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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봄, 여름호-동물의왕국] 경외하다-동·서·남·북을 지키는 동물, 사신도
작성자 : 재단관리자 작성일 : 2021-09-30 조회수 : 12401



(경외하다-2_사진01-1)강서대묘 청룡, 백호, 주작, 현무_조선유적유물도감


강서대묘 청룡, 백호, 주작, 현무 _ 조선유적유물도감


 강서대묘 청룡, 백호, 주작, 현무 도안_국립문화재연구소

강서대묘 청룡, 백호, 주작, 현무 도안 _ 국립문화재연구소



동·서·남·북을 지키는 동물, 사신도


동·서·남·북 네 방위를 지키는 수호동물, 예부터 사신은 벽사와 음양조화를 뜻하는 신령스러운 동물로 여겨져 왔다. 특히 고분벽화 주제로 즐겨 사용된 사신도는 우리나라에서 고구려를 비롯한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 조선시대 고분벽화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등장하는 소재로 각 시기에 따른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글_ 김용덕(옥천사성보박물관 학예사)



내세를 구성하는 중심이 된 사신


사신(四神)은 청룡(靑龍)·백호(白虎)·주작(朱雀)·현무(玄武) 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상(四象), 사수(四獸), 사시(四時), 사궁(四 宮)이라고도 불린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생전 누렸던 행복을 사후에도 그대로 이어가길 희망한다. 이는 죽음이 곧 새로운 세계로 나가는 출발 점이요, 무덤 또한 단순히 주검을 매장하는 공간이 아니라 영원 한 안식을 얻는 쉼터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내세관 속 에서 사람들은 묘주의 생전 모습이나 장식 문양 등 여러 상징물 을 무덤 내부에 그려 넣었고, 이 네 마리 동물을 그린 사신도(四 神圖) 역시 방위와 벽사수호( .邪守護)라는 상징성으로 인해 고분벽화 주제로 즐겨 사용된다. 사신도의 기원을 시작으로 우리나라 미술 속 사신도의 시대별 특징을 살펴본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전통을 잇고 있는 사신도


흔히 사신의 기원이라고 하면 중국 신석기시대 앙소문화(仰 韶文化, 중국 황허 중류 지역에서 존속했던 신석기 문화) 서수파 유적(西水坡遺蹟) 고분을 꼽는다. 이 무덤에는 인골을 중심으로 좌·우측에는 용과 호랑이 형상의 조개껍질 장식이, 아래쪽에는 인골로 제작된 북두칠성이 위치하고 있다. 이외에 기원전 433년 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진 중국 호북성(湖北省) 증후을묘(曾侯乙 墓) 출토붉은색 칠기상자 뚜껑에는 별자리를 상징하는 ‘두(斗)’ 자와 함께 추상적인 형상의 용과 호랑이를 배치했다. 두 사례에 서 용은 동쪽, 호랑이는 서쪽에 배치되었으니 각각 청룡과 백호 를 상징하는것이고 용과 호랑이가 죽은 이를 보호하는 존재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사신의 개념은아득히 먼 선사시 대부터 이미 시작된 것이다. 



(경외하다-2_사진03)하북성 증후을묘 출토 칠기상자 _ 호북성박물관

하북성 증후을묘 출토 칠기상자 _ 호북성박물관

(경외하다-2_사진04)중국 임안 오월 강릉 서벽 백호(오월 939년)

중국 임안 오월 강릉 서벽 백호(오월 939년)

(경외하다-2_사진05)중국 호북성 양번 남송196호묘 북벽 현무(남송 12세기)

중국 호북성 양번 남송196호묘 북벽 현무(남송 12세기)



용과 호랑이에서 출발한 사신이 네 마리 동물의 조합으로 완성 된 것은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로 알려져 있다. 이 가운데 초 (楚)나라의 문인 굴원(屈原)이 편찬한 『초사(楚辭)』와 병법서(兵 法書)인 『오자병법(吳子兵法)』은 사신이 언급된 가장 이른 기록으 로 알려져 있는데 『초사』에는 별자리 형태의 사신이,『오자병법』 에서는 네 방위에 사신이 그려진 깃발을 배치한다고 언급되어 있 다. 이를 통해 사신이 네 방위를 대표한 것과 천문사상 속에서 별 자리 형태로 자리 잡은 것을 알 수 있다. 


