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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 임진왜란을 어떻게 되돌아볼 것인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8-06-04 조회수 : 2072

전쟁의 시작과 국왕의 파천


일본의 오랜 전국시대(戰國時代)를 종결지은 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였다. 그는 조선을 거쳐 명을 정복하겠다는 목표를 세웠고, 1591년부터 침략 준비를 본격화하였다. 규슈 최북단에 침략 기지인 나고야성(名護屋城)을 건설하였고, 1592년 3월 13일 모두 15만 8,700명의 병사들에게 바다를 건널 것을 명령하였다. 1592년 4월 14일, 일본군은 부산에 상륙하였다. 그리고 부산진성과 동래성을 차례로공격하여 무너뜨린 후 전진을 계속하였다. 히데요시의 걱정과 달리 조선의 저항은 일본군을 막아내지 못하였다. 불과 보름 남짓한 시간이 지난 5월 초, 조선의 수도 한성이 일본군에게 함락되었다. 선조와 왕실 가족, 신료들은 이미 피란한 후였다. 개성을 지나 평양에 도착한 조정은 평양 사수를 다짐하였으나, 관군이 임진강에서 패배하면서 평양마저버리고 의주까지 피란하였다. 1592년 6월 22일이었다. 이제조선 조정이 의지할 곳은 많지 않았다. 조선 조정은 압록강건너편의 명나라가 언제나 조선을 지지해 줄 것으로 기대하였다.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하다

평양을 떠나 의주로 피란하는 도중 “일본으로부터 침략을 당하였다는 사실을 명나라에 전하고 구원을 요청하자”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선조는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의 땅으로 피란하겠다는 요청을 명나 라 측에 전달하기도 하였으나, ‘100명 정도만 와서 요동 지방 에 거주할 것’이라는 반응에 실망한 후 망명계획을 철회하였 다. 조선으로부터 일본의 침략 사실을 전달받은 명나라 조정 에서는 즉시 요동 지역의 병력을 파견하여 조선의 급박한 요 청에 응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1592년 7월, 조승훈이 이끄는 명군 병력은 평양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에게 참패하고 말 았다. 패배 소식을 들은 명나라 조정에서는 이 전쟁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조선 을 돕기 위해서는 이 전쟁을 위한 대규모 군단을 구성해야만 하였다. 만력제 신종이 구원을 결정하면서 즉시 지휘부가 구 성되고 각지에서 병력이 징발되었다. 만력제는 “대대로 동쪽 울타리를 지켜 온 조선이 어려움을 당하였으니” “하늘의 명 을 받은 천하의 군주로서” “수십 만의 군사를 동원해 일본을 정벌하겠다”며 전쟁의 명분을 밝혔다. 
  한편 병력 동원을 위해서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하였 다. 병부상서 석성은 시간을 벌기 위해 심유경이라는 책사를 발탁하여 유격 직함을 부여한 후 일본군과 교섭하게 하였다. 그동안 명군의 전쟁 준비는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평양 탈환과 ‘재조지은(再造之恩)’

1593년 1월, 이여송이 이끄는 명군과 조선의 연합군은 평양성을 탈환하였다. 명군과 조선군의 호흡이 잘 맞아떨어졌기에 가능한 승전이었던 것. 그러나 아쉽게도 두 나라 군사 간의 협조는 이후 삐걱대게 된다. 평양 수복 이후 조선은 명에대해 ‘나라를 다시 만들어 준 은혜(再造之恩)’를 이야기하기시작하였다. 일본군 선봉이 주둔하던 강력한 거점성의 탈환은 조선에 크나큰 감동이었다. ‘재조’는 그러한 감격을 전하기 위해 조선이 선택한 단어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재조’는명이 조선에 과도한 요구를 할 때 사용되기도 하였다.


강화교섭

이여송은 승전의 여세를 몰아 급히 전진하였다. 일본군은 싸우지도 않고 개성을 포기하였으며, 한성까지 후퇴해 버렸다이여송은 소수의 병력만을 이끌고 더 전진하였다. 그러나 한성에 주둔하던 일본군이 이여송의 전진 지점에 매복해 있다가 공격을 시도하였고, 이에 대비하지 못한 이여송은 일격을당하고 말았다. 이른바 벽제전투였다. 이후 이여송은 개성을거쳐 평양까지 퇴각해 버렸다. 명군이 평양에서 통쾌한 승리를 거두기는 하였지만, 한성에 모여든 일본군은 이미 수만 명에 이르렀다. 전쟁이 대치국면으로 접어들었던 1593년 2월부터 명군과 일본군 양측은 강화교섭을 염두에 두기 시작하였고, 전투 국면에서는 제외되었던 심유경이 다시 등장하였다.양측은 휴전 후 강화교섭에 동의하였고, 1593년 4월 18일에일본군은 한성에서 물러나 남쪽으로 향하였다. 명군은 조선군의 군사 행동도 금지하였다. 명군이 내세운 조건은 히데요시의 항복문서와 일본군의 전면철수였다.    
   그 대가로는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으로 책봉하겠다는조건을 제시하였다. 반면 히데요시가 내세운 조건은 명나라황실과의 혼인, 조선 영토의 할양 등 명과 조선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다.


