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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 세종시대 문화적 성과들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8-04-17 조회수 : 3747
세종시대 문화적 성과들


자주, 민본, 실용의 꽃 ‘훈민정음’ 
세종이 추진한 문화를 읽는 주요 키워드는 자주, 민본, 실 용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훈민정음 창제 서문에 서 가장 압축적으로 드러나 있다. “나랏말씀이 중국과 달라 (자주),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제 뜻 을 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이를 불쌍하게 여겨(민 본)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사람마다 쉽게 익혀 생 활에 편리하게 쓰도록(실용) 하노라”는 창제 서문은 세계 문자 발명상에 창제 동기를 밝힌 거의 유일한 사례라는 점 에서도 우리에게 무한한 긍지를 느끼게 한다. 

1443년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은 3년여의 보완 기 간을 거쳐 1446년 9월 우리 글 ‘훈민정음’을 반포했다. 훈 민정음 창제는 세종 시대뿐 아니라 우리 역사 전체의 문화 유산 중에서도 최고의 것으로 평가를 받는다. 1997년에는 『훈민정음 해례본』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됐 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널리 보급하기 위해 『용비어천가』 나 『삼강행실도』 언해본을 만들었으며, 죄수들의 조서나 판결문, 왕이 내리는 교서도 백성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한자와 훈민정음을 병용하도록 했다.


농업·의학·과학 분야의 성과들 
세종 시대에는 우리의 농법·과학·음악 등 문화 전반에도 다양한 성과들이 나타났다. 1429년(세종 11)에는 우리 땅 에 맞는 농법서 

『농사직설(農事直說)』이 간행됐다. 이전까 지 중국에서 수입된 농서인 『농상집요』가 참고됐지만, 우 리와 기후, 풍토가 달라 효과적인 생산을 기대할 수 없었 다. 이에 세종은 『농사직설』을 간행하기 전부터 정초·변 계량 등을 시켜 농업이 발달한 삼남 지방의 관리들에게 그 지방의 농사법을 자세히 적어 올리게 했다. 관리들은 농사 경험이 풍부한 농부들을 찾아가 그들이 농사짓는 방법을 자세히 기록했다. 『농사직설』은 현장의 조사와 연구를 바탕으로 완성한 것이었다. 『농사직설』의 서문에는 천지사방의 풍토가 다르 고 작물에 따른 농법이 따로 있어 옛 책과 내용이 맞지 않음 을 아시고 각 도의 관찰사에게 명해 ‘고을의 지혜 많은 농부 들이 경험한 바를 모두 적어 올리라’고 한 세종의 당부가 적 혀 있다. 『농사직설』이 완성된 후 세종은 친히 경복궁 후원 에 1결의 땅을 갈아 직접 농사를 짓는 친경(親耕)을 했다. 

1433년(세종 15)에는 의학 분야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어왔다. 우리 산천에서 생산되는 약재를 중심으로 증상 에 따른 처방을 기록한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이 완성 된 것이다. 『향약집성방』은 세종이 10년 이상의 시간을 투 지한 끝에 우리의 몸에 맞는 약재를 정리한 책으로, 질병을 57개의 큰 항목으로 나누고 959조의 소목을 달아 해당하는 병과 처방법을 제시했다. 세종의 문화 역량은 과학 분야로 도 이어졌다. 조선초기 천문 관측 기관인 서운관에서 간의 대(簡儀臺)를 설치한 바 있지만 미흡한 수준이었다. 세종 은 1432년부터 대규모 천문의상(天文儀象) 제작 사업에 들 어가 경복궁 경회루 북쪽에 석축 간의대를 완성했다. 해의 그림자로 시간을 계산할 수 있어서 ‘솥을 떠받치고 있는 모 양의 해시계’란 뜻의 ‘앙부일구仰釜日晷)’ 제작에도 매진했 다. 해시계는 궁궐 외에도 혜정교와 종묘 남쪽의 거리에 설 치돼 우리나라 최초의 공중시계 역할을 했다. 이외에 현주 일구와 천평일구, 정남일구와 같은 휴대용 시계도 제작됐 다. 1434년에는 노비 출신 과학자 장영실이 저절로 시각을 알려주는 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를 발명했다. 해시계는 날씨가 흐리거나 밤이 되면 쓸 수 없는 약점이 있었는데, 자격루는 이러한 한계점을 극복한,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시계였다. 장영실은 천민 신분이었지만, 세종의 혜안으로 최고의 과학자가 됐다. 인재를 찾는 데 있어서 신분의 귀천 을 가리지 않는 ‘포용의 리더십’이 돋보인다.





