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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유산이야기

침선장 정정완
발행일 : 2021-01-25 조회수 : 3629
침선장 정정완

1913. 10. 5 ~ 2007. 4. 27 | 보유자 인정: 1988년 8월 1일

위대한 국가유산
국가유산진흥원의 국가무형유산이야기
침선장 정정완

국가무형유산 침선장
Master Artisan of Needlework

“아깝다 바늘이여, 어여쁘다 바늘이여. 네 미묘한 품질과 재질을 가졌으니 물중(物中)의 영물(靈物)이요, 철중(鐵中)에 쟁쟁(錚錚)이라. 민첩하고 날래기는 백대(百代)의 협객이요, 굳세고 곧기는 만고의 충절이라. 능라와 비단에 난봉공작(鸞鳳孔雀)을 수 놓을 제. 그 민첩하고 신기함은 귀신이 돕는 듯하니, 어찌 인력이 비칠 바리오.(…)누비며 호며 감치며 박으며 공그를 때에 겹실을 꾀었으니 봉미(鳳尾)를 두르는 듯 땀땀이 떠갈 적에 수미(首尾)가 상응하고 솔솔이 붙여내매 조화가 무궁하다”

- 조선 순조 때 유씨부인의 조침문(弔針文) 중에서

바느질, 인간의 역사와 함께해 온 오래된 기술

침선이란 원래 바늘과 실이라는 말로써 바늘에 실을 꿰어 바느질하는 일을 총칭한다. 바느질하는 방법으로는 그 기초가 되는 감침질하는 법, 흠질하는 법, 박음질하는 법, 상침뜨는 법, 휘감치는 법, 사뜨는 법, 공그리는 법, 솔기하는 법 등이 있다. 옷에 따라 그 곳에 필요한 방법을 썼으며 계절에 따라 홋바느질, 겹바느질, 솜두는 바느질 등 이에 알맞은 바느질 법을 사용하여 왔다.

침선은 바늘에 실을 꿰어 바느질하는 일을 의미한다. 인류가 바늘과 실을 만들어 쓰기 시작한 것은 유사有史이전 부터로 알려져 있다. 신석기 시대인 1만 년 전으로 추정되는 마직물麻織物이 스위스 듀엘러 호수 밑바닥에서 발견되었고, 약 5천년 전의 면직물綿織物이 인더스 강변에서 발굴되었다. 이외에 고대 이집트의 나일강 유역에서 발견된 아마포(BC 약 3,000년), 4천5백년 전의 황제비黃帝妃가 양잠을 한 기록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실을 만들고 그 실로 직물을 짜서 바느질 한 것은 인류의 문화가 싹트기 시작할 때부터로 보인다. 바늘도 석기시대 이래 돌바늘과 뼈바늘을 써오다가 철기시대로 들어오면서 쇠바늘을 만들어 사용해 오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시대에 이미 상당한 수준의 침선역량이 고구려 벽화에 보이고 있으며, 이미 신석기 시대에 석침과 골침을 만들어 거기에 실을 꿰어 옷을 만들어 입었던 사실을 유물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삼국사기 등의 기록에는 이러한 수준 높은 복식문화가 잘 드러나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색복조色服條에는 ‘고구려 왕은 오색의 의복을 입고 백라관白羅冠을 쓰고 가죽띠에는 모두 금구金釦를 장식했으며 소매통이 좁은 삼衫을 입고 통 넓은 바지를 입었고 흰가죽 띠를 띠고 노란 가죽신을 신는다. 서인庶人들은 거친 베옷을 입고 변弁을 쓰며 여자는 머리에 건괵巾幗을 쓴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침선으로 이루어진 삼국시대의 복식은 이미 높은 수준에 도달해 있었으며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통하여 더욱 발달하면서 전승되어 오고 있다. 그러나 근대기 이후 일상생활에서 한복보다 양복을 입으며 생활문화가 변화되면서 전통적인 방식으로 옷을 짓는 기술은 사라질 위기에 처하였다. 이에 1988년 국가에서는 국가무형유산 종목으로 침선장을 지정하였고, 故 정정완 선생을 초대 기능보유자로 인정하였다.

우리 한복은 비단 주 무명 모시 마 생명주 생모시 또는 사가 주류를 이뤘다. 여름에는 홑으로, 봄 가을에는 여름감을 겹으로 하였으며 겨울에는 비단을 사용하여 안팎 사이에 솜을 두어 보온을 높이기도 하였다. 실은 목실을 사용하였고 굵은 실은 삼합사 보통실은 이합사였다. 고운 바느질은 당실이라 하여 그늘고 꼬임새가 단단한 것으로 하였다.

