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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가을, 겨울호-사랑과전쟁] 연정-옛사람들의 러브스토리
작성자 : 재단관리자 작성일 : 2022-01-03 조회수 : 1292



(2021가을겨울_연정-1_사진1)산수화溪山閑居圖, 신익성 _ 국립중앙박물관

산수화溪山閑居圖, 신익성_국립중앙박물관



여기 옛사람들의 사랑 이야기가 있다. 때로는 다정한 연인이 되고, 때로는 서로를 격려하는 친구가 되어 부부의 연을 맺은 이들. 이들의 견고한 사랑은 이제 역사가 되어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현명하고 따뜻하게 사랑을 나눈 옛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여다본다.


글_ 이문영(역사작가)



옛사람들의 러브스토리



이제 남은 삶은 즐겁지 않으리 - 정숙옹주와 동양위 신익성


왕실의 여자와 결혼한 사람을 흔히 부마라고 부른다. 부마는 아내가 죽은 뒤에 재혼할 수 없었다. 이런 제약은 오직 부마에게 만 가해졌다. 그리고 부마는 과거 시험을 볼 수 없었다. 당연히 관직에도 오를 수 없었다. 부마가 되면 ‘위’라 불리는 작위를 받 고 공주의 남편이면 종1품, 옹주의 남편이면 종2품을 받을 뿐, 관 리로 지낼 수는 없었다. 왕의 입장에서는 잘난 사내를 딸의 배필로 삼고 싶으니 재능이 뛰어난 사람을 부마로 고르게 되는데, 부마의 처지에서 보자면 그 재능을 발휘할 길이 막혀 버리는 셈이었다. 이 때문에 자연히 부마가 되는 것을 기뻐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부부 간의 정도 쉽게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부부가 환난을 견뎌 가며 때 론 연인처럼, 때론 친구처럼 서로를 격려하며 지낸 경우도 있었다.



(2021가을겨울_연정-1_사진2)동양위 신익성(1588-1644) _ 일암관 소장

동양위 신익성(1588-1644)_ 일암관 소장 불문법으로 전해오던 부마의 재혼금지 규정은 숙종임금 때 정식으로 국법으로 인정되었다.

(2021가을겨울_연정-1_사진4)이징필 화개현구장도李澄筆花開縣舊莊圖, 이징 _ 국립중앙박물관

이징필 화개현구장도李澄筆花開縣舊莊圖, 이징_ 국립중앙박물관 경상도 하동군 옆 화개현에 있는 정여창의 별장을 그린 이징의 그림으로 하단의 그림 제 작 배경 관련 글은 신익성의 것이다. 글씨에 뛰어난 신익성은 왕실 출신 화원 이징과 가까 웠다고 한다.


신익성(1588~1644)은 선조의 후궁 인빈 김씨의 셋째 딸 정숙옹 주(1587~1627)와 혼인하여 동양위에 봉해졌다. 신익성의 아버지 는 신흠(1526~1628)으로 선조가 붕어할 때 영창대군을 보살피 라는 유조를 받은 인물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1년 후인 1599년에 열세 살 정숙옹주가 열두 살 신익성에게 시집을 갔다. 혼례는 치렀지만, 선조는 전란 끝에 초라한 혼례식을 올린 어린 딸이 바로 궁에서 나가는 것이 안쓰 러워 그녀를 2년 더 궁에 머물게 하였다. 그녀는 열다섯의 나이로 집안일을 도맡아 한 치의 틀림없이 처리해 나갔다. 더구나 그 과정에서 귀한 신분을 내세우지 않아 집안 친척들도 그녀를 스스 럼없이 대하게 되었다. 그녀는 옷이 해져도 꿰매 입을 뿐, 새 옷을 장만하지 않았고 밥상도 호화롭게 차리는 일이 없었다. 늘 자신 에게 박하게 굴었다. 궁에 들어갈 때 다른 사람들은 모두 호사스 럽게 차려입었지만, 그때도 검소한 모습이었다. 이 때문에 시중을 들던 사람이 부끄러워했는데 옹주는 웃으며이렇게 말했다.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내 앞자리에 있지 않을 것이니 걱 정하지 마라.” 


신익성이 어찌 이런 아내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두사람 사이에 자녀는 모두 13명이 있었다. 자녀들에게도 비단옷이 아니라 삼베옷을 입혀서 키웠다. 하지만 신익성은 야망이 있었던 몸이어서 때로는 그녀 때문에 어린 시절 꿈꿔 왔던 대제학이 될 수 없다는 사실에 울화가 치밀어오르기도 했다. 대제학은 학문 으로 최고의 자리를 뜻하기 때문에 모든 선비가 꿈꾸는 관직이 었다. 하루는 신익성이 옥관자가 붙은 망건을 정숙옹주 앞에 내 팽개치며 화를 냈다. 