문화 정책의 산실, 집현전 
집현전이라는 명칭은 고려 인종 때 처음 사용됐고, 조선시 대에 들어와서도 정종 때 집현전이 있었으나 거의 유명무 실한 기구가 됐다. 세종은 즉위와 함께 집현전을 완전한 국 가기관으로 승격시켜 학문의 중심기구로 삼았다. 그리고 재주와 행실이 뛰어난 젊은 인재들을 모았다. 신숙주·성 삼문·정인지·최항 등 세종 시대를 대표하는 학자들이 속 속 집현전에 모여들었다. 집현전은 1420년(세종 2)에 설치 돼 1456년(세조 2)에 없어질 때까지 36년간 존속했다. 그 러나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뇌리 속에 깊이 각인 돼 있는 것은 이곳에서 대표적인 학문·문화 활동이 완성 됐기 때문일 것이다. 집현전에는 세종대에서 단종대까지 총 96명의 학자가 배출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런데 조선 시대 문과 합격자의 명단을 기록한 『국조방목』을 보면 집 현전 학자 전원이 문과 급제자 출신이다. 그리고 집현전 학 자 중 절반에 가까운 46명이 5등 안에 합격했음이 나타나 세종이 최고의 인재들을 발탁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우수 한 인재들에게 세종이 부여한 임무는 독서와 학문연구, 그 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정책 결정과 국가적인 편찬 사업이 었다. 집현전이 위치했던 곳은 현재의 경복궁 수정전 자리 로 왕이 조회와 정사를 보는 근정전이나 사정전과 매우 가 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만큼 왕의 관심이 컸음을 의미 한다. 집현전에서는 주로 고제(古制)에 대한 해석과 함께 정치 현안의 정책 과제들을 연구했다. 주택에 관한 옛 제도 를 조사한다거나 중국 사신이 왔을 때의 접대 방안, 염전법 에 관한 연구, 외교문서의 작성, 조선의 약초 조사 등 다양 한 연구와 편찬 활동이 이곳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그리고 집현전에 소속된 학자들은 왕을 교육하는 경연관, 왕세자를 교육하는 서연관, 과거시험의 시관(試官), 역사를 기록 하는 사관(史官)의 임무도 동시에 부여받았다. 그만큼 이 들을 국가의 기둥으로 키운 것이다. 

집현전에서는 각종의 편찬사업도 활발하게 이루어졌 다. 역사서, 유교경서, 의례, 병서, 법률, 천문학 관련 서적 이 그것들이다. 학자들은 과거의 법제와 학문 연구를 통해 이를 완수해 세종에게 올렸다. 편찬사업은 세종 당대에 완 성된 것도 많았지만 『고려사』와 같이 전대의 역사를 정리 한 편찬 사업은 세종대에 시작해 문종대에 완성됐다. 그러 나 시간이 지나면서 집현전 학자들에게는 불만도 일부 나 타났다. 정창손 22년, 최만리 18년, 박팽년 15년 등 집현전 에 근무하는 연한은 다른 어떤 부서보다도 길었고, 이에 따 라 승진을 하고 싶어 하는 학자들도 나타났다. 상황을 파악 한 세종은 집현전 학자들을 제도적으로 배려하는 조치를 만들었다. 사가독서(賜暇讀書) 제도, 즉 왕이 하사하는 유 급휴가제도를 처음 실시한 것이다. 사가독서는 1426년(세 종 8) 12월 집현전에 근무하는 권채·신석견·남수문 등을 집에 보내 3개월간 독서하는 시간을 준 것에서 비롯됐다. 

처음에는 집으로 보냈지만, 이후에는 학문하기 좋은 조용 한 절(진관사), 그리고 성종대에는 아예 독서당[호당(湖堂) 이라고도 함]을 만들었다. 처음에 독서당은 용산에 있어 남 호(南湖)라 불리다가 중종대인 1507년 현재의 서울 금호동 산자락으로 옮긴 후에는 동호(東湖)라 했다. 성동구의 ‘독 서당길’이나 한강의 다리 중 동호대교는 조선시대에 동호 독서당이 있었던 역사의 현장을 말해 주고 있다. 집현전에 서는 세종의 각별한 후원 속에서 수백 종의 연구 보고서와 의학·역사·의례·국방 등 전 분야에 걸쳐 50여 종의 책 이 편찬돼 조선전기 문화의 꽃을 활짝 피웠다. 

세종 시대에 완성됐던 농업·의학·과학과 편찬 사업 분야의 문화적 성과들. 이들 성과는 자주·민본·실용의 시대정신을 정확히 파악하고 이를 실천한 세종의 리더십이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