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속 나무 이야기

글.사진. 고규홍(나무칼럼니스트)

소나무과에 속하는 상록침엽교목으로, 현재 천연기념물로 지정 보호되고 있는 백송. 평생토록 이 희귀한 나무 백송을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고 살아간 선비 가운데에 추사 김정희가 있다. 그가 살아온 내력은 물론이고, 중국과의 학문적 교류 사정을 그대로 담은 한 그루의 나무가 우리 곁에 있다. 충남 예산의 추사고택에 살아있는 천연기념물 제106호 ‘예산 용궁리 백송’이 그 나무다.

추사 김정희가 지나온
삶과 학문의
내력이 담긴
백송들

선조들의 손길이 묻어 있는 특별한 나무

너른 들에 홀로 우뚝 서서 생로병사를 맞이해야 하는 나무에 비바람과 눈보라만큼 가혹한 것은 없다. 특히 해마다 여름이면 다가오는 태풍은 우리에게 그리고 소중한 큰 나무들에도 적지 않은 상처를 남긴다. 지난 여름, 태풍 마이삭도 커다란 한 그루의 나무줄기를 동강 냈다. 1976년 에 천연기념물 제253호로 지정해 보호하는 ‘이천 신대리 백송’이다. 2백 여 년 전인 조선시대에 전라감사를 지내며 활동한 민정식의 할아버지 민달용의 묘소에 심은 특별한 나무다. 백송은 소나무의 한 종류인데, 하얀색을 바탕으로 밝은 회색의 얼룩무 늬가 빚어내는 줄기 표면이 남다르다. 백송의 다른 이름들도 모두 이 하 얀 줄기와 얼룩무늬에 기대어 지어졌다. 중국에서는 흰색 줄기의 특징 에 기대어 백피송(白皮松)이라는 이름으로, 또 회색의 얼룩무늬가 호랑 이 가죽을 닮았다고 해서 호피송(虎皮松)이라고도 부른다. 성장이 비교 적 까탈스러운 백송은 고향인 중국 외에서는 잘 자라지 않는 데다 옮겨 심기도 잘 안 되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특별한 나무라 할 수 있다. 이 특별한 나무는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을 받고 우리 역사의 궤를 함 께했다. 특히 ‘예산 용궁리 백송’은 추사 김정희와 애환을 함께한 백송으 로 유명하다.

백송, 어린 시절의 추억을 품다

예산 용궁리에서 태어난 김정희는 어린 시절을 지금의 서울 종로 적선 동 정부서울청사 부근에서 보냈다. 당시 이곳에는 영조 임금의 둘째 딸 인 화순옹주가 혼사를 치른 뒤 살던 집이 있었다. 화순옹주는 김정희의 증조부인 김한신과 결혼을 했는데 김한신은 영조 임금으로부터 월성 위(月城尉)라는 직위를 받았고, 월성위 김한신이 화순옹주와 함께 살 던 집은 월성위궁으로 불렸다. 김한신은 후사를 보지 못하고, 서른아홉 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남편을 잃은 화순옹주는 장례를 치르고 곧바로 곡기를 끊어 열나흘 만에 함께 죽음에 들었다. 후손이 없는 이 집안의 대를 이은 건 양자로 들인 김한신의 조카 김이주 였다. 김이주는 장남 노영을 비롯해 노성, 노경, 노명 등 네 아들을 두었 다. 김정희는 그 가운데 셋째 아들이자 뒤에 병조판서를 지낸 김노경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런데 가문의 장손인 김노영이 그의 할아버지 김 한신과 마찬가지로 후사를 이어갈 아들을 낳지 못하자, 김정희가 양자 로 들어가 월성위 가문을 이어갔다.
월성위 가문의 장손이 된 김정희는 지금 추사고택으로 알려진 충남 예 산 용궁리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을 월성위궁에서 보냈다. 월성위 궁에는 김한신이 모은 책을 간직한 매죽헌(梅竹軒)이라는 이름의 서고 가 있었다. 김정희에게는 도서관과 같은 역할을 하며 학문 세계를 넓혀 가는 바탕이 되었다. 이때 아버지 김노경은 박제가에게 김정희를 소개 했다. 김정희가 청나라의 고증학에 기울게 된 중요한 계기였다. 서울 통의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던 김정희에게 인상적인 나무가 있었 다. 영조가 그의 딸 부부에게 선물로 내린 나무였다. 영조가 화순옹주의 살 집을 짓게 하고, 집이 다 지어진 뒤, 옮겨심은 백송이었다. 영조의 백 송을 바라보면서 자란 김정희로서는 어린 시절을 추억할 때마다 떠오르 는 대표적 추억의 상징이었다. 1962년에 이 나무는 ‘서울 통의동 백송’이라는 이름으로 천연기념물 제 4호에 지정됐다. 독립 노거수로서는 가장 앞선 번호를 가진 나무였다. 참고로 천연기념물 제1호는 ‘대구 도동 측백나무숲’이고, 제2호는 ‘합천 백조 도래지’이며 제3호는 ‘맹산의 만주흑송수림’이었다. 이 가운데 제1 호인 측백나무 숲은 아직 남아있지만, 제4호인 ‘서울 통의동 백송’을 비 롯한 제2호, 제3호는 이미 천연기념물에서 해제했다. ‘서울 통의동 백 송’이 천연기념물에서 해제된 것은 1993년이다. 그보다 3년 전인 1990 년에 나무는 센 바람을 동반한 벼락을 맞고 쓰러졌기 때문이다. 이때 나 무의 나이테를 정밀조사한 결과, 일제강점기인 36년 동안 성장을 멈추고 있다가 해방되면서부터 다시 성장을 시작했다는 신비로운 사실도 알려졌다. 우리 민족이 숨도 못 쉬고 살아야 했던 험한 시절을 백송도 나름대로 아파했던 모양이다.