“나는 이 원수 놈의 물건 때문에 대제학에 오르지 못합니다!” 


이 소동을 들은 임금님이 신익성을 궁으로 불렀다. 


“대제학에 합당한 사람을 추천해보오.” 


이 말에 신익성이 사람을 골라 추천했다. 임금님이 웃으며 말했다. 


“경이 대제학을 추천했으니 경이 대제학이 된 것이나 다를 게 없소.” 


이 일화를 통해 왕실이 그를 중히 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광해군 때 신익성의 집안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앞서 말 한 것처럼 신흠은 선조의 적자였던 영창대군을 보호하라는 어 명을 받았는데, 광해군에게 영창대군은 왕위를 위협하는 가장 강력한 적수였다. 인목대비의 폐위가 논의되기 시작하자 신익성 은 병을 핑계로 조정에도 나가지 않고 손님도 받지 않았는데 누 군가가 은밀히 찾아왔다. 그 손님은 심하게 신익성을 다그쳤는 데, 분위기가 자못 험악했다. 하지만 신익성은 목소리를 높여 반 박하지 않았다. 정숙옹주는 불안한 마음을 누르고 손님이 가길 기다렸다가 고기를 굽고 술을 장만하여 남편에게 나아갔다. 


“아까 손님의 말에 설마 마음이 움직인 것은 아니겠지요? 죽고 사는 것은 운명이니, 불행이 찾아온다 해도 정도를 걸어야 합니다. 반드시 죽는다고 볼 수도 없겠지요. 황폐하고 궁벽한 곳 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해도, 그곳 또한 사람이 사는 곳 아니 겠어요. 부군이 어디를 가든 저는 따라갈것입니다.” 


정숙옹주가 울면서 말을 하니 신익성도 함께 눈물을 흘렸다. 정 숙옹주는 이렇게 남편이 잘못하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이야기하 여 바로잡게 했으며 한 번도 그냥 넘어간 적이 없었다. 신익성 역 시 늘 아내의 말을 따랐는데, 이렇게 하면 결국 일이 잘 풀린다 는 것을 알았다. 현명하고 강단과 기개가 넘쳤던 정숙옹주는 마 흔하나라는 이른 나이에 유명을 달리했다. 신흠은 깊은 슬픔에 빠졌다. 신익성은 아내를 그리며 제문을 썼다. 제문에는 아내에 대한 애끓는 정이 넘쳐흐른다. 


조물주가 가득 찬 것을 시기하니, 하늘의 이치가 어긋나 이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집안의 제사를 누구와 함께 준비하고, 아이들의 혼사는 누구와 준비하겠습니까? 슬픔과 기쁨은 누구와 나누겠습니까? 아버지를 섬기는 일은 누구와 함께합니까? 이제 남은 삶이 즐거울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알 수 있습니다. (출전 : 제망실정숙옹주문(祭亡室貞淑翁主文) 《낙전당집( 樂全堂集)》)



(2021가을겨울_연정-1_사진3-1)정일당유고_국립중앙도서관

정일당유고_국립중앙도서관

(2021가을겨울_연정-1_사진3-2)정일당유고 표지_국립중앙도서관

정일당유고 표지_국립중앙도서관



이 글이 차마 묻혀 버리지 않도록 - 강정일당과 윤광연


서른에 공부를 시작하니 三十始課讀

학문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네 於學迷西東

그래도 지금부터 노력하면 及今須勞力

옛 성인에 비슷해지리라 庶期古人同

(출전 : 정일당유고(靜一堂遺稿))



강정일당(1772~1832)은 충북 제천에서 태어나 20세에 윤광연에 게 시집을 갔다. 윤광연은 이때 14세였다. 강정일당의 본명은 강 지덕이다. 그녀를 잉태했을 때 꿈에 두 명의 왕비가 찾아와 ‘이 아이는 지극한 덕이 있다. 지금 너에게 맡기노라’라고 말하여 그 것을 이름으로 삼았다. 윤광연의 집은 가난해서 집도 그저 벽만 있는 형편이었다. 강정 일당은 삯바느질을 하며 남편이 공부를 할수 있도록 도왔다. 그 녀는 서른이 되어 남편과 함께 공부했는데, 남편보다 깨우침이 빨랐다. 강정일당은 남편이 학문으로 대성할 수 없다는 것을 깨 닫고 관리가 될 필요가 없다고 타일렀다. 두 사람은 학생들을 가 르치며 재야의 학자로 남았다. 윤광연은 아내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대의 가르침을 비록 내가 못 나서 모두 따를 수는 없었으나 아름다운 말과 올바른 충고는 내 몸에 종신토록 새겼습니다. 이로써 부부 간은 스승과 제자처럼 엄격하였고 조심하고 공경 함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언제나 그대와 더불어 앉으면 신명 을 대하는 것 같았고, 언제나 그대의 말을 들으면 눈앞이 어질 어질했습니다. 