네 방위와 별자리로 표현되던 사신은시대가 흐르면서 여러 성격 을 가지게 된다. 한(漢)나라 때 편찬된 『포박자(抱朴子)』에는 “일 월(日月)과 주작 ·현무·청룡·백호를 생각하여 몸을 지킨다”라고 하 여 사신이 삿된 것을 물리치고 사방을 보호해주는 벽사수호의 기 능까지 담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수호신의 성격을 지닌 사신이 바로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후 한나라부터 중세기에 이르는 송(宋)나라에 이르기까지 사신도는 고분벽화와 화상석(畵像石), 석관(石棺, 돌로 만든 관) 등 동아시 아 고분미술을 대표하는 주제로 그 전통을 계속 이어가게 된다. 사신도는 약 4세기쯤 우리나라에 전해졌고 삼국시대 고분을 장 식하는 문양으로 사용된다. 무덤에 사신도를 그린 것은 삼국 가 운데 고구려와 백제이다. 백제의 경우 능산리 1호분과 송산리 6 호분이 있지만, 그 사례가 적고 보존상태도 좋지 않아 상세한 모 습을 살피기는 어렵다. 이에 사신도가 가장 많이 그려진 고구려 고분벽화를 시작으로 조선시대까지 한국미술에 표현된 사신도 의 특징을 살펴본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시작된 삼국시대 사신도


삼국시대를 통틀어 고구려는 가장 풍부하고 많은 벽화고분 을 축조했다. 고구려의 사신도는 초기벽화고분인 4세기경부터 이미 등장하지만 당시 중심 주제는 인물도와 생활풍속도였다. 이에 초기사신도는 해와 달, 별자리, 서수 등과 함께 무덤 천장을 장엄하는 부수적인 소재로 표현되어 비중이 적고 그 모습 또한 고식적이다. 백호는 긴 몸만을 지닌 자연계 호랑이로, 주작은 봉 황(鳳凰)과같은 서조(瑞鳥, 상서로운 새)보다는 닭의 형상에 더 욱더 가까우며 현무는 아예 생략되거나 쌍현무(雙玄武)로 일부 등장할 뿐이다. 이후 5세기 중엽 예불도와 연화화생(蓮花化生, 극락세계의 연꽃에서 만물이 신비롭게 탄생한다는 불교의 생성 관) 등 불교 주제와 함께 다채로운 문양이 새로이도입되지만 이 시기까지도 사신도는 천장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거나 겨우 자 05 리를 잡은 부수적인 주제였다. 


사신도는 약 6세기경부터 네 벽면에 정착해 비중이 점점 높아지 고 6세기 말에서 7세기에 이르면 독립된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후기 사신도는 그 위상이 높아진 만큼 표현도 세련되고 묘사의 충실도도 훨씬 높아져 신령스러움이 한층 강조되는데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사신에게 부여된 강한 율동감과 역동성일 것이다. 또한 후기 사신도는 평양(平壤)과 집안(集安, 중국 길림성에 있 는 도시)을 중심으로 각기 다른 매력을 보여주는데 평양권을 대 표하는 강서대·중묘의 경우 부수적인 문양을 최대한 배제하고 사신만을 크게 배치해 모든 이를 압도할 만큼의 웅장함을 자랑 한다. 한편 집안권의 오회분 4·5호묘와 통구사신총은 다양한 색 채와 장식 문양을 활용해 장식적이고 화려한 모습이다. 아이러니 한 것은 사신도 양식이 최절정을 맞는 시기에 고구려는 쇠락의 길로 걷는다는 것이다. 이는 아마도 정치적인 혼란기 속 묘주가 자신을 지켜줄 존재로사신을 선택한 것일지도 모르며, 사후에 도 안락하고 온전한 삶을 누리고 싶은 마음을 표현한 결과일 것이다. 



(경외하다-2_사진06)허재석관 현무, 고려 1144년 _ 국립중앙박물관

허재석관 현무, 고려 1144년 _ 국립중앙박물관

(경외하다-2_사진07)김광중 부인 이씨 석관 _ 국립민속박물관

김광중 부인 이씨 석관 _ 국립민속박물관



석관에 활용된 고려시대 사신도


사신도는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면서 그 모습을 찾기 힘들었 으나 고려시대부터 다시 등장한다. 고려시대에는 벽화고분 외에 조립식 석관(組立式 石棺)이라는 독특한 묘제가 제작되는데 사 신도를 비롯한 십이지(十二支), 연꽃, 금강저(金剛杵, 승려들이 불 도를 닦을 때 쓰는 도구인 방망이) 등 도교와 불교를 대표하는 문양들이 함께 어우러져 다양한 종교가 공존한 고려문화의 개 방성을보여준다. 사신도가 새겨진 고려시대 조립식 석관은 현재 까지 약 40여 기가 전하고 있는데 상당수가 내면에 제작 연대와 사용 계층을 파악할 수 있는 묘지명(墓誌銘)이 새겨져 있어 고 려사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고려시대 조립식 석관에 표현된 사신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청룡과 백호의 경우 긴 몸에 화염 갈기, 척목, 등지느러미 등 기존 삼국시대의도상을 계승하고 있다. 그렇지만 석관 속 백 호 정수리에 표현된 갈기, 혹은 꽃 모양 장식은 이전에 볼 수 없 었던 새로운 요소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알 수 는 없지만 기존 청룡·백호를 구분하기 위한 머리와 줄무늬 표현 처럼 둘을 구분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추정된다. 