김정희의 정성과 사랑을 머금고 살아온 ‘예산 용궁리 백송

어린 시절의 추억과 함께하는 월성위궁의 백송에서 비롯한 백송에 대한 남다른 애정이 김정희의 마음에 깊이 새겨졌다는 건 청년이 되어 중국 의 연경(지금의 베이징) 땅에 갔을 때도 드러났다. 김정희가 스물을 넘 긴 나이의 일이다. 김정희는 생원 자격을 주는 과거시험인 사마시에 합격한 상황이었고, 아버지 김노경은 동지부사가 되어 연경에 가게 됐다. 이때 외교관의 아 들이나 친척에게 부여되는 자제군관 자격으로 김정희는 아버지를 따라 연경행에 올랐다. 1809년 10월 28일에 출발하여 연경에 머무른 기간은 두 달 조금 넘었다. 연경에 머무르는 동안 김정희는 백송이 그 고장에 흔히 자란다는 걸 알았다. 낯선 타국에서 어린 시절을 회상할 수 있는 나무를 만난다는 건 누구에게나 특별한 경험이다. 김정희에게도 그랬 다. 조국, 고향, 그리운 가족을 향한 향수를 달래는 데에 백송만큼 알 맞 춤한 건 없었다.
연경에서 지내는 동안 백송을 즐겨 찾았던 김정희는 스스로 백송을 구 해 심어 키우고 싶었다. 마침내 1810년 2월 1일에는 중국에서 만났던 옹 방강, 완원과 같은 스승을 비롯한 여러 학자가 베푼 송별연을 마치고 고 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길에 오른 김정희의 손에는 나무 한 그루가 쥐어 져 있었다. 백송이었다. 김정희는 귀하게 얻은 한 그루의 백송을 자신이 태어난 고택의 뒷동산, 그의 고조부 김흥경의 묘지 앞에 심었다. 짬 날 때마다 돌아보며 애지중지 키운 것은 물론이다. 지금의 ‘예산 용궁리 백 송’이 바로 그 나무다. 김정희의 나이 스물다섯, 서기 1810년 전후의 일이다. 그러니까 이 백송 은 이백 살을 조금 넘긴 셈이다. 나무가 서 있는 김흥경의 묘지는 추사 고택에서 북서쪽으로 난 조붓한 도로를 따라 6백 미터 쯤 떨어진 곳에 있고 나무는 바로 그 묘지 앞에 있다. 한눈에도 예사롭지 않은 나무임을 충분히 알 수 있는 이 나무는 천연기 념물치고는 가냘픈 몸매를 지녔다. 정성스러운 보호가 있는 까닭에 건 강 상태까지 나쁜 건 아니지만, 규모는 여느 천연기념물 급의 나무에 비 해 매우 가녀린 편이다. 원래 이 백송은 땅에서 50센티미터쯤 위로 올라 간 부분에서 줄기가 셋으로 갈라져 자랐다. 그러나 그중 가장 큰 줄기와 서쪽으로 뻗은 또 하나의 줄기는 오래전에 부러져 없어졌다. 지금은 처 음의 세 줄기 가운데 하나만 남아있어 빈약해 보이는 것이다. 말없이 200년을 살아온 나무에는 그 시대를 대표하는 선비가 살아온 내 력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셈이다. 이제 한창때의 아름답고 신비로운 자 태는 잃었지만, 여전히 상서로운 흰 껍질을 덮고 서 있는 나무 한 그루 가 소중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