침선의 의미

침선針線이란 원래 바늘과 실이라는 말로 바늘에 실을 꿰어 바느질하는 일을 총칭하여 뜻한다. 따라서 바늘에 실을 꿰어 바느질로서 만들 수 있는 모든 복식이 이에 해당한다. 넓은 의미로 해석할 때에는 복식 전반을 만드는 일로 풀이된다. 옷감을 치수에 맞게 잘라 바느질하는 봉제과정에서부터 옷에 어울리는 무늬를 수놓는 자수, 옷에 곁들여 장식하기 위해 만드는 장신구공예까지를 포괄하는 넓은 의미로 해석되기도 했다. 다만, 침선 중에서 그 주류를 이루는 것은 옷을 말러서(옷감을 치수에 맞게 잘라) 바느질하는 것이다. 현재는 침선의 범위가 국가무형유산 종목의 범위가 세분화되면서 침선장, 자수장, 누비장, 금박장 등으로 나뉘어져 있지만 무형문화재에 대한 지정조사 초기에는 침선의 개념을 넓은 의미로 파악하기도 했다.

위당 정인보 선생의 맏딸로 태어나 사대부와 왕실의 침선기법 배워

故 정정완 선생은 1913년 음력 9월 초엿새에 부친인 위당 정인보(1893~1950)선생과 성계숙(1893~1913)여사 사이의 맏딸로 태어났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13세(1905년)에 혼인하였는데 어머니는 21세의 이른 나이에 돌아가셨다. 부친인 정인보 선생은 한학자이자 역사학자, 양명학 연구의 대가로 알려진 만큼 그의 집안은 예로부터 글 좋아하는 선비 집안으로, 위로 할아버지, 양할머니 경주 이씨와 생할머니 달성 서씨,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아래로 7남매의 형제가 있었다. 장남 정연모, 차남 정상모, 3남 정흥모, 4남 정양모(전 국립중앙박물관장), 차녀 정경완(벽초 홍명희의 며느리), 3녀 정양완(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4녀 졍평완 등이다. 7남매의 맏딸로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도와 여러 동생들을 보살피고 키우기에 큰 몫을 했다. 특히 바느질과 수놓기에 남다른 취미와 재주가 있던 정정완 선생은 여섯 살때부터 바늘을 잡고 바느질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바느질을 배울 때 같은 또래의 다른 아이들은 본(本)을 오려 주면서 익히도록 했으나 손재주가 좋았기에 스스로 가위질을 하고 마름질해 가면서 익혔다고 한다. 아버지는 정선생이 태어나기 전에 상해로 갔다가 기미년(1919년)에 돌아오셨다. 그로 인해 어려서 국문 및 한문(小學, 四書), 역사, 붓글씨 등 기본 소양을 할아버지와 당숙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그 후 13세에 서울의 진명여학원에 입학했다. 그러나 17세 되던 해에 광평대군댁 이희종의 외아들 이규일과 혼인하면서 학교 다니는 며느리는 싫다는 시댁의 반대로 학교를 그만 두어야 했다. 결혼 후 한 달에 다섯 가마 곡식을 먹는 큰 살림을 맡은 집안의 맏며느리로 시어머니와 시누이의 솜씨를 더 배우게 되었고 내외사촌, 육촌, 팔촌, 시동생, 시누이까지 한 집에서 돌보는 생활을 이어 왔다. 거기에 슬하에 4남5녀의 자녀를 키웠다. 청빈을 미덕으로 여기는 사대부 집안이다 보니 침모針母나 숙수熟手를 따로 두지 도 않았다. 그러다 보니 좋은 일, 궂은 일 등 온갖 대소사에 갖은 음식과 옷가지는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다 해왔다. 8.15 광복과 잇달아 터진 6.25전쟁 등으로 그의 집안에도 갖은 어려움이 연거푸 닥쳤다. 당시 재봉틀 하나에 온 식구의 생계가 달려 있기도 했다. 고운 기생 옷으로부터 온 집안의 어른, 애 옷이며, 아이들 교복과 운동복, 모자, 잠옷, 베개까지 그가 손대지 않은 것이 없었다. 6.25전쟁 이후에도 슬하의 9남매를 공부시켜 대학까지 보내느라 그 손은 쉬는 날이 없었다. 1987년 유희경 문화재위원의 침선장에 대한 무형문화재지정조사를 통해 1988년 8월 1일, 76세의 나이로 국가무형유산 침선장 보유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보유자 인정 이전에도 일본 오사카 민속박물관으로부터 모시도포 제작을 의뢰받아 제작하기도 하였으며 이화여자대학교 가정대학에서 명주도포를 의뢰하여 제작했다. 이로 인해 이화여자대학교 의류직물학과 석사학위 논문을 지도하기도 했다. 당시 무형문화재 지정조사를 한 유희경 문화재위원은 정정완 선생의 복식은 그 정교함과 반듯함이 놀라울 정도라고 평했다. 1989년부터는 국립민속박물관 공예관에서 강의를 시작으로 한국문화재재단에서 개설한 한국전통공예건축학교 침선반 강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후 성균관대 가정대학원 등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 첫 개인전은 경복궁 전통공예관에서 ‘정정완 우리옷 만들기’라는 이름으로 1990년 12월 19일부터 이듬해 1월 21일까지 열렸다. 일본 고베시 패션미술관의 의뢰를 받아 작품을 제작하고 전시하는 등 해외에 전통 한복의 아름다움을 알리는 한편, 강의와 옷 짓기에 바쁜 와중에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며느리(구혜자 선생)와 딸 혹은 젊은 제자와 같이 박물관이니 발굴터로 복식 유물을 직접 보러 다니면서 전통 복식에 대한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러한 노력 등을 인정받아 1993년 5월 1일에는 지역사회개발상록회로부터 제8회 인간상록수로 추대되기도 했다. 두 번째 개인전은 며느리 구혜자 선생이 주축이 되어 제자들이 ‘해돋이에서 해넘이까지-침선장 정정완의 손길’이라는 이름으로 서울중요무형문화재전수회관(현 국가무형유산전수교육관) 기획전시실에서 1999년 4월 9일부터 24일까지 개최되었다. 2005년 4월 20일 명예보유자로 인정된 데 이어 2007년 4월 27일 오후 5시 40분경 향년 94세의 나이에 노환으로 별세했다. 이후 큰며느리인 구혜자 선생이 2대 침선장 기능보유자로 인정됐다.

