틀도 없어지기 시작하여 지금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생산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에 1988년 국가에서는 국가무형유산 바디장을 지정하였고 보유자로 구진갑 선생을 인정하였다.

한 길을 고집한 장인 정신, 구진갑(具鎭甲) 선생

구진갑 선생은 1917년 8월 5일 충북 괴산군 청안면 문공리에서 구국서(具國書)선생과 어머니 강씨(姜氏)여사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7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9세 때에 고향을 떠나 부여 등지에서 잡일을 하면서 살았다. 특히 부여의 금강변에 위치한 광산에서 오랫동안 금광일에 종사하였는데 일제강점기 시절, 금광에서의 일은 매우 고되면서 급료도 많이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매우 극빈한 생활을 하였다. 생활이 점점 더 곤란해지자 한산면 종지리로 이주하여 이곳에서 생활의 터전을 마련하지만 여전히 생활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어려운 경제적 여건을 타개하기 위해 19세 무렵에 다시 충북 진평으로 옮겨 21세까지 2년여 동안 노동일을 하게 되었다. 23세 되던 해에 당시 종지리에 거주하여 바디를 만들던 이종석(李鍾錫) 선생 집으로 와서 노동일을 하면서 비로소 바디를 만드는 일에 종사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바디를 만들기 시작하여 어느 정도 생활이 안정되고 같은 해 11월에 서천군 서천면 화금리에 거주하던 주영희 여사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세모시로 일찍부터 유명하였던 한산에서는 모시 베틀이나 그에 부속되는 바디의 제작도 성행하였다. 따라서 한산과 서천 등지에는 바디를 매는 장인들도 많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구진갑 선생에게 바디 매는 법을 가르친 이종석 선생의 집안은 한산 지방에서 몇 대에 걸쳐 바디를 전문적으로 만들던 장인 집안으로서, 일제강점기 당시에도 명장 소리를 듣는 집안이었다. 구진갑 선생은 약 3년간 이종석 선생에게 바디 만드는 기술을 배운 후에는 따로 독립을 하여 스스로 바디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해방 이후까지 성업하던 바디 생산은 6.25전쟁 이후 나일론 등 섬유직물이 홍수처럼 밀려오기 시작하면서부터 모시생산이 일시에 타격을 받게 된 후부터 급격히 하락세를 이루게 되었다. 대부분의 장인들이 생업을 농업으로 바꾸게 되어 모두 일손을 놓게 되거나 타계하였으며, 오직 구진갑 선생 혼자만 바디를 생산하게 되었다.

구진갑 선생은 조선시대 이래 전통적인 바디틀을 지니고 있는 유일한 장인이었다. 그가 바디를 한창 만들 때에는 이른 아침부터 밤늦은 시각까지 쉬지 않고 열심히 매면 하루에 대여섯 개씩 만들었다고 한다. 선생은 보유자로 인정된 이후 매년 보유자작품전에 출품하였지만 바디 자체가 작품으로서의 예술성보다는 베틀에 부속되어 실용적인 속성이 강하기 때문에 찾는 이도 없고 배우려는 이도 없었다. 그의 전수조교였던 오동근 선생이 교통사고로 구진갑 선생보다 일찍 타계하면서, 2006년 선생의 사후, 전수자는 고등학교 재학시절부터 선생에게 발탁되어 기술을 전수받은 김재중(1974년생)씨만이 그 명맥을 잇고 있다.

작품

바디 | 37×7.5cm
바디 | 37×7.5cm

바디는 베틀을 구성하는 핵심 부품으로서, 대나무를 잘고 좁게 쪼개 일정한 간격으로 엮어맨 죽세공의 일종이다. 우리나라의 모시베, 삼베, 명주베 등은 중국산 오색화려한 비단과 달리 얇고 부드럽다. 전통적으로 이러한 옷감을 짤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가늘고 얇은 대바디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특히 바디장 구진갑 선생은 보름새[15승]의 얇은 세모시를 짜던 한산에서 살면서 그들의 수요에 맞춰 바디를 만들었다. 그런 이유로 선생이 만든 대바디 또한 더할 나위 없이 가늘고 고운 특징을 지니고 있다.