주작의 경우 본래 한 쌍으로 표현된 삼국시대와는 달리 단독으로 등장한다. 공작처럼 꼬리 깃털을 위로 활짝 핀 주작은 정면 동세에 바위나 구름을 밟고 있는데 동시기 중국미술과 고려동경(高麗銅鏡)에도 동일한 모습이 확인되어 그 상관관계를 추정할 수 있다. 현무의 경우 가장 큰 변화를보여준다. 바로 거북을 휘감던 뱀이 생략되고 귀갑 위에 산(山)을 얹고 있는 것인데 동시기 중국 사신도에서도 찾을 수 없는 독특한 사례다. 


현재 이와 같은 현무 도상에 대한 뚜렷한 해석은 없지만 고대 도교경전인 『초사(楚辭)』와 『열자(列子)』 속 신산(神山)을 짊어진 거북의 모습이 반영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예로부터 거북은 튼튼한 등껍질로 신선들이 사는 신산을 짊어지는 수호의 역할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거북이 현무로 채택된 이유도 이러한 신체적 특성과 관념 때문이었다. 이와 함께 동시기 건립된 탑비(塔碑 귀부(龜趺)의 영향으로 현무 머리가 용두(龍頭)로 표현되는 것 또한 고려시대에서만 확인할 수 있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벽화묘의 경우를 들기 어려운 부분은 다소 아쉬운 감이있지만 현재까지 많은 수량이 전해지는 조립식 석관의 사례를 통해 고려시대 사신도의 양식과 특징을 파악할 수 있었다. 삼국시대부터 시작된 사신도는 신라가 통일한 이후 자취를 감췄지만 고려시대에 다시 나타났고, 이후 조선시대까지 계승되어 멸망까지 그 운명을 함께 하게 된다.    


왕실의궤에 즐겨 다룬 조선시대 사신도


조선시대 사신 도상은 궁궐 조각으로 표현된 사신상(四神像)과 의장기(儀仗旗)도 있겠지만, 시기의흐름을 파악하기에 가장 좋은 자료는 『산릉도감의궤(山陵都監儀軌)』로 조선 국왕과 왕비의 능(陵)을 조성하는 모든 절차를 기록한 책이다. 현재 규장각과 장서각, 국립중앙박물관 등 여러 기관이 나누어 보관하고 있는 『산릉도감의궤』에는 능의 조성 절차와 물품 등을 그림으로 기록한 도설(圖說)도 함께 수록되어 있어 당시 왕실문화를 시각적으로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 가운데 사신도는 사수도(四獸圖)라는 명칭으로 도설로만 전해진다. 사수도가 실물로는 전하지 않는 이유는 사수도가 그려 졌던 곳이 왕과 왕비의 관인 재궁(梓宮)을 임시 안치한 찬궁(欑宮) 내면이었기 때문이다. 이 찬궁은 한 곳에만 설치하는 것이 아니라 재궁이 일정 기간 머무르는 장소에 맞추어 설치되었고 사수도는 별도의 종이에 그린 뒤 내면에 부착했다. 이후 재궁이 나가게 되면 찬궁은 태워버리게 되는데 이에 따라 내면에 부착 된 사수도도 함께 태워져 남아있을 수 없는것이다. 


도설 사수도는 17세기부터 일제강점기를 맞은 20세기까지 편찬 된 자료들이 현존하고 있다. 이 가운데 『선조목릉천장산릉도감 의궤(宣祖穆陵遷葬山陵都監儀軌)』는 1631년에 편찬된 것으로 가장 이른 시기에 속한다. 『선조목릉천장산릉도감의궤』 도설에 수록된 사수도를 살펴보면 청룡은 곡선을 그리는 긴 몸에 화염 갈기가 달린 모습으로 고려시대 청룡 도상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다. 백호 역시 화염 갈기가 달려 있지만 현실적인 호랑이 형태 에 더욱 가까우며 주작은 머리와 다리가 세 개로 표현되어 이전 까지와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현무는 고려시대에 산을 짊어진 모습에서 다시 구사합체형으로 돌아왔으며 거북의 몸을 한 번 휘감은 뱀이 거북을 바라보고 있다.  