작품

까치두루마기(Gobangja Durumagi<Overcouat>,남아,화장,71×55cm)까치두루마기(Gobangja Durumagi<Overcouat>,남아,화장,71×55cm)

오방위를 상징하는 다섯가지 색깔의 천으로 만들되 어린이가 까치설날(섣달 그믐날로 설날 전날에 까치가 기쁜 소식을 전해준다고 하여 설날의 기쁨을 미리 누리게 하려는 데서 생겨났다)에 착용하는 오색 두루마기이다. 까치두루마기 특징은 소매를 청 백 홍 자주색 등 오방색 천을 바느질하지 않고 배접(천을 여러겹 포개어 풀로 붙임)하여 만드는데 있다. 전체적인 색감이 조화를 이루어 안정감이 있으면서도 한복이지만 발랄한 느낌을 준다.

사규삼(Sagyusam<Coat With Sleeves, 화장 110×70cm)사규삼(Sagyusam<Coat With Sleeves, 화장 110×70cm)

사규삼은 옷자락이 네 폭으로 갈라진 옷이라는 데서 나온 명칭이다. 조선시대에는 나이 어실 세자가 관례를 치르기 전에 입는 평상복이다. 소매가 넓고 깃이 곧으며 양 옆의 겨드랑이가 트이고, 깃과 도련, 소매끝 둘레에 선을 두르며, 그곳에 뜻이 좋은 여러 글자와 복을 기원하는 박쥐문양 등을 금박으로 찍는다. 근래의 것은 돌쟁이 남나 아이의 두루마기 위에 입힌다.

심의<Simui<Man's Outfit>,화장 206×160cm>심의<Simui<Man's Outfit>,화장 206×160cm>

관직에 나가 있다가 관직을 떠난 선비가 집에 거처하면서 한가롭게 입는 연거복(燕居服)이다. 평생 글을 읽는 선비들의 학과 같이 고고한 기품을 반영하여 학자의 기품처럼 휘색 옷감으로 만든다. 전체적인 형태는 두루마기와 같으나 소매를 넓게 하고 검은 천으로 깃과 소매부리, 가장자리를 테로 둘러 마감하는 게 특징이다. 선비 집안에서 나고 살았던 정정완 선생의 눈썰미를 엿볼 수 있다.

앵삼(Aengsam<Students' Formal Clothing>,화장 180×150cm)앵삼(Aengsam<Students' Formal Clothing>,화장 180×150cm)

조선시대 때 나이 어린 소년이 생원(生員), 진사(進士)에 합격하였을 때 입던 예복으로 앵무생의 빛깔을 닮았다고 하여 앵삼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붙였다. 앵삼을 입을 때는 어사화를 꽂은 복두를 머리에 쓰고 허리에는 띠를 두르면 가죽신을 신었다. 겉감은 연한 연두색 생주(生紬)이고, 안감은 노랑 명주를 받쳐서 은은한 꾀꼬리 색을 내는 게 특징이다. 목깃과 소매끝, 앞섶 등 가장자리에는 검정색 생주로 선을 둘러 단정하면서도 정돈한 모습을 연출한 정 선생의 솜씨가 돋보인다.