작업도구 및 제작과정

바디는 대나무를 얇고 가늘게 쪼개어 만드는 죽세공품이다. 바디를 만드는 과정은 댓살 만들기와 바디 매기 그리고 다듬어 마무리하기의 세부분으로 크게 구성된다. 우선 주재료인 대나무를 베고 자르고 갈라서 바딧살과 날대 및 마구리대를 만들어야 한다. 다음으로 바디틀에 날대를 끼우고 바딧살을 날대와 날대 사이에 넣으며 실꾸리로 실고리 매듭을 엮어 맨 다음 마구리대를 끼우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바딧살의 높낮이를 조정하고 그 표며의 거죽을 말끔히 다듬고 틈새의 얼을 잡은 후, 날대와 바딧살의 끝부분을 창호지로 발라 감싸서 바디옷을 입으면 바디가 왼성된다. 바디의 제작공구는 다른 수공예보다는 비교적 간단하다. 주로 대를 다루는 공구이기 때문에 작은 톱이나 작은 칼이 많다.

바디틀 : 바디를 만드는 기본 틀로서, 바딧살의 위아래를 고정시키는 버팀목 구실을 하는 날대를 끼워 고정시킨 다음 얇고 가느다란 바딧살 수백개를 엮어나가는 공구이다. 구진갑 선생이 바디를 제작할 때 사용하는 바디틀은 조선말기 풍속화에도 등장하 는 것처럼 조선시대의 바디장들이 사용하던 독특한 제작 공구라 할 수 있다.

석칼 : 조름칼에서 훑어나온 바딧살을 더욱 얇고 정밀하게 훑어내는 역할을 하는 공구이다. 그 생긴 모양은 기다란 주걱 모양인데, 주걱부분이 특별히 고안되어 있다. 칼의 형 태는 무쇠로 일직선이 되게 하여 대장간에서 특별히 고안된 것이다. 석칼의 재료는 참나무나 박달나무, 대추나무 등 단단한 나무로 만들어진다.

조름칼 : 대나무를 주재료로 사용한느 죽세공예품을 제작할 때 많이 사용한다. 죽세공예가 성행한 지역의 장인들에게는 언제나 공통되는 필수 공구로 참빗, 채상, 합죽선, 양 태 등을 만들때 공통적으로 사용되는 도구이다.

조름칼 : 대나무를 주재료로 사용하는 죽세공예품을 제작할 때 많이 사용한다. 죽세공예가 성행한 지역의 장인들에게는 언제나 공통되는 필수 공구로 참빗, 채상, 합죽선, 양 태 등을 만들 때 공통적으로 사용되는 도구이다.

실꾸리 : 대나물로 만든 바딧살과 바딧살, 바딧살과 날대, 바딧살과 날대와 마구리대를 엮기 위해서 각각을 연력랗여 동여맬 때 실을 상요한다. 굵고 가는 바딧살의 수치는 실의 굵기에 의해 달라진다.

바딧살과 날대 : 바디를 이루는 수백 개의 바딧살과 날대 등은 3~4년생 된 굵은 대나무를 고르고 그 대나무의 마디를 적절하게 이용해 알맞은 길이와 두께로 자르고 쪼갠 다음 피죽과 속대를 갈라서 종잇장처럼 얇게 떠 만든다.

장인의 혼이 배어있는 도구는 주인의 모습과 무척 닮아 있다. 구진갑 선생의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한 바디 도구는 정갈하고 깔끔한 생전의 그를 보는 것 같다.

김점순선생님의 작업도구

약력

  • 1917년출생
  • 1988년국가무형유산 바디장 기능보유자 인정
  • 1989년~1991년서천군 공예품 경진대회 출품
  • 1989년서천군 공예품 경진대회 입상(90~91)
  • 1988년~2006년국가무형유산 보유자 작품전 출품
  • 2006년노환으로 별세
  • 글 이치헌 / (국가유산진흥원 전승지원실장 / 「인간, 문화재 무송 박병천」 저자)

  • 사진 서헌강(문화재전문 사진작가)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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