(출전 : 정일당유고부록( 靜一堂遺稿附錄 )) 


강정일당은 여자가 차별받던 조선 시대에 여자도 성리학을 공부 하여 군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실천했다. 그녀는 이 렇게 말했다. 


“부모가 세상의 속된 말을 믿고 여자가 공부하는 것을 큰 금기 로 여겨 부녀자들이 종종 도리를 알지 못하니 심히 가소로운 일입니다.” 


이렇게 남녀 간의 대등함을 설파하고 남편의 존경을 받았던 그 녀는 남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윤광연은 아내의 문 집을 간행하기로 마음먹었다. 강정일당이 아파서 쓰러진 적이 있 었는데 이때 평생 심혈을 기울여 저술하던 책을 모두 잃어버리 는 일이 있었다. 강정일당은 크게 낙심했었는데, 윤광연은 그런 아내의 한을 풀어 주고 싶었다. 집안은 가난했지만, 이웃과 제자 들이 힘을 모아 줘 문집을 낼 수 있게 되었다. 

윤광연은 자기 스승 송치규에게 발문을 써달라고 요청하며, “이 글이 차마 묻혀 버리지 않도록 활자로 인쇄하고자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의 깊은 아내 사랑 덕분에 강정일당이 남긴 글과 시와 편지가 지금까지 전해질 수 있었다. 



부인의 현숙한 덕은 눈에 있는 것이 아니오 - 고성 이씨와 서해 


퇴계 이황의 제자 서해(1537~1559)는 시각장애인 아내 고성 이씨를 맞이했다. 여기에는 스승 이황이 관련되어 있다. 이씨는 청풍군수 이고의 무남독녀였다. 약으로 쓰려고 독초인 부자로 탕을 끓여 놓았는데 하녀가 세숫물로 잘못 알고 이씨에게 가져 간 바람에 눈이 멀고 말았다. 명문 고성 이씨 집안의 이고는 비 록 딸이 앞을 못 보지만 남편만은 뛰어난 인재로 얻고자 했다. 마침 조선에서 가장 뛰어난 학자 이황이 안동 사람이었다. 이고 는 이황을 찾아가 신랑감을 부탁했다. 이황이 사연을 들은 뒤 말했다. 


“내 제자 중에 서해라고 있는데, 인품이 훌륭하여 선생의 따님 과 혼인할 만합니다. 하지만 굳이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 지는 마십시오.” 


이렇게 해서 서해가 이씨와 혼인을 하게 되었다. 이씨는 눈이 보 이지 않는다는 게 들통나면 소박을 맞을까 무서워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안 서해는 그녀의 손을 따뜻이 잡아 주었다. 


“부인, 두려워하지 마시오. 부인의 현숙한 덕은 눈에 있는 것이 아니오.” 


서해는 아내에게 밤새 자기 집안에 대해서 알려 주고, 앞으로 어 떻게 대처할지도 궁리해 주었다. 이씨는 감동으로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이황은 자기 제자의 인품을 잘 알고 있었기에 아내에 게 장애가 있다고 내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이황의 아내 역시 정신이 온전치 않았지만, 이황은 언제나 정성을 다해 아내를 보살피고 아내의 흠을 감싸 주었다. 그런 스승의 아 내 사랑을 옆에서 본 서해 역시 자신처럼 아내를 대해 주리라 믿었던 것이다. 장인 이고는 이 기특한 사위를 위해서 소호헌이라는 집을 지어 주었다. 소호헌은 보물로 지정되어 지금도 남아 있다. 서해와 고성 이씨가 첫아들을 본 다음 해 서해가 갑작스레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겨우 스무 살이었다. 홀로 된 이씨는 한양의 약현에서 청주를 빚어 장사했다. 청주가 아주 맛이 좋아서 사람 들이 ‘약주’라 불렀다. 이씨는 비록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약주·약밥·약과·약포를 만들어 부자가 되었다. 아들 서성은 선조 때 과거에 2등으로 급제했고, 대사헌 등을 역임하며 74세까지 장수 했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2021가을겨울_연정-1_사진5)안동 소허헌 현판과 대청마루 _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안동 소허헌 현판과 대청마루_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