작업도구

바늘과 바늘꽂이

식구들의 옷을 지어 입히려 바느질<침선(針線)>을 했던 어머니들에게 바느질 도구는 평생을 함께 한 친구나 다름없다. 때문에 옛 사람들은 바늘, 자, 가위, 인두, 다리미, 실, 골무 일곱 가지를 여인들의 벗이라 여겨 규중칠우(閨中七友)라 부르기도 했다. 이러한 도구는 옷감을 마름질해서 꿰매어 일정한 형태를 완성시크는 데 소용되는 재봉도구라 할 수 있다. 바늘<침(針)>:바느질 도구 중 으뜸이다. 옷을 지으려면 자로 치수를 재고 가위로 잘라 마르는데, 이것을 옷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바늘로 한 땀 한 땀 꿰매야 한다. 이렇게 일일이 꿰매는 일은 가장 더디고 공도 많이 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인    두 : 옷감이나 옷을 다리는 도구. 바느질할 선이 풀어지지 않도록 꺾어 눌러주거나, 옷깃이나 동정처럼 가늘고 좁은 곳을 다릴 때 유용하다.

다리미 : 구겨진 옷감의 주름살을 펼 때 사용한다.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빨래의 양끝을 팽팽하게 잡아당기면서 문질러야 한다.

골    무 : 바늘을 눌러 말기 위해 둘째손가락 끝에 끼우는 것으로, 손끝이 찔리는 것을 막기 위해 사용한다.

제작도구 01

[한국의 장인] 침선장 구혜자 선생


(정정완 선생의 며느리이자 2대 침선장 보유자 구혜자 선생 영상)


프로그램 동영상 소스코드 정보
대본보기 UHD 한국의 장인 – 침선장 구혜자 선생 편
타이틀
‘UHD 한국의 장인’
# 침선 도구들
침선장(국가무형유산)
바느질로 옷과 장신구를 만드는 장인
# 꽃버선, 아동한복 저고리 깃
# 바느질하는 구혜자 선생 풀샷 구혜자 침선장 기능보유자
국가무형유산
# 구혜자 선생님 인터뷰
누구를 만날 때 좋은 옷이 아니라
단정하게 입어야 한다는 것, 우린 알잖아요
# 심의 F.S
심의 유학자들이 입던 겉옷
# 구혜자 선생님 인터뷰
(심의는)홑 옷으로 여름모시 옷으로 말아 감친다고 그래요,
솔기 솔기를,
그 열두폭이 열두 달을 상징하고,
소매와 깃은 사계절을 상징하고
# 심의 열두폭 PAN
# 심의 소매단 PAN
# 심의 만드는 구혜자선생
# 구혜자선생 바느질 손 CU
말아감치기
# 구혜자 선생님 인터뷰
현시점에서 한복을 점점 안 입으니까
우리 전통의 원형을 보존해야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것 마찬가지로 현재 와서 우리 옷이 점점
사라지니까 침선장을 정해놓고 전승하고
원형을 보존하라는 뜻이죠
# 마름질 하는 모습
마름질
# 골무들과 실타래
# 꽃버선
# 색동저고리
# 배자
# 바느질 하는 모습
침선장 구혜자
UHD 한국의 장인

약력

  • 1913년 10월출생
  • 1985년일본 오사카 민속박물관 도포제작 전시
  • 1986년이화여대 의류직물학과 대학원 도포관련 지도
  • 1988년국가무형유산 침선장 기능보유자 인정
  • 1989년~1997년경복궁 전통공예관 공예실기강좌(현 한국전통공예건축학교) 강의
  • 1990년정정완 우리옷 만들기 첫개인전(경복궁 전통공예관)
  • 1993년제8회 인간상록수 추대
  • 1995년성균관대학 의류학과 대학원 복식 구성 강의
  • 1997년일본고베 fashion 박물관 초청 순방
  • 1999년‘해돋이서 해넘이까지-침선장 정정완의 손길’ 전시회(국가무형유산전수교육관)
  • 2002년쿄토 전통공예전시 “한국 전통문화의 향기전”
  • 2005년 4월명예보유자 인정
  • 2007년 4월노환으로 별세
  • 글 이치헌 / (국가유산진흥원 전승지원실장 / 「인간, 문화재 무송 박병천」 저자)

  • 사진 서헌강(문화재전문 사진작가)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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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죽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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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아기옷 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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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아기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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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느질 하는 선생의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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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이 사용하던 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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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의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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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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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사화를 꽂은 복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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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