의병과 이순신

지금까지는 명군과 육상의 조선군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였다.그러나 우리는 임진왜란을 다룬 많은 역사서술을 통해 임진왜란 시에 조선 수군 이순신과 의병이 맹활약하였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들에 대한 강조가 지나친 것이아닌지 의문을 품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여기서는 따로 공간을 마련하여 여러 전투 장면을 재론하기보다는, 적으로서 그들을 대면하였던 일본군의 기록을 통해 그들의 실상에 가까이 접근해 보겠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92년 11월 10일 일본군 수군 장수들에게 내린 명령서와 서장이다.
 
“(내가 조선에 건너갈 때까지) 적의 함선이 공격하더라도, 육
지에 올라가서 (적 수군에) 대응하지 말라.”
“내년 봄에 내가 직접 바다를 건너가서 반란을 일으킨 놈들
(一揆原 : 의병을 가리킴)을 모두 처단하여 평정 하겠다.”
 
이처럼 조선의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과 조선의 의병은 일본군에게 커다란 위협이었다.



강화교섭의 파탄과 정유재란

1593년 4월부터 시작된 강화교섭은 1594년 12월 명에서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에 책봉하는 책봉 사절 파견을 결정하였다. 명군과 일본군 측에서는 조선 역시 상응하는 사절이 파견되어야 한다며 압박을 하였고, 조선은 마지못해 책봉사를 따라 통신사를 파견하였다.1596년 9월, 히데요시는 오사카성에서 책봉사를 접견하고 ‘일본 국왕’ 책봉을 받았다. 전쟁 종결이 기대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며칠 후 그는 갑자기 강화교섭 결렬과 조선 재침을 선언하였다. 조선의 왕자가 오지 않았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이번에는 1592년과 달리 명이 아니라 조선만을 침략대상으로 명시하였다는 점은 이전의 침략과 다른 부분 중 하나였다.


‘끝없는 전쟁’, 히데요시의 죽음

1597년 7월 일본군의 군사 행동이 재개되었다. 정유재란의 시작이었다. 히데요시는 일련의 군사 행동을 마친 후 해안에 진지를 구축하고 조선의 강화교섭을 이끌어 내라는 명령을 내렸다. 전쟁에 염증을 느낀 일본군 중에는 조선에 투항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조선은 이들을 ‘항왜(降倭)’라고 불렀다. 그러나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았던 전쟁은 1598년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마침내 종결을 앞두게 되었다. 명 군과 일본군은 일본군의 안전 철수를 보장하는 교섭을 진행 하였다. 1598년 11월, 일본군은 철수를 시작하였다. 그들을 막아서는 이는 이순신과 명군 장수 진린 외에는 없었다. 


평화의 시대, 그리고 기억의 전승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후 일본의 권력을 차지한 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였다. 이에야스는 우호적인 태도로 조선에 국교를 요청하였다. 자신은 임진왜란 때 참전하지 않았다는 것을 명분으로 내세우기도 하였다. 조선에서는 오랜 기간 찬반론이 엇갈렸다. 그러나 ‘백성들의 휴식’, 즉 진정한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일본과의 우호 관계가 중요하다는것을 알았기에, 일본으로부터 교섭 조건을 받은 후인 1607년에 일본으로 사절을 파견하였다.     이후 두 나라는 250년간 전에 없던 평화의 시대를 구가하였다. 그러나 1811년을 마지막으로 통신사 파견은 끊겼고,양국 관계 역사상 최악의 시대가 다가오게 되었다. 일본은 ‘신공황후의 삼한정벌’과 함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정벌’을 당대의 조선 식민지화에 덧씌우며 침략을 정당화하였다. 대외 팽창론과 조선 침략론이 성행하자, 오랜 기간의 평화시대는 잊히고, 침략의 역사가 그것을 대체하였다. 격변하는 세계정세 속에서 우리는 이 전쟁을 어떻게 되돌아볼 것인지 고민할 때다.



 
- 글 : 김경태. 고려대학교 CORE사업단 연구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