(경외하다-2_사진08)선조목릉천장산릉도감의궤, 청룡 _ 국립중앙박물관

선조목릉천장산릉도감의궤, 청룡 _ 국립중앙박물관

(경외하다-2_사진09)인조장릉산릉도감의궤, 백호 _ 한국학연구원 디지털 장서각

인조장릉산릉도감의궤, 백호 _ 한국학연구원 디지털 장서각



사수도 양식은 『인조장릉산릉도감의궤(仁祖長陵山陵都監儀軌)』와 『현종숭릉산릉도감의궤(顯宗崇陵山陵都監儀軌)』 등 17세기 후반부터 변화하기 시작한다. 가장 먼저 그 양상을 보이는 것은 청룡과 백호인데 청룡의 경우 전체적으로 몸이 굵어지면서 ‘⊃’ 자 형태로 한 번 꺾고 주변 배경을 오색구름과 여의주(如意珠) 로 채웠다. 백호는 화염 갈기가 생략되고 앉아있는 완전한 호랑 이로 표현되었는데 시기가 흐름에 따라 화염 갈기의 유무와 동 세 부분이 자주 교체된다. 사수도에서 백호 변형이 잦은 이유는 백호가 가장 현실적인 동물이며, 이와 같은 현실적 동물을 신격 화시키기 위해 나름의 고민과 시도를 통한 정착 과정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18세기에 이르면 주작과 현무에게도 변화가 나타난다. 이는 1757년에 편찬된 『인원왕후명릉산릉도감의궤(仁元王后明陵 山陵都監儀軌)』와 『정성왕후산릉도감의궤(貞聖王后山陵都監儀 軌)』부터인데 주작은 머리와 다리가 세 개 달린 봉황에서 신비 함이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참새의 형태로 완전히 탈피한다. 사신도 속 주작의 기본 원형이 여태껏 봉황을 벗어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부분은 매우 이례적이라고 할 수 있다. 현무의 경우 시기가 흐를수록 뱀의 형태가 가늘고 약화되다가 뱀이 생략된 완전한 거북의 모습으로 변한다. 뱀이 생략된 현무는 이전 고려 시대에서도 관찰되는 현상이지만, 고려와는 달리 귀갑 위에 어 떠한 물체도 얹어져 있지 않았으며 뱀의 빈자리는 거북의 입에 서 뿜어져 나오는 서기가 대신 채우고 있다. 이처럼 18세기부터 사수도 양식이 변화한 이유는 아직까지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모 든 사물을 현실적으로 파악하려고 했던 18세기 회화의 사실적 인 시각과 모든 예법의 허례허식을 과감히 줄이고자 한 당시 여러 왕실기록을 통해 사수도 양식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 추정된다. 



(경외하다-2_사진10)인원왕후명릉산릉도감의궤 (상) 현무 _ 국립중앙박물관

인원왕후명릉산릉도감의궤 (상) 현무 _ 국립중앙박물관

(경외하다-2_사진11)고종 즉위 40년 칭경기념비전 청룡상, 서울 종로구_ 사진 김용덕

고종 즉위 40년 칭경기념비전 청룡상, 서울 종로구_ 사진 김용덕



이후 조선 말기인 19세기와 대한제국(大韓帝國) 시기에 들어서 게 되면 동시에 편찬된 의궤인데도 불구하고 한 곳에는 머리 세 개 달린 주작이 표현되고 한 곳에는 참새 모습을 한 주작이 지속 적으로 표현되는 등 여태껏 지켜온 규범들이 모두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이는 아마도 당시 조선과 대한제국의 암울하고 혼란스러 웠던 사회상을 반영하는 것으로도 유추해볼 수 있을 것이다. 


개성과 창의성을 담은 우리 미술문화 속 사신도


사신도는 우리 고유의 미술 주제가 아닌 중국에서 유래된 것 이다. 그렇지만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긴 시간 동안 우리 미술문화 속에 항상 머무르며 함께 해왔다. 사신도가 탄생 된 중국의 경우 오랜 시간 동안 큰 변화 없이 일정한 양식과 모 습을 고수해온 반면 우리는 일부 요소들을 추가하기도, 혹은 변 형하기도 하면서 각 시대의 흐름에 따라 맞추어 나갔다. 이러한 모습을 종합적으로 보았을 때 동아시아의 국가 가운데 가장 개 성적이고 창의적인 사신 도상이 표현된 나라는 바로 우리나라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