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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미를 다시 찾다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8-06-05 조회수 : 2863


민중이 역사발전의 주체로 등장하다


첫째, 한국사의 발전과정에서 민중(民衆)이 역사발전의 주체로 등장하였다. 동학농민혁명 이전에도 수많은 민란(民亂)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민란은 단순한 한풀이에 불과하였으며 조직적이지도 못하였으며 전망을 가지지도 못하였다. 반면 동학농민혁명을 주도한 동학농민군들은분명한 지향점을 가지고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정권을 교체하려고 하였으며, 경제적으로는 조세수취제도(租稅收取制度)의 개선 등을 통해 영세한 농민과 상인·수공업자 같은 직접생산자의 자립과 발전을 꿈꾸었으며, 사회적으로는신분타파운동을 벌여 양반질서를 혁파하고 평등사회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또한 동학농민군은 군대로서 조직을 갖추고 국가를 상대로 전쟁을 전개하게 되는데, 이는 동학농민군이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동학농민군이 집강소(執綱所)를 통해 농민자치를 실현한 것은 바로 이러한 역사발전 주체로서의 역할을 확실히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집강소는 역사발전의 주체로서뿐만 아니라 세계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인류 역사에서 반란은 인정되지 않는다. 그런데 동학농민혁명 과정에서 동학농민군은 조선정부와 협상을 통해 그들의 존재를 인정받고 통치권까지 행사한다. 물론 그 기간이 3개월여에 불과하지만 동학농민군이 집강소를 통해 농민통치를 실현한 것은 세계사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다.



조선후기 반봉건(半封建)의 사회개혁을 지향하다

둘째, 조선후기 이래 지속적으로 전개해 온 반봉건(半封建)의 사회개혁을 지향하였다. 1800년 이후 60여 년간 지속된 세도정치는 조선의 근대화(近代化) 기회를 상실하게만들었으며 조선을 가장 악화된 상태로 만들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등장한 대원군정권(大院君政權)은 어느 정도개혁을 실시하였으나 시대적 변화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보수 유생과 민비 측의 공격으로 실각하였다. 이후 조선에서는 민비를 중심으로 한 민씨정권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조선을 이끌어 갈 만한 정치적 역량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으며 부패구조를 양산할 뿐이었다. 바로 이러한상황에서 농민들은 낡은 구질서를 과감하게 거부하고 새로운 사회구조를 지향하였다. 이러한 반봉건 운동은 인류가끊임없이 추구해 온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인간 존중 그리고 인류 평등의 가치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은 앙시앵레짐, 즉 구체제를 혁파하고 인간평등의 가치를 추구한 프랑스혁명과 그 궤를 같이한다고할 수 있다.



반침략과 반외세에 강력 저항하다

셋째, 한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로 제기된 반침략과 반외세를 분명히 하였다. 당시 보수지배층은 외세의압력을 오히려 봉건사회 해체기를 당하여 자신들의 쇠미해진 기득권을 보호·유지시켜 줄 후견세력으로 받아들이고있었다. 그러나 외세의 간섭은 정상적인 역사발전을 왜곡하고 근대사회로의 전환을 지체시켰다. 그러므로 농민군은외세와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였으며, 이를 극복하려는 민족사적 요구에 가장 먼저 희생적으로 나섬으로써 근대 민족운동의 효시가 되었다.



민족민주운동의 뿌리가 되다

넷째, 동학농민혁명은 한국 민족민주운동의 출발점이다.동학농민혁명은 실패하였다. 실패한 혁명은 의미가 성립되지 않음에도 그렇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이후 한국사의 발전과정에서 나타난 여려 민족민주운동에 동학농민혁명이정신적·이념적 뿌리로서 자리잡아 이어졌기 때문이다.3·1운동, 임시정부, 광복군 활동, 그 밖의 독립운동 등이바로 동학농민혁명으로부터 그 정신적 뿌리를 계승하고있다.
    1894년 18세의 애기접주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던 김구 선생은 이후 조국의 광복을 위해 독립운동의 선봉장이 되었다. 그리고 광복 이후 전개된 민주운동인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 2016년 촛불시민혁명은 평등하고 공정한 사회를 만들고자 한 동학농민혁명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이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명시되어야 하는 것은 어쩌면당연한 일이다. 향후 논의되는 헌법 개정 과정에서 동학농민혁명 정신이 포함되기를 기대해 본다.


한국 근대사의 길을 정하다

다섯째, 동학농민혁명으로 한국 근대사의 방향이 결정되었다. 19세기 후반 조선은 외세배격의 자주화와 반봉건의 근대화라는 두 가지 과제를 가지고 있었다. 이에 대해 지배층은 반외세의 입장에서 위정척사운동(衛正斥邪運動)을 전개하기도 하고 반봉건의 입장에서 개화운동을 전개하였다.그러나 이러한 활동은 모두 자주화 또는 근대화 한 측면만을 강조하고 주장함으로써 당시 조선이 처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다. 즉 위로부터의 개혁이 실패하고 만 것이다.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동학농민군이 아래로부터 개혁을 추진하여 동학농민혁명을 일으켰다.

    이와 같은 동학농민혁명은 크게 두 가지를 야기하였다. 대외적으로 청일전쟁이 일어났으며, 대내적으로 갑오개혁이 실시되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는 수천 년간 이어져 온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의 질서를 무너뜨리고일본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하였다. 갑오개혁을 통해 조선은 일본의 간섭이 노골적인 가운데 수천 년간 지속되어 온봉건질서 체제를 바꾸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러한 개혁은 많은 부분에서 동학농민군의 요구조건이 반영되었다.그러나 무엇보다 눈여겨볼 점은 동학농민혁명의 실패가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화를 재촉하였다는 사실이다. 청일전쟁에서의 승리로 동아시아의 패권을 차지한 일본은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고 조선을 식민지화하려는 그들의 의도를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이후 조선이대한제국(大韓帝國)을 수립하여 황제 중심의 개혁을 실시하였으나 준비부족과 시대적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함에 따라 일본의 식민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동학농민혁명의 실패 원인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동학농민혁명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외세의 개입이다. 그리고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가장 큰 책임은 바로 그 외세를 끌어들인 당시 조선의 지배층에 있다. 외세의 개입이 없었다면 조선의 역사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124년 전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사실은 오늘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문제와 직결된다. 2017년 촛불시민혁명으로 새롭게 구성된 정부는 124년과 다르지 않은 주변 열강의 틈바구니 속에서 적폐청산(폐정개혁)과 민족의화합을 통한 겨레의 발전을 추구해야 하는 과제를 부여받았다.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미래의 역사가 결정되고, 미래 후손들이 누릴 삶의 방식이 결정된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 글 / 사진 :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